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40장. 일본 몰락의 날
8.
미국 대통령과 비서실장이 술잔을 주고받으며, 석별의 정을 나누고 있을 때, 재무 장관 트레비스 호튼이 긴급 보고를 해 왔다.
3조 엔에 달하는 일본 국채가 위조 논란에 빠졌다는 내용. 일본을 강타한 뉴스에, 스피커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다급하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요?>
<예!? 무슨 말씀이신지…….>
<잽에서 벌어진 일은 잽 놈들이 알아서 하라고 하시오. 우리 미합중국이 잽 국채에 관심 가질 이유가 없소.>
<일본 국채에 이상이 생기면, 일본 금융시장이 붕괴할 수 있습니다.>
<다 자업자득인 걸 어쩌겠소?>
<그래도 우리가 도와…….>
<어허! 아직도 말귀를 못 알아먹는 거요!? 앞으로 미합중국은 잽 금융시장에 일절 관여하지 않을 거요!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야! 만약 내 명령을 어기고 관여하면, 그날로 실업자 될 줄 아시오!>
<…….>
‘잽’은 미국이 일본을 부르는 멸칭이다. 제2차세계대전 때 확립된 용어로, 한국에서 ‘쪽발이’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한 의미를 가진다.
미국 대통령 셀든이 재무 장관에게 잽이라는 말을 사용했다는 건, 일본에 극단적으로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나타낸다.
가뜩이나 일본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던 차에, 최측근 데이븐 포드가 일본이 판 함정에 걸렸다고 생각하니, 감정이 폭발한 것이다.
트레비스 호튼도 셀든의 의중을 알아차렸지만, 일본 국채가 감정적으로 처리할 대상이 아니라 여기고, 대책 마련을 조언했다.
그러나 이건 셀든이 품은 분노의 깊이를 모르는 단견이었다.
셀든은 이례적으로 강한 어조를 사용해 트레비스 호튼을 질타했다. 심지어 경질까지 경고한 상황.
미국 재무 장관 자리가 국제금융 세력과의 연결점이라는 걸 생각하면, 셀든의 경고는 중의적인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
트레비스 호튼은 더 이상 나섰다가 감당할 수 없는 사달이 날 거라는 걸 알아차리고 자중을 선택했다.
* * *
“회장님! 미국이 일본 시장에 개입을 중단한다고 합니다!”
“뭐라고!? 그게 무슨 미친 소리야!? 일본이 망하도록 놔두겠다는 거야!?”
미국 대통령 셀든의 의지가 즉각 금융시장에 알려졌다. 국제금융계의 거물들이 안테나를 바짝 세우고 주시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리라.
그러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금융시장은 셀든이 일본 국채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불확실성을 해소할 거라 예상했었다. 그런데 그 기대가 완전히 뒤집힌 거다.
구라다증권 회장 이마에 스바루는 이 소식을 듣고 경악의 반응을 보였다.
“엔화 가치가 급락할 겁니다! 빨리 포지션 정리를 해야 합니다!”
“불가하네! 지금 정리하면, 200억 달러 추가 손실이 발생해!”
“그래도 손실을 줄여야…….”
“우리는 이미 공적 연금 펀드에 손댔어! 손실이 얼마인가는 중요하지 않아! 반드시 수익을 내야 해!”
구라다증권은 일본 연기금을 운용하는 공적 연금 펀드(GPIF) 위탁금 1,000억 달러를 무단으로 전용해, 엔화 강세에 베팅했다.
초반에 100억 달러의 평가 이익을 봤으나, 3조 엔에 달하는 변조 국채가 언론에 거론되자, 순식간에 300억 달러가 빠져, 손실이 200억 달러가 됐다.
지금 베팅을 철회하면, 800억 달러를 건질 수 있으나, 손실 200억 달러를 메울 방법이 없다. 투자자로서 끝장나는 건 물론이고, 국민의 돈에 손을 댄 죄로 수십 년간 감옥에 갇힐 수 있다.
“모든 자산을 정리하면, 200억 달러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네와 나는 야쿠자 놈들에게 시달리다가 죽게 될 거야. 철딱서니 없는 소리 하지 말게.”
“…….”
자산 운용 본부장 노다카 아키라가 대안을 말했으나, 이 역시 실행이 불가능한 일. 정리할 수 있는 구라다증권 자산에 일본 야쿠자 자금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구라다증권이 야쿠자에게 굽실거리는 처지는 아니다. 오히려 음지 자금을 양성화해 주기에, 갑의 위치에 있다.
그러나 야쿠자 자금을 탕진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폭력배들이 집요하게 목숨을 노리면, 경호원을 고용하고 경찰의 보호를 받아도 죽음을 피하기 어렵다.
감옥행이 두렵지만, 그보다 수백 배 두려운 것이 죽음이기에 야쿠자 자금을 건들 수 없는 거다.
회장의 현실적인 지적에 노다카 아키라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아직 기회는 있어. 미국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일본 정부가 개입하도록 만들면 되는 거야.”
“정부에 여력이 없을 겁니다.”
“여력이 없어도 쥐어짜야 해. 아벨 전 총리와 면담 잡아. 내가 직접 가서 담판 지을 거니까.”
구라다증권은 일본에서 가장 큰 증권사이며, 국제적인 투자를 도맡아 하는 대표 기업이다.
고객으로 일본의 큰손이 다수 포함돼 있고, 유력한 정치인도 수두룩하다. 그중에 가장 큰 거물이 전 총리 아벨이다.
일본 역사상 최장기간 총리직에 있었고, 지금도 집권 자민당에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현직 총리 후지다 카즈아키도 아벨의 눈치를 봐야 하는 정계의 거물.
* * *
“이마에 회장, 무슨 일이오? 뒷방 늙은이를 다 찾고?”
“그동안 격조했습니다. 총리님께서 편안한 휴식을 취하는 걸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찾아뵙지 못한 겁니다.”
“흠! 휴식은 무슨 얼어 죽을. 그리고 나는 총리가 아니오.”
“조만간 3번째 총리 임기가 시작될 거라 생각합니다.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총리님으로 불려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소? 후지다는 물러날 생각이 없는 것 같던데.”
“무능한 자는 물러나야죠. 일본 경제를 이렇게 망가트려 놓고 총리직을 유지한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일본을 부활시킬 영웅은 오직 아벨 총리님 한 분뿐입니다.”
“커험. 별 객쩍은 소리를 하고 있구만. 아무튼, 이마에 회장이 나를 높이 평가하니, 마음은 흡족하오.”
후지다를 총리로 만드는 데의 1등 공신이 재무 장관 미카미 타게루라면, 아벨은 2번째 공헌자라 할 수 있다.
아벨은 총리에서 물러난 뒤, 막후에서 후지다를 조종하려 했다. 초반에는 그럭저럭 구상대로 흘러갔으나, 요즘은 완전히 찬밥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대가리가 커진 현직 총리가 말을 안 듣는 거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주류 사회에 강한 영향력을 가진 이마에 스바루가 3기 정권을 말하니,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마음만이 아닙니다. 실제로 3기 정권을 여셔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일본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좋소. 그렇다고 칩시다. 그러면 내가 당신에게 어떤 일을 해 줘야 하오?”
“저를 위한 일은 아닙니다. 다만, 일본 금융시장이 안정되어야 한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국채 변조 사태를 손 놓고 구경하면, 자칫 일본 금융시장이 뿌리째 흔들릴 수 있습니다.”
“일리 있는 말이오. 나도 후지다가 비상사태에 대응하지 않고, 구경만 하고 자빠져 있는 것이 문제라 생각하오.”
“그렇습니다. 정부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가능한 한 빨리 사태를 수습해야 합니다.”
“알겠소. 파벌 회의를 열어서 그렇게 하도록 만들겠소. 그리고 나에게 건넨 말 잊지 마시오.”
“물론입니다, 총리 각하!”
거래 성사. 총리를 2번 지내고 최장기 총리라는 기록을 세웠으나, 아벨은 여전히 권력에 목말라 있다. 이마에 스바루는 이 점을 제대로 파악하고 치고 들어온 것이다.
아벨은 이미 3기 정권을 만들기 위해 물밑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집권 자민당 최대 파벌이 아벨의 손아귀에 있기에 충분히 가능한 목표.
문제는 아벨의 장기 집권에 염증을 느끼는 국민 여론이다. 구라다증권이 일본 주류 사회를 움직여 준다면, 아벨이 총리직에 오르는 행보가 훨씬 가볍게 된다.
더구나 이마에 스바루가 요구하는 도움은 자민당 내부에서도 논의되고 있는 거다. 아벨이 앞장서는 데 정치적인 부담이 적은 상황.
주판알을 튕기고 이해관계를 따져 본 아벨은 구라다증권 회장의 제안을 전격적으로 받아들였다.
* * *
[선배님, 일본 정부가 금융시장 개입을 결정했습니다.]
[그래? 용케 합의했네. 후지다가 양보한 거야?]
금융 위기가 닥치면 국가가 나서서 해결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일본은 총리와 부총리가 편을 갈라 이전투구를 벌이면서, 정부 개입이 늦어지고 있었다.
김근홍은 일본 정부가 나섰다는 창수의 말을 듣고 총리 후지다 카즈아키가 한발 물러난 것이라 생각했다.
[양보는 아니고 힘에 밀렸습니다. 전 총리 아벨이 등판했거든요.]
[헐! 노괴가 토노오의 손을 들어 준 거야?]
[일단은 그런 모양새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아벨이 다시 전면에 나설 것 같습니다. 후지다에게 대놓고 나라 망하게 만들었다고 호통치던데요.]
자민당 내부에서 정비 작업을 마친 아벨은 여세를 몰아 총리 관저로 쳐들어갔다. 현직 총리가 전직 총리를 총리 관저 귀빈실로 초대하는 경우가 간혹 있지만, 아벨처럼 행동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러나 이미 자민당 의원 과반수의 지지를 확보한 아벨에게 거리낄 건 없었다.
아벨은 후지다의 면전에서 섣부른 예금 봉쇄 정책으로 발생한 소요 사태와 국채 변조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 무능을 강하게 질타했다.
그리고 즉시 금융시장에 개입해, 불확실성을 없애라고 요구했다. 만약,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총리 불신임을 추진하겠다는 협박도 곁들였다.
후지다는 굴욕감을 느끼면서도, 아벨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개판이구만. 총리를 두 번이나 해 먹었으면 됐지, 무슨 영광을 더 본다고 설치고 다니지?]
[자기가 아니면 일본에 닥친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없다고 하더군요. 중2병이 중증입니다.]
[쯔쯔쯔. 아벨 그놈이 스테로이드 중독자라 또라이 짓을 자주 하지. 그건 그렇고 일본 정부에서 어떤 조치를 한다는 거야?]
[우리가 유통한 국채 3조 엔을 전량 폐기하고, 같은 물량 국채를 건설사에 임대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해외 투자 자금을 회수해 급격한 엔화 약세를 막고, 필요한 재원 마련을 위해 국채를 추가로 발행한다는 겁니다.]
[흠……. 개입이 구체적이고 아주 강력하군. 아무래도 아벨 곁에 똥파리가 붙은 것 같은데.]
[똥파리요? 환율에 투자한 사람이 충동질한다는 건가요?]
[맞아. 일본 정부가 내놓은 조치는 모두 엔화 상승에 베팅한 세력에게 유리한 거야. 풋 옵션을 매도한 똥파리가 아벨을 꼬드긴 게 분명해.]
전문가는 전문가다. 김근홍은 일본 정부가 내놓은 대책을 듣고, 자신과 반대 포지션을 가진 세력이 영향을 미쳤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변조 국채 3조 엔을 폐기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문제없는 국채 3조 엔을 건설사에 임대한다는 건 매우 이례적인 결정이다.
해외 투자금을 회수하고 국채를 추가로 발행하는 것이 단기적인 환율 안정에 도움이 되지만, 장기적으로 일본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김근홍은 3가지 조치의 기본 바탕에 단기간 엔화 강세가 깔려 있다는 걸 캐치 해 냈다.
[우리 작전에 걸림돌이 되겠군요.]
[맞아. 큰 걸림돌이지. 자칫하면 1,000억 달러 모두 날릴 수 있어. 마음 굳게 먹고 각오해야 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