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41장. 추락하는 흉물에 날개는 없다
5.
[선배님. 일본이 위안화를 공급받기 위해 중국과 협상에 들어갔습니다.]
[결국, 갈 데까지 간 거군.]
예측된 움직임이다. 일본의 행보를 파악한 창수가 김근홍에게 자세한 내용을 알렸으나, 놀라지 않았다.
돈줄이 말라 가는 일본이 중국 바짓가랑이를 잡을 수밖에 없다고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미국이 달러 공급을 중단하고, EU, 영국, 캐나다, 스위스도 협조를 거부하니 달리 방법이 없는 거죠.]
[일본이 협상 카드로 꺼내 놓은 게 뭐야?]
[중국이 대만을 무력으로 점령하는 걸 인정하겠다고 합니다.]
[헐! 통수 죽이네! 대만을 위해 중국과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주둥이 털더니, 자기 살겠다고 헌신짝처럼 버린다고!?]
[이순신 장군이 ‘왜는 간사스럽기 짝이 없어, 예로부터 신의를 지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라고 말한 것이 일본을 비방한 건 아니죠.]
[하긴, 미국도 일본 놈들 이중성에 치를 떨면서, 인류학자에게 보고서를 써 달라고 한 적이 있지.]
[국화와 칼 말하는 건가요?]
[맞아. 그 내용이 얼마나 잘 맞는 지, 미국이 일본 점령할 때 요긴하게 써먹었다고 하더라고.]
국화와 칼(국화와 칼: 일본 문화의 패턴)은 1946년 미국 국무부의 요청으로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가 저술한 것이다.
미국은 전투 중에 옥쇄를 각오하며 처절하게 싸우다가도, 막상 포로가 되면 손쉽게 자국을 배반하는 일본군의 행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정신분열적인 일본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 고민하다가, 전문가의 시각으로 일본을 분석할 필요성을 느껴 저술을 의뢰한 거다.
루스 베네딕트는 가능한 한 일본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접근 자세를 보였으나, 혼네(속마음)와 다테마에(겉치레)로 나타내는 일본의 이중성을 꼬집었다.
그리고 ‘각자의 알맞은 자리’라는 것을 추구하면서, 강자 앞에 한없이 약해지는 일본의 저열한 특성을 기술했다.
창수와 김근홍은 일본이 대만을 제물로 삼아 중국의 협조를 얻어 내려는 것을 ‘일본이 일본 했다’라고 여겼다.
[중국도 일본의 비열한 면모를 모를 리 없다고 봅니다. 일본의 제안을 받아들일까요?]
[받아들일 거야. 나중에 어떻게 되더라도, 일단은 이익이니까.]
[일본이 말을 바꿔도, 대만에 치명적이라는 건가요?]
[맞아. 대만 정부와 여당이 일본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중국에 강경하게 나오고 있어. 일본이 중국의 대만 점령을 용인한다고 하면, 야당 쪽으로 힘이 급속히 쏠릴 거야.]
양안전쟁 이후, 대만 총통 차잉옌시의 권위가 추락하고, 야당 대표 뤄진샹이 권력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됐다. 일시적이지만, 전투를 종식시킨 공이 있으니 자연스러운 일.
차잉옌시와 여당은 위기감을 느끼고, 대만을 지켜 주겠다는 일본의 허언을 대대적으로 국민에게 홍보했다.
친일 성향이 강한 대만인이 정부 여당의 선전을 수용하면서, 대만 정치계의 파워 밸런스가 간신히 유지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중국의 대만 점령을 허용한다는 합의가 발표되면, 대만 권력의 축이 급속히 친중파 야당으로 몰릴 것이 분명하다.
김근홍은 이것만으로 중국이 일본의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본이 디폴트에 들어가면, 중국이 천문학적인 금액을 잃을 수 있습니다.]
[일본이 얼마를 요구하고 있지?]
[2조 2,000억 위안입니다.]
[3,500억 달러 정도 되는군. 그 정도면 다 날려도 중국에 큰 타격이 없어. 발권력이 충분하니까. 그리고 일본이 변제를 못 하면, 그걸 기회로 위안화 영향력을 강화할 거야. 이래저래 손해 없는 장사지.]
2023년 1/4분기 기준 중국의 M2(광의 통화)는 250조 위안에 달한다. 일본이 요구하는 금액이 통화량의 0.88%에 불과하다.
설령 일본이 국가 부도 상태에 빠진다고 해도, 중국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다. 게다가 중국은 2조 2,000억 위안을 바탕으로 일본의 목줄을 쥘 수 있다.
현재 중국이 세계 교역량의 14%를 차지하고 있으나, 국제 교역에서 결제되는 위안화 비율은 고작 2.3%에 머물고 있다.
반면, 일본 엔화는 3.2%를 차지한다. 위안화가 엔화를 하부에 아우르면, 국제 지급 결제 비중이 단번에 5%로 상승할 수 있다.
[협상이 성사될 가능성이 높군요. 우리에게 많이 불리할까요?]
[적지 않은 악영향을 미칠 거야. 이대로 내버려 둬서는 안 돼.]
[미국에 정보를 흘려야겠군요.]
[그래야겠지. 그리고 여론전도 펼쳐야 해.]
일본의 마지막 발악을 제압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수익이 몇 배 차이 날 수 있다.
창수와 김근홍은 중국과 일본의 협상에 효과적으로 재 뿌릴 방안을 논의했다.
* * *
[경악! 일본, 대만을 배반했다!]
[대만을 중국에 넘기려는 일본!]
[일본의 신의는 휴지통 속 쓰레기인가?]
6월 4일 오후 10시, 대만 언론에서 일제히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일본이 위안화를 조달하기 위해, 중국과 협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과 협상 과정을 자세히 담은 내용.
대만 언론은 입을 모아 강도 높게 일본의 배신행위를 비판했다. 며칠 전까지 중국의 침공을 막아 주겠다고 호언장담하던 것을 순식간에 뒤집었으니 분노할 만하다.
- 이럴 줄 알았다니까! 일본 놈들을 믿는 게 아니었어!
- 젠장! 돈 빌려주고! 반도체 공장 지어 줬더니 돌아온 보답이 이거냐!?
- 일본 놈들은 처음부터 우리를 이용하고 버릴 셈이었던 거야!
- 당장 일본에 투자한 돈 모두 빼내야 해!
일본의 배반을 알게 된 대만인의 반응에 허탈과 분노가 섞여 있었다.
중국과 대만의 국력 차이가 너무 크기에, 대만 편에 서 줄 나라가 많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일본이 중국에 강경한 발언을 할 때, 무언가 미심쩍은 면이 있었으나, 워낙 친구가 없다 보니 무조건 긍정적으로 여기고 믿었다.
망해 버린 일본 반도체 산업을 되살리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공장을 지어 줬고, 일본이 금융 위기로 달러가 부족한 상황에서 1,500억 달러를 지원해 줬다.
일본은 허언 몇 마디로 대만에서 단물을 빨아 먹은 뒤, 더 이상 나올 게 없자, 매몰차게 뱉어 버린 거다.
대만인들은 일본의 간사함을 알면서도 믿을 수밖에 없었던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며, 일본에 보복해야 한다는 인식을 하게 됐다.
<슌오크 장관님! 어떻게 일본이 베이징과 손잡고 우리를 배반할 수 있습니까!?>
<무언가 오해인 것 같습니다. 언론이 발표한 건 근거 없는 억측일 뿐입니다.>
대만 정부도 뜬금없는 소식에 발칵 뒤집혔다. 대만 외교부장 자오즈샹이 일본 외무 장관 슌오크 코키에게 항의한 건 당연한 일.
변병이 궁색한 슌오크 코키는 무조건 부정하는 전술로 불편한 상황을 넘기려 했다.
<오해라고요? 베이징 전투함들이 동지나해에서 물러나고 있습니다. 엄연한 사실을 부정하려는 건가요?>
<중국 정부와 협의한 것이 바로 그겁니다. 양국 간 군사적 긴장을 줄이자는 데 합의한 겁니다.>
<같은 소리 아닙니까!? 일본이 베이징과 군사적 마찰을 피한다는 건, 베이징이 우리 대만을 침공할 때, 손 놓고 구경하겠다는 말이잖습니까!?>
<분명히 다른 겁니다.>
<뭐가 다른지 설명해 보시죠!>
<자세한 내용은 국가 기밀이기에 밝힐 수 없습니다.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양해요!? 대만을 아주 우습게 보는군요! 좋습니다! 일본이 그렇게 나온다면, 우리도 더 이상 호의를 보일 수 없습니다! 빌려 간 1,500억 달러 당장 돌려주시죠!>
일본 외무 장관이 거짓말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면, 지능에 문제가 있는 것이리라.
자오즈샹은 더 이상 말로 해 봐야 아무런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실력 행사에 들어갔다. 우호의 선물로 일본에 제공한 1,500억 달러를 회수하는 것.
<자오 장관님, 화를 가라앉히고 이성적으로 대화하시죠.>
<지금 이 상황에 이성이라는 말이 나옵니까!? 두말할 것 없습니다! 빌려 간 돈 갚으세요! 그렇지 않으면, 담보로 잡은 일본 자산 매각 절차에 들어갈 겁니다!>
<저 혼자 결정할 사안이 아니라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귀국의 뜻을 총리 각하께 전달하겠습니다. 시간을 주십시오.>
<시간이요? 이미 베이징의 전투함이 우리 쪽으로 오는데 무슨 시간이 있다는 겁니까!?>
<그… 그건…….>
슌오크 코키는 분노한 자오즈샹을 달래려 노력했으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연속해서 나오는 분노의 팩트 폭격을 막아 낼 방법이 없었다.
* * *
일본 외무 장관이 대만 외교부장으로부터 참교육을 당하고 있던 시간, 일본 재무 장관도 미국 재무 장관의 전화를 받아야 했다.
<미카미 장관님,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일본 금융시장이 붕괴하는 걸 손 놓고 볼 수 없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미국 정보력은 대만과 차원이 다르다. 숨겨 봐야 헛수고라는 걸 알고 있는 미카미 타게루는 솔직하게 이유를 말했다.
<그렇다고 중국에 굴복합니까? 최악의 선택입니다. 이번 일로 미국 정가에서 일본에 대한 인식이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습니다. 그걸 생각하지 못한 겁니까?>
<너무 과격한 인식입니다. 일본이 중국과 군사적 협력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중국에 흡수될 수밖에 없는 대만의 현실을 인정한다는 것뿐입니다.>
<중국이 대만을 삼키는 데 성공하면, 국제 정세가 어떻게 바뀌는지 모르고 하는 말입니까? 중국이 남중국해 지배권을 강화하고, 태평양 진출을 본격화할 겁니다.>
<일본이 금융 위기를 벗어나면, 중국을 충분히 막을 수 있습니다. 중국을 막기 위해서라도 미국의 지원이 절실합니다.>
<말도 안 되는 궤변입니다. 똑바로 들으세요. 미국이 패전국 일본에 막대한 지원을 하고, 2차 세계대전에서 벌인 죄악을 눈감아 준 건, 일본이 중국과 러시아의 팽창을 저지하는 데 앞장선다는 전제 조건이 있는 겁니다. 이번 일로 일본이 그 조건을 어겼으니, 합당한 처분을 받게 될 겁니다.>
미카미 타게루가 사력을 다해 일본의 입장을 설명했으나, 트레비스 호튼의 반응은 싸늘하고 매서웠다.
미국 정부와 의회는 물론이고, 일본 자금이 다수 유입된 싱크 탱크와 로비스트도, 일본에 강한 반감을 품게 된 현실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미국과 전쟁을 치른 적성국가다. 그것도 가벼운 국지전쟁이 아니라, 세계대전을 치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인 사망자는 48만 명에 달하고, 그중에서 20만 명이 제국주의 일본에게 당한 피해다.
미국 내부에서 일본을 적으로 인식하는 목소리가 지금도 존재하는 것이 당연한 일.
이런 반일적인 기류를 막은 것이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는 현실적인 효용성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효용성이 없어졌으니, 일본이 좋은 대접을 받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 될 거다.
<호튼 장관님, 제발 도와주십시오.>
<제가 일본을 도울 방법은 없습니다. 다만 돕는다면, 미카미 장관님 개인에게 충고하는 정도일 겁니다.>
<그… 그게 무엇입니까?>
<가능한 한 빨리 장관직에서 물러나십시오. 미카미 장관님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그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