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40장. 일본 몰락의 날
11.
[이해가 안 갑니다. 정부가 의결권을 사용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경영 참여 이야기가 아닙니다. 일본 은행이 매수한 ETF 총액이 55조 엔을 넘었습니다. 이건 전체 주식시장 가치의 10%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일본 은행 자금으로 주가를 떠받치고 있는 겁니다. 문제는 ETF를 언젠가는 정리해야 한다는 겁니다. 주식시장에서 자금이 10% 빠져나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대폭락이 발생하겠군요.]
[그렇습니다. 게다가 더 심각한 문제는 일본 은행이 국채 600조 엔과 ETF 55조엔 그리고 시중은행 대출금 145조 엔을 합해 800조 엔에 달하는 자산을 가지고 있음에도, 주가 총액이 400억 엔에 불과한 중소 은행이라는 겁니다.]
[일본 은행 가치가 너무 낮군요.]
[자산이 과도한 거죠. 2만 배. 일본은행에 만 엔을 투자하면, 자산 2억 엔을 보유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같은 일이 벌어진 겁니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각국 중앙은행의 불투명한 구조와 역할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늘었다. 그 여파로 발생한 것인 비트코인으로 대표되는 암호 화폐.
그리고 중앙은행 중에서 특히 심각한 문제를 가진 곳이 일본 은행이다.
금융 연구소장 나츠미 타케오미는 일본 은행이 치명적인 결점을 개선하기는커녕, 갈수록 위험을 증폭하고 있는 상황을 지적했다.
[흠……. 정말 심각하군요.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야 할까요?]
[지금이라도 일본 은행이 보유한 국채와 ETF를 줄이고, 부실기업을 정리해야 합니다.]
[뼈를 깎는 고통이 있어야 하는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번 위기를 잘 극복하면, 일본 금융시장은 물론이고, 경제 전반에 반등할 기회를 잡을 수 있습니다. 정부와 국민이 지혜와 힘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해답이 없다. 나츠미 타케오미는 일본 금융시장이 돌이킬 수 없는 단계에 들어섰다는 걸 알면서도,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이 그걸 언급하는 자체가 금융시장 붕괴의 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융 연구소장의 발언은 투자자들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 팔아! 무조건 팔아야 해!
- 너무 가격이 급하게 떨어지고 있어, 매매가 안 돼!
- 시장가에 던져!
- 그러면 손해가 너무 막심해!
- 헛소리 말고 던져! 그게 손해를 줄이는 거야!
마치 금이 간 댐이 일시에 무너지는 것 같은 현상이 발생했다. 금융 전문가로부터 일본 은행의 실상을 알게 된 개인 투자자들이 주식 투매에 나서기 시작한 것.
일본 은행이 주식시장에 깊숙이 개입한 것이 문제라는 인식이 확립되면, 일본 은행 업무가 재개된다 하더라도, 추가로 ETF 매입에 나설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이제 오를 가능성은 없고, 떨어질 일만 남은 상황.
게다가 오전 장에 니케이 지수가 역대 최고를 찍은 것이 악재가 됐다.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나온 매물이 위에서 쌓이면서 추락을 가속하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 * *
[선배님, 일본 주식시장이 서킷 브레이커에 들어갔습니다.]
일본 시간 오후 2시, 오후 장 마감을 1시간 남겨 두고, 일본 주식 거래가 일시 중지 됐다. 공포에 빠져 투매하는 것을 막으려는 임시 조치.
일본 시장 상황을 지켜보던 창수는 이 내용을 김근홍에게 알렸다.
[수고했다! 창수야! 기가 막힌 타이밍에 역전 홈런을 친 거야!]
[홈런치고는 약한 것 아닌가요? 2조 엔을 투입한 거라 써먹기는 했지만, 예상보다 반응이 시원치 않은 것 같습니다.]
시민 연대 대표 카베세 야스노리에게 일본 은행 주식 위임장을 건넨 건 창수였다.
빅벤과 레드실드는 고인물답게 비밀로 분류된 일본 은행 주주 명단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비밀금고를 턴 창수의 손에 주주 명단이 들어갔다.
창수는 함께 탈취한 일본 국채 5조 엔 중에서 2조 엔을 활용해 주주들과 접촉해, 1:1,000이 넘는 교환 비율로 일본 은행 주식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위임받았다.
주식을 매각하는 것이 아니고 활용할 권리를 준 것이기에, 위임장 확보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거래에 사용한 국채는 변조하지 않은 것으로, 일본 건설사에 대여만 해도 연간 4%, 총액 800억 엔에 달하는 수입을 올릴 수 있다. 일본 은행 주주들에게 재신이 강림한 것.
김근홍은 창수가 확보한 위임장으로 일본 은행 업무를 중단시킨 것을 대단한 성과라 여겼으나, 창수는 만족하지 못했다.
[일본 은행을 마비시킨 건 신의 한 수고 장외 홈런이야. 지금 반응이 느린 건 충격이 너무 커서, 아픔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거야. 앞으로 갈수록 효과가 커질 거다. 지켜보라고.]
[일본 정부가 개입할 가능성은 없는 건가요? 지금 긴급히 법안을 마련해, 일본 은행을 정상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개입할 방법을 찾으려고 발버둥 칠 거야. 하지만 이미 늦었어. 임계점을 넘었거든.]
창수와 김근홍이 2차 공략에 투입한 1,000억 달러가 일본 정부의 개입 때문에 100억 달러로 쪼그라들었다. 각오는 했지만, 투자금 90%가 날아가니 심적인 부담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창수는 일본 정부가 일본 은행 업무 중단 사대를 해결할 가능성을 생각했다. 비장한 각오로 대책 마련이 돌입하니, 돌파구를 만들 거라 여긴 것.
그러나 금융 전문가 김근홍의 판단은 달랐다. 일본 금융시장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에 들어섰다고 본 것이다.
[임계점이요? 기체와 액체 상태를 구분하는 경계선을 말하는 건가요?]
[그건 물리학이고, 금융 쪽에서는 설명이 조금 달라. 예를 들면, 원뿔 모양으로 쌓인 모래 더미가 있다고 생각해 봐. 거기서 모래알 하나를 덜어 냈어, 원뿔 형태가 변할까?]
[일부러 원뿔을 치지 않는 한 변하지 않겠죠.]
[맞아. 원뿔에서 모래알 하나를 덜어 내거나 집어넣어도, 형태가 변하지 않아. 하지만 원뿔에 계속해서 모래알을 집어넣으면, 어느 순간에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게 돼. 그때 무너진 모래 더미에서 모래알 하나를 빼낸다고 원뿔 모양이 복귀될까?]
[아하! 원상 복귀가 안 되는 지점을 임계점이라고 하는군요!]
[맞아. 일본 금융 시스템은 이미 임계점을 넘어 무너졌어. 일본 정부가 어떤 수단을 동원한다고 해도, 다시 원상 복귀는 불가능해.]
금융시장 붕괴가 무서운 이유 중 하나는 비가역적이라는 것이다.
일본 은행이 업무를 중단함으로써 일본 금융 시스템이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다시 일본 은행이 업무를 재개해도, 일본 금융시장이 이전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면 금융 위기는 극복할 수 없는 건가요?]
[극복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져. 과거 시스템으로 돌아간다는 걸 목표로 삼는다면, 불가능에 가까워. 하지만 새로운 시스템을 만든다는 자세를 보이면, 극복할 수 있어.]
[무너진 원뿔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원뿔을 다시 만드는 거군요.]
[맞아. 그것이 금융 위기를 벗어나는 핵심이야. 한국이 IMF 사태를 비교적 빠르게 극복한 건, 무너진 시스템에 연연하지 않고 처음부터 다시 시스템을 만들었기 때문이야.]
1997년 말 한국에 금융 위기가 닥치자. IMF는 유례없는 가혹한 조치로 한국과 한국인을 옥죄었다.
수많은 기업이 도산했고, 종금사 9개가 영업정지 했으며, 상업은행의 구조 조정이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수백만 명의 실업자가 발생해, 한국인 전체의 삶이 벼랑 끝으로 몰렸다.
그 당시 해외 경제학자와 언론은 한국을 망한 국가 취급했다. 일부 한국에 우호적인 부류가 운이 좋으면 20년 안에 IMF 체제를 극복할 수 있을 거라는 덕담(?)을 건넸을 정도.
그러나 한국은 견디기 어려운 악조건을 극복하고, 5년 만인 2002년에 IMF 체제를 벗어났다. 예상을 아득히 능가하는 빠르기.
김근홍은 그 이유를 새로운 시스템 구축에서 찾았다.
[일본이 금융 위기에 빠지면, 극복하기 어렵겠네요.]
[그렇지. 일본은 정형화된 틀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유지하는 데 집중하지. 시스템이 깨져 매뉴얼이 안 통하는 상황이 오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는 것이 일본의 특성이야.]
[우리 투자를 장기적으로 봐도 되겠군요.]
[무작정 시간을 끌 수 없지만, 최대한 청산 시기를 늦출 필요가 있어.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수익이 늘어날 거니까.]
[알겠습니다. 저는 정보 수집에 집중하겠습니다. 청산 시기는 선배님이 결정하세요.]
[오케이. 맡겨 둬. 확실하게 뽑아낼 거니까.]
지난주 1차 공략에서 벌어들인 4,700억 달러는 청산 기간이 20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처리한 것이다.
만약 매각 타이밍이 조금만 늦었어도, 천문학적인 수익은커녕, 투자 원금에 손실이 났을 거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일본 금융 시스템이 무너진 상황에서, 추락하는 금융시장을 지탱할 수 있는 건 어디에도 없다.
진득하게 기다리며, 바닥을 확인하고 청산하는 것이 수익을 극대화하는 일이다.
* * *
“미카미 장관! 주가가 폭락하고 있는데, 재무 장관이라는 사람이 손 놓고 구경만 하는 거요!?”
“주식시장에 개입할 방법이 마땅치 않습니다. 그리고 일본 은행이 억지로 끌어올린 주가입니다. 정상가로 복귀하도록 놔두는 것이 차라리 낫습니다.”
서킷 브레이커 후 주식 매매가 재개됐으나, 반등은 없었다. 그대로 주가가 폭락해 상장 주식 대부분이 하한가를 기록했다.
게다가 내일도 주식시장이 폭락세를 보일 것이 분명하다. 암담한 상황에서 총리 후지다가 재무 장관 미카미 타게루에게 해결 방안을 재촉했으나, 뾰족한 대책이 나올 리 없다.
- 쾅!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요!? 대책을 마련할 능력이 안 되면, 당장 재무 장관직에서 물러나시오!”
“해임하려면, 해임하시죠. 더 이상 이 자리에 미련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여기서 물러나면, 총리에게 좋을 일 없을 겁니다.”
“뭐라고!?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거요!?”
“협박이 아닙니다. 오늘 국채 발행이 무산됐습니다. 국가 부도가 날 수 있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겁니다. 제가 수습해야 하고, 또 책임져야겠죠. 만약, 다른 사람이 제 역할을 맡아 준다면, 저는 감사한 마음으로 물러날 겁니다.”
“킄…….”
오늘 롤 오버 해야 하는 국채 10조 엔 중, 공개시장에서 소화한 물량은 100억 엔에 불과하다.
일본에 금융 위기가 닥친 상황에서, 신용도가 정크 본드 수준으로 떨어진 일본 국채를 마이너스 금리로 인수하는 건 미친 짓과 다를 바 없다. 100억 엔이나 팔렸다는 게 오히려 놀라울 정도.
나머지 9조 9,900억 엔을 일본 은행이 인수해야 하지만, 업무 중단 상태이기에 고스란히 미판매로 남았다.
이건 일본 정부가 사용할 수 있는 자금이 대폭 줄었다는 걸 의미한다. 오늘처럼 국채 판매가 안 되는 상황이 반복되면, 디폴트에 빠질 수밖에 없다.
국채 문제를 해결해야 할 미카미 타게루를 해임하는 건, 처벌이 아니라 포상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후지다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국채만 문제가 아닙니다. 일본 은행이 멈추면서 심각한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습니다.”
“뭐… 뭐가 또 문제라는 거요?”
국채 발행 실패는 주가 폭락보다 월등히 중요한 문제다. 그런데 재무 장관이 심각한 추가 문제가 발생했다고 한다.
일본 총리 후지다는 떨리는 목소리로 무언인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