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40장. 일본 몰락의 날
2.
5월 23일 오전 9시 12분, 서킷 브레이커가 발동한 지 7분이 지날 무렵, 창수가 긴급 정보를 전했다.
일본 금융시장이 붕괴 조짐을 보이자, 일본 총리가 미국 대통령에게 매달렸고, 그것이 통한 것.
셀든은 이번 사태를 일본의 자업자득이라 여기고 방관하려 했으나, 장관들과 참모들이 개입을 강력하게 주장하기에 등 떠밀려 나서게 됐다.
창수와 김근홍에게 결코 달갑지 않은 소식.
[개입 발표를 언제 하는 거야?]
[일본 시간 9시 30분에 한다고 합니다.]
[좋아. 아직 시간이 있군. 지금부터 통화 옵션 청산에 들어갈 거야. 내가 응답은 못 할 거지만, 정보가 있으면 계속해서 전해 줘.]
앞으로 18분 후에 일본 금융시장이 바닥을 치고 반등할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정보가 새 나가서 반등 시간이 빨라지고, 매매 타이밍이 10분 정도로 줄 수도 있다.
현재 엔화 가치는 달러당 145엔. 풋 옵션을 매입했을 때보다 26% 하락한 상태다. 김근홍은 지금이 청산의 적기라고 판단했다.
- 타다닥! 타다닥!
방센 저택 지하에 마련된 트레이딩 룸에 모니터 9개가 부착돼 있다. 김근홍은 9개 우회 루트를 통해 통화 옵션을 매도했다.
신들린 듯한 속도. 마치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것처럼 자판기를 두드리며, 정확히 청산했다. 일반인이 같은 작업을 했다면, 20명을 동원해도 김근홍보다 느릴 거다.
“좋았어! 아직은 정보가 새 나가지 않은 거야!”
7분이 지날 무렵, 엔화 가치가 지속적으로 하락해 달러당 152엔이 됐다. 이건 미국이 개입한다는 뉴스가 시장에 알려지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확보한 물량 중 50%를 청산했다. 앞으로 7분만 더 기밀이 유지된다면, 최고 가격으로 모든 포지션을 정리할 수 있다.
김근홍은 마지막 한 바퀴를 남겨 놓은 육상 선수처럼, 결승선을 향해 스퍼트를 올렸다.
[선배님! 셀든 대통령이 기자회견 한다는 뉴스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아직 일본 금융시장에 개입한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하지만 투자 커뮤니티 분위기에서는 일본과 관련된 담화일 거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9시 20분, 창수가 긴급한 정보를 알려 줬다. 미국 백악관에서 셀든이 10분 후 프레스 룸에 등장한다고 공표한 것.
이어서 창수는 기자회견 관련 뉴스를 연속해서 전달했다.
“드디어 알려졌군!”
9시 23분, 엔화 가치가 급격히 반등해 달러당 147엔이 됐다. 이건 셀든의 담화 내용이 무엇인지 새 나가지 시작했다는 걸 가리킨다.
“모두 시장가로 던지는 거야!”
- 타다닥!
아직 처리하지 못한 물량은 20%. 김근홍은 제값을 받을 생각을 버리고, 투매에 나섰다.
“커커커! 쭉쭉 빠지는구만!”
구매한 원가만 40억 달러에 달한다. 엄청난 물량이 시장가로 나오니, 가뜩이나 반등하던 엔화 가치가 급격히 치솟아 달러당 130엔에 도달했다.
[창수야! 다 청산했다! 수익이 4,700억 달러야!]
[하하하! 정말 엄청난 수익이네요! 수고하셨습니다! 선배님!]
[너도 수고했다. 정보가 정확해서 매매 타이밍을 제대로 잡을 수 있었어.]
통화 옵션을 모두 매각한 뒤, 우회 경로 흔적까지 지운 김근홍이 창수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대단한 성과가 드러났다. 4,700억 달러, 지난번 대만 관련 거래로 얻은 수익의 4.7배를 단숨에 만들어 낸 것이다.
이 금액은 대부분 일본 금융사와 일본인 투자자로부터 뽑아낸 거다. 한국을 암습해 IMF 사태를 일으켰던 일본에 제대로 복수한 셈이다.
창수는 예상을 뛰어넘는 성공적인 투자에 기꺼워하며, 김근홍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김근홍이 답례하면서, 한동안 서로를 칭찬하는 훈훈한 시간이 이어졌다.
이것이 승리의 시간이고, 승자의 권리이리라.
[미국 대통령이 대단하기는 하네요. 단숨에 시장이 회복되고 있습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초강대국 수장이니까. 일본 경제를 죽였다 살렸다 할 힘이 있는 거지.]
창수와 김근홍이 덕담을 나누는 사이, 일본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돕겠다는 셀든의 발언이 글로벌 네트워크 뉴스를 타고 전 세계로 퍼졌다.
엔화 가치가 달러당 115엔으로 완전히 복귀했고, 폭락하던 일본 주식시장도 -1%로 낙폭을 줄였다. 자칫 조금만 시간이 늦었어도, 천문학적인 수익은커녕 투자한 원금을 까먹을 뻔했다.
[셀든 대통령 때문에 주가지수 풋 옵션 가격이 천당과 지옥을 오갔네요. 초반에 풋 잡은 사람들 곡소리 나겠습니다.]
[금융시장에서 가장 위험한 작전 세력이 정부야. 시장 교란을 하면서도 금융시장을 안정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우니, 당하고도 속앓이할 수밖에 없어.]
투자자들이 항상 염두에 둬야 하는 것이 정부와 연기금 같은 공적인 움직임이다. 순식간에 시장 흐름을 바꾸는 힘을 보유하고 있기에,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
오늘 일본 주식시장에서 시작하자마자 풋 옵션을 고가에 매수한 사람들은, 미국 대통령이라는 라스트 보스급 작전 세력에게 치명상을 당한 거다.
[우리가 매수한 주가지수 풋 옵션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네 생각은 어때?]
[수익이 충분하니 이쯤에서 정리하고 발 빼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나자니, 시간을 들여 준비한 무기를 사용도 안 하고 그대로 버리는 게 아깝다는 생각도 듭니다.]
일본을 공략하며 설정한 목표 수익이 3,000억 달러였다. 원래의 계획보다 1,700억 달러를 더 벌어들이는 눈부신 성과를 거뒀다. 그것도 300억 달러로 투자금이 축소된 상황에서.
현재 일본 주식 관련 풋 옵션에 투자한 금액은 100억 달러로, 20% 정도의 평가 수익을 낸 상태다. 창수는 이 정도 수익에 만족하고, 일본 공략을 종결하는 것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금 봉쇄와 그에 따른 소요 사태는 창수와 김근홍이 사전에 준비한 것이 아니라, 일본 국채를 교란하면서 파생된 사건이다.
본게임을 치르기 전에 전초전에서 결판이 나 버린 상황이기에, 다음 행보가 고민이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목표를 달성했지만, 이대로 물러서는 건 아니라고 봐. 아직 먹음직스러운 고기가 잔뜩 남아 있는데, 한 입만 먹고 가는 느낌이랄까.]
[미국이 개입한 상황에서, 일본 증시가 폭락할까요?]
[그렇게 만들어야지. 네 말대로 우리가 사용하지 않은 무기가 두 개나 남아 있으니까.]
김근홍도 창수와 같은 고민이다. 무려 미국과 대립해야 하는 것이 부담스럽다. 그러나 승부사의 본능이 말하고 있다. 이대로 물러서면 안 된다고.
3.
미국이 일본 금융 위기에 개입한다고 발표한 뒤 3시간이 지날 때, 백악관에서 현황을 검토하는 회의가 열렸다.
“호튼 장관, 일본 상황이 어떻소?”
“주식시장과 외환시장 모두 안정세로 돌아섰습니다. 다만, 은행은 여전히 영업을 중단하고 있습니다.”
“그것참. 일본 정치인이라는 작자들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 수가 없군. 21세기에 예금 봉쇄가 가당키나 한 말이오?”
셀든의 심기가 좋지 못하다. 자신의 개입으로 경제 규모 세계 3위 국가에 닥친 금융 위기를 막아 냈으나, 그것이 잘한 일인지 판단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 정책 실패를 국민 호주머니 돈으로 해결하려는 것이 예금 봉쇄 정책의 실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시대착오적인 일본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것이 온당한 일이다. 그런데도 한심한 정부를 도와야 한다는 것에 짜증이 난 것이다.
“예금 봉쇄는 일본 국가 부채가 200%를 넘었을 때부터 예견된 것입니다. 달리 부채를 해결할 방법이 없으니, 하던 버릇이 다시 나온 겁니다. 문제는 일본 국민을 설득하는 과정을 생략하고, 언론에 노출됐다는 점입니다.”
“누가 일부러 언론에 흘렸다는 거요?”
“그렇습니다. 미카미 재무 장관의 말에 따르면, 일본 내각에서 예금 봉쇄를 결정하고, 6개월간 여론 형성 기간을 뒀다고 합니다. 그런데 몇 시간 후에 그 내용이 언론에 알려졌다는 겁니다.”
“흠……. 아예 작정하고 공작을 벌인 거군. 누가 그런 짓을 한 거요?”
“미카미 장관은 중국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총리 측에 중국 스파이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습니다.”
예금 봉쇄가 일본 언론에 알려진 것에 가장 충격을 받은 정치인은 일본 부총리 토노오 오키무네였다.
즉각 계파 장관들을 모아 대책 회의에 들어갔고, 은밀히 손잡고 있는 언론사와 연락해, 어떤 통로로 정보를 전달받았는지, 파악에 나섰다.
그리고 일본 국채를 변조한 세력이 예금 봉쇄 정책도 폭로한 거라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의심이 중국으로 쏠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
일부 측근이 성급한 결론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액면가 3조 엔에 달하는 국채를 낭비하는 자금력과 일본 내각회의 내용을 실시간으로 파악할 능력을 갖춘 세력을 중국 이외에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었다.
“일본 정치인이 무능하니, 중국이 틈을 노린 거요. 일본 정부에 예금 봉쇄 정책을 철회하라고 통보하시오.”
“일본 정부가 반발할 가능성이 큽니다. 다른 대안이 없으니까요.”
“반발? 무슨 얼어 죽을 반발이오? 진짜 반발할 사람은 평생 모은 재산을 빼앗기게 된 일본 국민이오. 만약 일본 정부가 내 말을 거역한다면, 일본이 디폴트에 빠질 수 있다는 걸 확실하게 알리시오.”
트레비스 호튼은 예금 봉쇄를 불가피한 정책이라 여겨 일본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것에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셀든은 단호하게 명령을 반복했다. 개인 재산이 증발하는 예금 봉쇄 정책보다 국가 부도가 일본인들에게 더 낫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대통령님 말씀이 옳습니다. 우리 군이 일본에서 벌어지는 폭력 사태를 막고 있지만, 예금 봉쇄가 철회되지 않으면, 오랜 시간 버티기 어려울 겁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재산을 빼앗긴다는데 국민이 반발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겁니다. 예금 봉쇄 정책을 백지화해야 합니다.”
미국이 일본 금융 위기에 개입해야 한다는 것에 적극적으로 찬성하던 안보 보좌관 라파엘 맥길과 국무 장관 볼링튼이 이번에는 셀든을 두둔하고 나섰다.
순식간에 트레비스 호튼이 고립된 상황. 힘을 잃은 미국 재무 장관은 더 이상 반론을 내놓지 못하고 대통령의 지시를 따라야 했다.
* * *
[속보, 예금 봉쇄 정책 백지화!]
[정부가 국민 재산에 손대는 일 없을 것!]
[예금 봉쇄는 와전된 것!]
일본 정부는 셀든의 엄명을 거역할 수 없었다. 만약 거절했다면, 일본은 국가 부도 사태에 빠지고, 총리를 비롯한 장관들 모두가 실각하는 건 물론이고, 미국의 블랙리스트에 올랐을 거다.
총리 후지다는 대세를 알아보고, 순순히 셀든의 지시를 수용한 뒤, 즉각 언론에 공표했다.
그리고 예금 봉쇄 정책 철회 소식은 일본 언론 매체를 통해 빠르게 전파됐다.
- 뭐!? 논의 중이던 게 기정사실화됐다고!? 누굴 원숭이로 보나!?
- 그래도 쓰레기 정책이 철회돼서 다행이야.
- 다행은 무슨! 미국이 압력을 넣어서 가까스로 중단한 거야!
- 아무려면 어때, 내 재산 지키게 된 게 어디야?
뉴스를 접한 일본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현금인출기를 둘러싸고 서바이벌 게임을 하지 않아도 되기에.
그러나 일본 정부에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출처를 알 수 없으나, 예금 봉쇄 정책이 미국의 압력으로 백지화됐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미국의 신속하고 과감한 개입으로 일본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아 갔다. 하지만 이번 소동으로 만들어진 깊은 상처가 단숨에 치유된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