소설리스트

나 혼자 평행우주 독식-151화 (151/200)

151화 43장. 갑질의 미학

1.

“대표님, 더 이상 당좌 계좌를 메울 방법이 없습니다.”

“흠……. 결국 우리도 항복해야 하는 건가요?”

“죄송합니다. 재무이사로서 저는 실격입니다.”

“그런 말 마세요. 카즈이 이사님이 최선을 다했다는 것 압니다.”

“아닙니다. 대표님께서 자금 조달의 전권을 주셨는데,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일본이 IMF 관리 체제에 들어간 지 한 달이 지났으나, 경제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특히, 일본 기업이 느끼는 고통은 줄어들 조짐이 보이기는커녕 갈수록 무거워졌다. 곳곳에서 유동성 위기가 발생한 것.

7월 10일, 파낙과 같은 초우량 기업도 자금 고갈 상태에 몰렸다. 재무이사 카즈이 히나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했다.

“정말 비상사태군요. 그러면 공작기계 사업부를 매각하는 건 어떨까요? 고작 3,000억 엔에 파낙을 통째로 넘겨야 한다는 게 도저히 납득이 안 갑니다.”

“저도 그 방법을 포함해서 여러 가지 방안을 알아봤습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압박으로 번번이 무산됐습니다.”

“국제 투기 세력이 우리 목을 조르고 있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우리 돈줄을 모두 끊고, 말도 안 되는 헐값에 회사를 삼키려 하고 있습니다.”

파낙은 자동화 기기와 산업용 로봇 분야에서 세계 정상권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2022년 매출액 6,500억 엔, 영업이익 1,500억 엔의 실적을 올렸고, 시가총액이 6조 엔에 달했던 건실한 기업이다.

하지만 빅벤과 레드실드는 파낙을 유동성 위기로 몰아넣으면서, 1/20 가격으로 후려쳐 매입하려 획책하고 있다.

대표이사 츠리타 우타로는 사업부 매각으로 자금난을 벗어나려 했으나, 고인물들이 호락호락 용인할 리 없다.

“후……. 매각이 불가피하군요. 그렇다면 주주들과 임직원들에게 최대한 유리한 조건을 받아 내야겠죠. 인수를 타진했던 해외 기업들과 접촉해 보세요.”

“대표님, 그것이…….”

“왜요? 그것도 막혔나요?”

“그렇습니다. 인수 대금으로 10조 엔을 제시하던 자멘스가 2,900억 엔으로 조건을 변경했습니다.”

“캡슨은 어떤가요? 8조 엔을 제시했었죠?”

“캡슨의 수정 제안은 2,800억 엔입니다. 우리에게 인수를 제안했던 모든 기업이 가격을 3,000억 엔 이하로 맞추고 있습니다. 국제 투기 세력과 결탁한 것이 분명합니다.”

파낙 같은 우량 기업을 인수하려면, 시가총액보다 웃돈을 줘야 한다. 일본이 IMF 체제에 들어가기 전에 파낙을 고가에 인수하겠다고 제안한 해외 기업이 여럿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 기업들이 하나같이 3,000억 엔 이하로 인수 가격을 대폭 낮춰 제시하고 있다. 이건 고인물들 입안으로 파낙을 밀어 넣으려는 담합으로 봐도 무방하다.

“치가 떨릴 정도로 악랄한 자들이군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오백세건강과 접촉해 보세요.”

“오백세건강은 진공청소기처럼 일본 기업을 사들이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 회사를 인수하면, 사업부별로 분해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게 되면 파낙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도 우리를 궁지로 몬 국제 투기 세력에 넘기는 것보다 낫습니다. 그자들은 더 악랄합니다. 사업부 분할 정도가 아니라, 파낙을 공중분해 하려 들 것이 분명합니다.”

오백세건강이 인수한 일본 기업이 40개가 넘어간다. 그중에는 파낙과 유사한 사업 분야를 가진 기업도 2개 포함돼 있다.

카즈이 히나타는 오백세건강이 파낙을 인수하면, 전면적인 사업부 조정이 있을 거라 예상했다.

파낙이 온전한 형태로 유지돼야 재기와 독립을 할 수 있기에, 오백세건강을 부적합한 매수자로 여겼다.

하지만 츠리타 우타로의 생각은 달랐다. 파낙을 도산 직전으로 몰고 간 고인물들이 사업부와 자산을 곱게 놔둘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음……. 토지와 특허권을 노리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죠.”

“게다가 오백세건강이 국제 투기 세력보다 인수 대금을 최소 50%는 더 지불한다고 하더군요.”

“무시할 수 없는 금액이죠. 후……. 알겠습니다, 대표님. 오백세건강과 매각 협상을 시작하겠습니다.”

파낙을 오백세건강에게 넘기는 것이 탐탁지는 않다. 그러나 원수 같은 국제 투기 세력에 넘기는 것보다 감정적으로 월등히 나은 선택이다.

또한, 1,500억 엔을 더 받을 수 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제값을 받는 건 아니지만, 파낙 임직원과 주주들에게 넘겨줄 것이 늘어나는 건 중요한 포인트다.

파낙 재무이사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대표의 지시를 따랐다.

2.

<오백세건강 놈들이 파낙까지 집어삼켰소! 작업은 우리가 다 했는데 이익은 그놈들이 챙긴 거요!>

<그렇게 말이오! 알짜배기는 오백세건강이 챙기고, 우리는 쭉정이만 가진 셈이오!>

빅벤과 레드실드는 100개가 넘는 일본 기업을 적정가의 1/20 가격에 구매했다. 전체 자산 규모를 보면, 오백세건강이 인수한 기업을 합한 것보다 크다.

그런데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오백세건강이 인수한 기업들의 기술과 매출액 그리고 순이익이 월등히 높기 때문이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사람이 챙긴다. 빅벤 집행위원회 의장 이언 매코이와 레드실드 가주 베르너 레드실드는, 오백세건강이 우량 기업을 가로채는 것에 분통을 터트렸다.

<이대로는 안 되오!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하오!>

<일본에 파견된 오백세건강 놈들을 처단하려는 거요? 성공 가능성이 보이면 시도해 볼 만한 일이오.>

<경호 병력이 만만치 않소. 게다가 사건이 벌어지면 우리가 노출될 수 있소.>

<그러면 어떤 방법이 있다는 거요? 뜸 들이지 말고 말하시오.>

하나 마나 한 소리 말고 본론을 말해라. 오백세건강이 만만치 않은 무력을 갖추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베르너 레드실드는 쓸데없이 시간을 끄는 이언 매코이에게 살짝 짜증을 냈다.

<커험. 성격하고는……. 좋소. 핵심을 말하리다. 기업 매각 방식을 입찰로 바꾸는 거요. 매각 주간사를 우리가 장악하면, 오백세건강 놈들의 수작질을 충분히 막을 수 있소.>

<묘안이군! 묘안이야! 좋소! 그렇게 만듭시다!>

예상하지 못한 굿 아이디어. 기업 매각을 당사자 간 직접 매각이 아니라 경쟁 입찰로 돌리면, 고인물들이 개입할 여지가 많아진다.

매각 주간사를 장악하는 것이 키포인트. 주간사를 통해 고인물들에게 유리한 매각 방식을 만들고 중요한 정보를 빼돌리면, 오백세건강이 50% 더 높은 가격을 써도 낙찰을 막을 수 있다.

레드실드 가주는 빅벤 수장의 제안을 높이 평가하며, 즉석에서 받아들였다.

* * *

“창수야, 고인물 놈들이 재주를 부리기 시작했다.”

“사보타주를 획책하는 건가요?”

“아니. 기업 매각 룰을 경쟁 입찰 방식으로 바꾸려 하고 있어.”

“그건 그놈들에게 불리한 방식 아닌가요? 인수 기간이 길어지고 거래에 개입하는 사람이 많아질 건데요.”

정보 네트워크를 통해, 빅벤과 레드실드의 움직임을 파악한 김근홍이 창수에게 그 내용을 알렸다.

창수는 빅벤과 레드실드의 계획을 듣고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빠르고 조용하게 처리하는 고인물의 특성과 완전히 다른 방식이기 때문이다.

경쟁 입찰은 당사자 간 거래보다 4~5단계 절차를 더 거쳐야 한다. 필연적으로 번거로운 문제들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경쟁 입찰 방식을 채택한 기업에 압력을 넣어 직거래로 바꿔야 할 고인물들이, 오히려 앞장서서 복잡한 방식을 추진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맞아. 여러 가지 골치 아픈 일이 발생하지. 하지만 우리에게 경쟁력에서 밀리니, 번거로움을 감수하겠다고 나선 거야.”

“그래 봐야 우리가 입찰 가격을 높이면, 이기는 것 아닌가요?”

“상식적으로 그렇지만, 고인물 놈들이 매각 주간사를 장악하고 평가 성적에 장난질할 거야. 단순히 입찰 금액이 높다고 이긴다는 보장이 없어.”

“흠……. 시험 보는 학생이 감독관 역할을 겸하는 거군요.”

“그런 셈이지.”

김근홍의 설명을 들은 창수는 빅벤과 레드실드의 수작이 만만치 않은 위협이라는 걸 알게 됐다.

창수가 압도적인 자금과 강력한 무력을 갖추고 있으나, 금융업계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은 미약하다.

매각 주간사를 컨트롤하는 능력에서 고인물들과 비교해 현격히 떨어지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고인물 놈들이 수작을 부리기 전에 우리가 점찍은 기업에 추가 베팅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예상보다 2~3배는 더 줘야 즉시 구매할 수 있을 거야.”

“그래도 정상 가격의 1/4 수준 아닌가요? 엔화 가치가 떨어진 걸 생각하면, 1/6 정도 가격에 매입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건 그렇지. 하지만 현재 시장가격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가만히 당하고 있을 창수가 아니다. 빅벤과 레드실드가 위협적인 대안을 마련했다면, 그것이 발동하기 전에 매입을 마무리하면 된다. 전격전 방식으로.

하지만 금융 전문가 김근홍이 인식의 차이를 드러냈다.

창수가 사업을 전체적인 시각으로 본 반면, 김근홍이 시장가격을 존중하는 금융 전문가의 자세를 보이며, 과도한 베팅에 난색을 표한 것이다.

“지금 형성된 가격은 고인물들의 농간으로 만들어진 겁니다. 굳이 우리가 지킬 필요 없다고 봅니다.”

“음……. 그렇군. 막판에 가격을 올린다고 해서 우리가 크게 손해 볼 건 없지.”

창수의 말이 옳다. 정상가격의 1/20은 제대로 된 시장가격이 아니다. 이걸 파괴한다고 하여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게다가 베팅을 올려도, 여전히 사전에 예상한 인수 가격보다 낮다. 김근홍은 몸에 밴 습관을 버리고, 창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리스트에 남아 있는 기업에 오퍼를 보내세요. 그리고 저는 일본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인수 작업을 진두지휘할 생각이야?”

“아니요. 인수 작업은 지금처럼 선배님이 지휘하세요. 저는 정보를 모아서, 베팅해도 안 되는 기업을 공략하겠습니다.”

“오케이. 무슨 말인지 알았다.”

현재 구매 리스트에 남아 있는 일본 기업은 모두 25개. 추가 베팅을 한다고 해도, 25개 기업 전부를 매입한다는 보장이 없다.

창수는 일본으로 이동해, 매입이 지연되는 기업의 자세한 내부 사정을 알아볼 계획이다.

굳이 이렇게 안 해도, 애초 목표한 57개 기업 인수를 달성할 수 있을 거다. 그러나 빅벤과 레드실드의 비열한 행태를 보고, 순순히 물러날 수 없다는 투쟁심이 발동했다.

* * *

<빌어먹을! 오백세건강 놈들이 돈지랄을 시작했소!>

<나도 알고 있소! 정말 빌어먹을 놈들이오! 이렇게 빨리 움직일지 생각도 못 했소!>

돈의 힘은 강력하다. 오백세건강이 인수 금액을 2배 높여 제시하자 7개 기업이 받아들였고, 3배를 제시하자 13개 기업이 받아들였다.

이제 일본 알짜 기업 중에 남아 있는 건 5개에 불과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언 매코이와 베르너 레드실드의 속이 뒤집히는 건 자연스러운 일.

<이대로 당할 수는 없소! 하드뱅크는 반드시 우리가 인수해야 하오!>

<그건 걱정 마시오. 매각 주간사가 우리 계열 회사니까.>

그래도 남은 희망(?)은 일본 IT 산업을 선도하는 하드뱅크를 인수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거다.

시가총액 1,000억 달러에 달했던 기술 선도 기업을 빅벤과 레드실드가 인수하면, 오백세건강에 당한 것에 대한 분풀이를 하며 일정 부분 만회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드뱅크의 회장이자 최대 주주가 한국계 일본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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