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40장. 일본 몰락의 날
12.
“해외 자산 유입이 중단됐습니다. 이대로 방치하면, 엔화가 휴지 조각이 될 겁니다.”
“무슨 소리요!? 정부 재산을 왜 못 들여온다는 거요!?”
“정부가 보유한 외화를 일본 은행이 운용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재무성에서 집행하지만, 사용하려면 일본 은행의 협조가 필요한 겁니다.”
“칙쇼! 도대체 이게 어떻게 돼먹은 나라야!?”
일본의 약점이 일본 은행이었다. 국가기관이 아니면서 중앙은행 역할을 담당하는 구조적 문제점이 오늘과 같은 사달을 만든 것이다.
일본 정부는 1조 4,000억 달러에 달하는 외환 보유고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국가가 그러하듯 중앙은행이 외환 보유고를 관리한다. 한국이 한국은행 산하에 외자 운용원을 두고 있는 것처럼.
일본 정부가 1조 4,000억 달러를 소유한 것은 사실이나, 사용하려면 일본 은행이 정상 업무를 해야 한다.
창수가 일본 은행 기능을 정지시키니, 막대한 외화를 보유하고도 활용할 수 없는 처지가 된 거다.
후지다는 답이 없는 암담한 일본의 현실에 분노하며 울화통을 터트렸다.
“소리만 지른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비상 각의를 해서라도 일본 은행을 정상화하는 조치를 단행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금융시장뿐만 아니라, 경제 전체가 박살 납니다.”
“각의를 해도 실행하려면 최소 3일이 걸린단 말이오! 당신도 잘 알고 있지 않소!”
“총리가 책임지고 논스톱 절차를 거치면, 오늘 안으로 실행할 수 있습니다.”
“허! 책임지라고!? 오호라! 나에게 덤터기 씌울 생각이로군!”
“덤터기가 아니라, 자리에 맡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제가 재무 장관의 역할을 다하고 책임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흥! 말은 그럴듯하구만! 하지만 내가 당신의 검은 속을 모를 것 같아!?”
“그런 게 아닙니다! 우국충정을 정쟁으로 몰고 가지 마십시오!”
“어이구! 애국자 나셨네!”
다른 국가 정상과 비교해 일본 총리의 권한이 약하지만, 그래도 일본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자리다.
후지다가 책임을 지고 나서면, 일본 은행에 빠르게 조치할 수 있다. 그러나 복잡한 절차를 제치고 추진한 일이 잘못되면, 그 후폭풍을 감당하기 어렵다.
후지다는 우군에서 정적으로 돌변한 재무 장관 미카미 타게루의 제안을 믿지 못하고, 정치적 함정으로 여겼다.
“총리 각하, 카베세에게 위임장을 준 일본 은행 주주들을 설득하는 것이 어떨까요?”
총리와 재무 장관이 시간 낭비 말싸움에 돌입하자, 내각 정보관 사키야 쿠니무네가 나섰다.
일본 은행을 멈추게 한 힘의 원천이 35,000주에 달하는 위임장이다. 이 중에서 5,001주만 위임장 효력을 중단해도, 일본 은행을 정상화할 수 있다.
법을 개정하는 것보다 대응이 빠르고, 부작용도 적은 방안.
“오! 그거 좋은 방법이군! 하지만 주주 명단을 알아야 할 것 아니오? 일본 은행에서 쉽게 알려 주지 않을 거요.”
“그건 염려하지 마십시오. 애국심 넘치는 요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이미 명단을 확보했습니다.”
“요시! 즉시, 주주 설득 작업에 들어가시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시오! 필요하다면 지연 학연 다 사용하고, 비리 정보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활용하시오! 그리고 귀중한 정보를 가져온 요원들에게 포상하시오!”
“알겠습니다! 총리 각하!”
내각 정보관은 국정원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내각 정보 조사실의 수장이다.
본래 일본 은행에 제출한 위임장 내용을 외부로 유출할 수 없으나, 공작 요원을 투입해 불법적인 방법으로 정보를 탈취한 것이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총리 허가 없이 일본 내부에서 공작을 벌인 것이기에, 질책받아야 한다.
그러나 후지다는 불법을 저지른 요원을 비난하기는커녕 상을 주라고 말했다. 내각 정보 조사실이 확보한 주주 명단이 그만큼 소중하다는 의미.
게다가 주주 개인 비리가 있으면 활용하라는 불법을 조장하는 지시까지 내렸다.
그런데도 부총리와 재무 장관은 총리를 막지 않았다. 그것이 일본이 당면한 금융 위기를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의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 *
[충격! 국채 발행 실패!]
[해외 투자자 일본 국채 투매!]
[국채 가격 폭락! 금리 급등!]
일본이 국채 롤 오버에 실패했다는 소식이 시장에 알려지자, 투매 현상이 벌어졌다. 특히, 해외 세력이 일본 국채 투매에 앞장섰다.
일본 국가 부채가 GDP 280%에 달하는 상황에서, 국채 발행 실패가 대대적인 신용 등급 하락을 예고하기 때문이다.
만약, 일본 국채에서 나오는 이자가 충분하다면, 그걸 노리고 버틸 수 있으나, 마이너스 이자율을 보이는 애물단지다. 더 이상 일본 국채를 들고 있을 이유가 없다.
문제는 외국인이 보유한 일본 국채 물량이 만만치 않다는 점. 일본이 발행한 국채 8.5%를 차지하고 있다.
비율로 보면 많지 않지만, 일본 국가 부채 총액이 1,100조 엔이기에, 해외 세력이 보유한 일본 국채가 93조 5,000억 엔에 달한다. 일본 GDP의 18.7%에 해당하는 물량.
GDP 5% 규모 투매만 일어나도, 국채 시장이 마비된다. 하물며 18.7%는 어떻겠는가?
대규모 물량이 쏟아지자, 일본 국채 시장이 비명을 질렀다. 일본 국채 가격이 폭락하고, 그에 따라 반대로 움직이는 금리가 급상승했다.
- 국채 가격이 미친 듯이 떨어지고 있어! 당장 정리해!
- 지금 정리하면, 손실이 20%입니다. 반등을 기다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 헛소리하지 마! 반등은 없어! 무조건 정리해!
해외 투자자가 만든 폭락을 이어받은 다음 주자는 일본 생명보험 업계였다. 예금 봉쇄 소동이 있은 지 얼마 안 돼, 중앙은행이 마비되고 국채 가격이 폭락하자, 회생 불가능이라는 공포가 생명보험 회사들을 엄습한 것이다.
생명보험 업계가 보유한 일본 국채는 220조 엔에 달한다. 그리고 이 자금은 보험 가입자들에게 돌려줘야 할 돈이다.
생명보험 회사들은 손실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일본 국채 투매에 동참했다. 일본 국채 폭락이 가속화되지 않으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상황일 터.
이에 더해, 일본 상업은행과 증권사 그리고 펀드가 보유한 일본 국채도 시장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일본 은행이 업무를 중단한 상태에서 국채 매물을 받아 줄 대상이 없자, 일본 국채 시장은 비명을 넘어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13.
[창수야! 역외시장에서 엔화가 폭락하고 있다! 벌써 150엔이야!]
[헐. 순식간에 빠지는군요.]
일본 은행이 업무를 중단하고 일본 증시가 폭락하자, 엔화 가치가 6개월 이상 평균을 유지했던 달러당 115엔으로 복귀했다.
단번에 가치가 20% 떨어지면서, 창수와 김근홍은 2차 공략에서 90%에 달하던 투자 손실을 상당 부분 만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창수가 예상하던 만큼의 성과가 나오지 않아 실망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가 일본 국채가 폭락하면서, 115엔에 머물던 엔화가 달러당 150엔으로 가치가 급격히 하락했다.
창수는 외환시장의 신속한 움직임에 새삼 놀라게 됐다.
[외환 시장의 무서움이 바로 이거지. 그리고 즐거움이기도 하고.]
[그런가요? 저는 아무리 봐도 즐거움을 느끼기 어려울 것 같은데요.]
[커커커. 그거야 당연하지. 네가 이 경지에 오르면, 그건 사기 만능 캐릭이지. 너무 욕심내지 마라.]
[욕심은커녕 생각도 안 하고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어디서 몰려온 자금이 엔화 가치를 떨어트리는 건가요?]
[일본 국채를 매각한 외국인들이 엔화를 달러로 바꾸고 있어. 일시에 수천억 달러가 몰려오니, 엔화 가치가 폭락한 거야.]
나비효과의 일종이다. 일본 국채를 매각하면 대금은 당연히 엔화로 받는다. 국채만 아니라 일본 금융시장의 장래를 어둡게 본 해외 투자가들이 엔화를 달러로 환전하면서, 시장에 엔화가 풀리고 달러가 귀해진 거다.
이것이 적은 금액이라면, 시장에 미치는 영향력이 적겠지만, 2시간 만에 3,000억 달러에 달하는 결제 수요가 몰리면서, 엔화가 달러당 150으로 폭락한 거다.
[국채를 매각한 돈이 일본에서 빠져나가면, 엔화가 더 떨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요?]
[오! 날카로운 지적이야! 네 말대로 더 빠져야지, 하지만 와타나베 부인이 돌아오고 있어.]
[엔 캐리 트레이드 자금이 일본으로 유입된다는 건가요?]
[맞아. 엔화 가치가 급락하니, 와타나베 부인들이 대출금 청산 기회로 보고 몰려오는 거야.]
와타나베는 일본에서 흔한 성씨로, 한국의 최씨에 해당한다. 와타나베 부인은 일본 은행에서 싼 이자로 대출받은 돈을 해외에 투자해 수익을 올리는 일본 가정주부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 개념이 확대돼 일본 은행에서 돈을 빌려 해외에 투자하는 엔 캐리 트레이드를 총칭하는 용어가 됐다.
와타나베 부인이 일본 은행에서 115엔을 빌린 뒤, 달러로 환전해 미국에 1달러 예금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자.
이때, 엔화가 달러당 150달러가 되면, 미국에 예치한 1달러를 엔화로 바꿔 150엔을 확보할 수 있다.
와타나베 부인은 일본 은행에서 빌린 돈 115엔을 갚고도 35엔의 이익을 얻게 되는 거다.
김근홍은 이런 메커니즘을 가진 자금이 일본으로 들어와 환율을 지탱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 엔화 가치가 올라갈 수도 있겠네요.]
[그건 아니야. 와타나베 부인 자금 규모가 4,000억 달러야. 해외 투자자가 가지고 있던 일본 국채 규모가 8,000억 달러가 넘었으니까, 시간이 지나면 밀릴 수밖에 없어. 거기에 일본 국내 자금이 해외로 탈출하면, 엔화 가치가 더 떨어질 거야.]
[얼마까지 예상하시나요?]
[못 가도 200엔까지는 갈 거야. 운이 따라 준다면, 250엔도 가능해.]
[운이라면 어떤 걸 말하는 건가요?]
[그건…….]
와타나베 부인이 운용하는 자금은 세계 외환시장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규모가 크다. 그러나 일본에서 해외로 빠져나가려는 자금 규모에 미치지 못한다.
김근홍은 엔화 가치가 더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창수에게 앞으로 남은 대형 호재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했다.
이에 더해, 최고 청산 타이밍을 잡기 위해, 창수의 정보력이 필요하다는 걸 강조했다.
이미 목표한 수익에 도달했으나, 일본에서 최대한 많은 수익을 뽑아내야 한다. 창수와 김근홍은 막판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 * *
“사키야 정보관, 주주 설득 작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소?”
“5명을 설득해 5,100주 위임장을 무효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거 좋은 소식이구려! 당장 무효화시키고 일본 은행을 정상 가동하시오!”
2023년 5월 31일 오전 7시, 일본 주식시장 개장을 2시간 앞두고,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일본 은행 업무를 정지시킨 위임장 35,000주에서 5,100주를 빼낼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실행되면, 시민 연대 대표 카베세 야스노리가 보유한 위임장이 29,900주로 줄어든다. 지분 3%가 안 되기에 일본 은행에 요구한 사안들을 강제로 무효화시키고, 일본 중앙은행은 업무를 재개할 수 있게 된다.
총리 후지다는 기쁨에 찬 목소리로, 즉각 실행을 지시했다.
“총리 각하, 그 전에 선결할 조건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