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42장. 떨이로 쓸어 담다
2.
일본 시간 6월 8일 목요일 오후 2시, 창수가 김근홍에게 중요한 정보를 전달했다.
[일본이 IMF 구제금융에 합의했습니다.]
[드디어 항복했군.]
[후지다가 끝까지 저항했지만, 일본이 부도난 것과 다를 바 없어서 별도리가 없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이후 최대 굴욕이겠구만.]
[맞습니다. 장관 중 일부는 할복이라도 하자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6월 5일 일본 금융시장이 무너진 이후, 일본 경제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후지다가 야심 차게 추진했던 독일과 프랑스 정상과의 만남도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다.
이제 손 내밀 곳은 IMF 이외에 없다. 하지만 경제 위기에 빠진 국가에 가혹한 정책을 강요하는 IMF와 협상이 쉬울 리 없다.
후지다는 조금이라도 합의 조건을 완화하려 노력했으나, IMF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해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 경제가 받는 타격이 깊어지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도장을 찍은 것이다.
[비열한 일본 놈들, 할복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그런 말 하는 놈들은 안 죽어. 대신 다른 멍청한 놈 꼬드겨 죽게 만드는 거지.]
[그렇죠. 장관 중에서 할복하는 게 아니라, 실무자 중에서 희생양을 고르려는 낌새를 보이더군요.]
[어휴, 한심한 놈들. 세월이 가도 발전이라는 걸 모르냐? 그건 그렇고 IMF와 합의한다는 발표는 언제 하는 거야?]
[4시간 후입니다. 합의 내용이 방대해서 검토 시간이 길어진다고 합니다.]
[아주 좋아! 포지션 정리하기 충분한 시간이군!]
[지금 정리에 들어갈 건가요?]
[그래야지. IMF가 결정됐으면, 빨리 정리해야 해. 그래야 최고 수익을 올릴 수 있어.]
현재 엔화의 가치는 달러당 367엔이다. 김근홍이 예상한 것보다 17엔 정도 더 빠진 상황. 당장 포지션을 정리해야 한다.
일본이 IMF 체제에 들어가면, 불확실성이 해소되면서 엔화가 반등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쓸데없이 꼼꼼한 일본 공무원의 일 처리가 고맙다. 청산할 시간을 4시간이나 준 거니까.
[선배님만 믿겠습니다.]
[맡겨 둬. 그리고 저번처럼 정보가 들어오면 바로 알려 줘. 거래 중이라 대답은 못 해도, 내가 계속 보고 있을 거니까.]
[알겠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금융시장에서 수익은 타이밍에 달려 있다. 아무리 호재를 알아도 매매 타이밍을 제대로 잡지 못하면, 큰 수익을 내기 어렵다.
김근홍은 지금이 최상의 매각 타이밍이라 판단하고, 2차 일본 공략의 가장 핵심이 되는 청산이라는 클라이맥스에 진입했다.
“우선, 외가를 정리하자.”
- 타다닥!
김근홍이 구축한 하방 포지션은 원금만 1,000억 달러에 달한다. 이걸 무작정 청산하면, 그 자체로 엔화를 반등시킬 수 있다.
금융 전문가 김근홍은 이 사실을 잘 알고, 1,000배 이상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외가격 풋 옵션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수익 6,000억 달러! 시작이 좋군! 아주 좋아!”
외가격 풋 옵션을 구매하는 데 투입한 비용이 5억 달러, 종목마다 차이가 있으나 평균 1,200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수익을 얻었다.
6,000억 달러는 처음 목표한 7,000억 달러 수익에서 1,000억 달러가 모자란 금액이다. 투자 금액의 0.5%로 목표 수익의 85.7%를 달성한 것이다.
김근홍은 무사히 최상의 수익을 거둔 것에 기꺼워했다.
“등가 처리는 잠시 시간을 두자. 너무 빨리 움직이면, 고인물들이 눈치챌 수 있어.”
외가 옵션 매각을 마친 시간은 2시 23분, 현재 엔화에 국제 금융 세력의 자금이 몰려 있기에, 시장에 영향을 주지 않고 처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건 아직 IMF 합의가 시장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풋 옵션 매도세가 강해지면, 빅벤과 레드실드가 시장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다.
김근홍은 잠시 청산 템포를 늦추고 시장 변화를 주시했다.
“엔화가 379엔까지 가는군! 좋아, 여기서 등가를 다 터는 거야!”
오후 2시 40분, 김군홍이 매각한 풋 옵션을 시장이 모두 소화하고, 오히려 엔화 가치가 미세하나마 하락했다.
김근홍은 이것을 본격적인 청산 신호로 봤다. 조금 더 기다려 엔화의 가치가 더 떨어지기를 바랄 수 있으나, 그사이에 IMF 구제금융 정보가 새 나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금융 전문가로서 수많은 거래를 경험한 김근홍은 본능적으로 지금이 등가격 옵션을 정리할 최적의 시기라고 판단했다.
- 타다닥! 타다닥!
김근홍은 화면 9개와 연결된 우회 경로를 통해 등가격 옵션을 빠르게 청산했다. 외가격 옵션 정리보다 2배 이상 빠른 속도.
“벌써 알아차렸군! 감이 좋은 놈들이야!”
김근홍이 매입한 등가격 풋 옵션은 모두 200억 달러 규모. 그중에서 60%를 정리할 때 시장이 반응을 보였다.
엔화 가치가 달러당 갑자기 50엔 급등한 것. 이건 레드실드 금융 팀이 김근홍의 매도를 알아차렸기에 발생한 일이다.
“더 볼 것 없지, 시장가로 던지는 거야!”
- 타다닥! 타다닥!
등가격 옵션 40%를 다 정리해도, 아직도 구매가 795억 달러 규모의 내가격 옵션이 남아 있다. 그런데도 김근홍은 시장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투매를 실행했다.
마음이 급해 실수한 것일까? 아니면 과도한 욕심?
“좋아! 1조 달러! 최종 목표 수익을 넘긴 거야!”
실수가 아니다. 김근홍의 시장가 매도는 전문가다운 탁월한 선택이었다. 외가격과 등가격 풋 옵션을 정리한 것만으로, 1조 6,000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수익을 실현했으니까.
수정한 최종 예상 수익 1조 5,000억 달러를 1,000억 달러나 초과한 대단한 성과다.
이런 결과는 김근홍이 옵션의 가격 결정 구조를 손바닥 보듯이 알기에 가능했다.
기준 자산의 변동은 외가격 옵션 > 등가격 옵션 > 내가격 옵션 순으로 영향을 미친다. 등가격에서 50엔 변화가 만드는 가격 변동이 내가격에서 100엔 변화가 만드는 가격 변동보다 클 수 있다.
“하하하. 삽시간에 230엔까지 뛰었군! 고인물 놈들 눈에 불똥 튀기겠는데!”
3시 10분, 조금 전 달러당 379엔이었던 엔화 가치가 149엔이나 폭등했다. 김근홍이 시장에 던진 풋 옵션이 만든 결과물.
이로써 795억 달러에 달하는 내가격 풋 옵션을 고가에 정리하기 어려워졌다. 하지만 김근홍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목표 수익을 달성해서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115엔에서 구매한 내가격 풋 옵션 795억 달러의 현재 가치는 대략 3,000억 달러. 전체 수익이 빈약했다면, 조금이라도 수익을 높이기 위해 심력을 기울였겠지만, 지금은 2,200억 달러 수익에 만족한다.
게다가 일본이 IMF 체제에 들어간다는 정보가 새 나간다고 해도, 일본 엔화의 적정 가치는 달러당 250엔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지금보다 더 좋은 내가격 풋 옵션 매도 타이밍이 올 가능성이 크다.
김근홍은 느긋한 마음으로 엔화의 움직임을 지켜봤다.
3.
김근홍이 여유롭게 시장 상황을 지켜보던 시각, 빅벤 집행위원회 의장 이언 매코이가 레드실드 가주와 통화했다.
<이보시오! 당신네 욕심만 채우면 그만이다 이거요!?>
<무슨 소리요? 그게?>
<신사협정을 어기고 시장에 매물을 쏟아부으면 어쩌자는 거요!? 230엔이 뭐요!? 230엔이!?>
<커험. 그건 우리가 한 일이 아니오. 번지수를 잘못 찾았소.>
<어허! 발뺌하는 거요!? 일본이 IMF 구제금융 받는다는 정보를 우리가 알아내서 당신에게 알려 준 것인데, 당신네가 아니면 누가 했다는 말이오!?>
일본이 IMF와 합의했다는 정보를 빅벤이 감지하고, 레드실드에 통보했다. 집행위원 중에서 빅벤만 정보를 활용하자는 주장도 있었으나, 일본을 확실하게 털어먹으려면, 레드실드와 협력해야 한다고 판단해 통 큰 결단을 내린 거다.
그러나 선의의 결과는 참담했다. 김근홍의 투매로 엔화 가치가 급등한 것.
이언 매코이는 시장이 동요하지 않도록 야금야금 포지션을 정리한다는 약속을 레드실드가 저버리고, 욕심을 채우다가 사달이 난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가 가진 포지션의 1%도 처리하지 못했소. 하도 어이가 없어서, 분탕질한 놈을 추적하는 중이오.>
<그래서 누가 일을 저질렀다는 거요?>
<중국으로 자금이 들어가고 있소.>
<중국 정부 짓이라는 거요?>
<그건 아직 모르오. 하지만 분명한 건 중국에 유통 네트워크를 가진 자금이 선수를 쳤다는 거요. 그게 중국 정부일 수도 있고, 화교 자본과 결탁한 상하이방일 수도 있소.>
<빌어먹을 중국 놈들!>
김근홍은 조세 회피처 5곳을 거점으로 중국과 반복해서 연결하는 우회로를 통해 자금을 처리하고 있다.
금융 분야에 탁월한 능력을 갖춘 레드실드지만, 풋 옵션을 투매한 세력이 중국과 관련됐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중국은 고인물들이 제대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국가다.
베르너 레드실드의 설명을 들은 이언 매코이가 할 수 있는 건 분통을 터트리는 것 이외에 없었다.
<처음부터 중국 쪽에서 일본을 털어먹으려고 작전을 짠 거요. 후발 주자로 우리가 들어갔으니, 불이익은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하오.>
<중국이 저지른 짓이라면, 일본에 위안화를 공급한 건 뭐란 말이오?>
<일종의 알리바이 아니겠소?>
<후……. 당신 말을 들으니 그럴듯하군.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할 거요? 230엔으로는 경비도 제대로 나오지 않을 건데.>
<동감하오. 최소한 270엔으로 밀어내야, 발품값이라도 건질 거요. 그러니 빅벤도 협조하시오.>
<좋소. 어차피 여기까지 와서 물러날 수 없지.>
<말귀가 통하는군. 그러면 우선…….>
고인물들이 하방 포지션을 구축할 때 엔화 가치는 달러당 170엔에서 200엔 사이였다. 충분한 수익을 올리려면, 엔화 가치를 달러당 270원으로 밀어낼 필요가 있다.
베르너 레드실드는 일본을 공략한 세력과 풋 옵션을 투매한 세력이 동일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김근홍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으나, 제한된 정보를 가지고 제법 뛰어난 판단을 한 것.
그리고 중국계 자금이 1조 달러 이상 수익을 챙겼기에, 추가 투매가 없을 거라 보고, 엔화 가치를 떨어트리는 작업을 시작했다.
레드실드 단독으로 만만치 않은 일이지만, 빅벤과 협력하면 한결 수월할 거다.
* * *
[창수야! 모두 청산했다! 대성공이야!]
[수고 많으셨습니다, 선배님. 아까 엔화가 급등해서 걱정했는데, 무사히 거래가 끝나서 다행입니다.]
오후 5시 10분, 내가격 풋 옵션까지 완전히 정리를 마친 김근홍이 창수에게 성공적으로 매매가 끝났음을 알렸다.
창수는 엔화 가치가 달러당 230엔까지 치솟을 때, 청산 과정에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성공’이라는 말에 청산이 정상적으로 이뤄졌다는 걸 알게 됐다.
[아, 그거. 내가 매매 기술 좀 부린 거야. 그런데 고인물 놈들이 알아서 정리하더군. 껄껄껄.]
[잘됐습니다. 그러면 이제 헐값으로 나오는 기업에 집중하면 되겠군요.]
[그렇지. 자금이 두둑하니, 떨이로 쓸어 담아도 될 거야.]
[그래요? 우리가 얼마나 번 거죠?]
[빨리도 물어본다. 놀라지 마라. 이번에 번 것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