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39장. 일본의 숨통을 조르다
4.
후지다 카즈아키는 G7으로 분류되는 국가, 일본의 총리다. 다른 국가 수장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약한 권한을 가지고 있으나, 연이은 위기로 강한 권력을 틀어쥔 상황.
타국 장관의 깔보는 듯한 언행이 외교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일본 재무 장관 미카미 타게루는 일본 총리를 한심하게 여기는 트레비스 호튼에게 불편함을 느끼기는커녕, 기회가 왔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상대가 초강대국 미국 경제를 주무르는 재무 장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후지다 카즈아키에게 악감정이 깊기 때문이다.
<새가슴 총리 때문에 내각에서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자금이 모자라면 국채를 더 발행해도 되는 일인데, 무조건 안 된다고 합니다. 부총리가 국가 부채 해결 방안을 제시했는데 궤변으로 반대만 일삼더군요. 우리 일본이 어떻게 될지, 정말 걱정입니다.>
<장관들이 후지다 총리 말을 안 따르니까, 미카미 장관님에게 화풀이하는 거군요.>
<말씀드리기 부끄럽지만, 그런 상황입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무능한 사람을 총리로 만든 원죄가 있으니, 감내해야죠.>
<어허……. 이것 참……. 이대로는 안 되겠습니다. 문제를 일으킨 국채와 관련된 자료를 저에게 보내 주십시오. 우리 인력을 동원해 범인을 추적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시면 정말 감사하죠. 하지만 총리가 허락할지 의문입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셀든 대통령님께 말씀드려 조처하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총리가 미카미 장관님을 찍어 내려고 하면, 제 이름을 거론하고 버티십시오.>
<정말 그래도 되는 겁니까?>
<그럼요. 미카미 장관님 같은 인재가 내각에서 사라지면, 일본은 물론이고 미국에도 큰 손실입니다. 제가 지켜 드려야죠.>
<호튼 장관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한 편의 블랙코미디이리라. 일본 재무 장관이 미국 재무 장관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건 일본 국정에 외세를 끌어들이는 것으로, 반역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리고 트레비스 호튼에게 이용만 당하고 버림받는 자충수가 될 위험도 있다.
그런데도 미카미 타게루는 하늘로 올라가는 굵은 동아줄을 잡은 것처럼 기뻐했다.
* * *
5월 22일 오후 4시, 창수가 보안 메신저를 통해 김근홍에게 연락했다.
[선배님, 호튼이 개입했습니다. 공식 채널을 통해 일본 정부에 국채와 관련된 자료를 보내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벌써? 이거 골치 아프게 생겼는데.]
트레비스 호튼은 미국 재무 장관이면서, 동시에 국제금융계의 큰손을 대변하는 창구 역할을 한다.
현재 일본 정부를 혼돈에 빠트린 국채는 창수가 빅벤과 레드실드를 공격해 탈취한 것이다. 고인물들과 깊은 연관이 있는 트레비스 호튼이 냄새를 맡고 개입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김근홍도 이걸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문제는 개입 속도가 예상을 뛰어넘는다는 것.
[풋 옵션 매집이 얼마만큼 진행됐나요?]
[포지션 완성도가 60% 정도야. 호튼이 개입한다면, 매집 시간이 훨씬 더 길어질 수 있어. 추가 감시를 피해야 하니까.]
[60%에서 매집을 중단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호튼을 중심으로 고인물들이 힘을 합칠 수 있습니다.]
[하긴 그놈들이 협력하면, 우리가 역으로 당할 수 있지. 네 말대로 60% 정도로 만족해야 할 것 같아. 매매 타이밍만 잘 잡으면, 60%로도 목표 수익을 달성할 수 있을 거야.]
[선배님, 능력을 믿습니다.]
일본 금융시장 하락에 투입할 금액이 총 500억 달러. 그중에서 300억 달러를 사용했다.
대만 시장에 비해 매입 속도가 늦은 것은, 국제금융계 큰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우회와 분산을 강도 높게 진행하기 때문이다.
6개월 전 대형 사고가 터진 이후, 풋 옵션 매매에 과도하리만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기에, 하방 포지션 구축하기가 쉽지 않다.
설상가상 트레비스 호튼이 일본 국채 변조에 개입하면, 풋 옵션 매집이 더더욱 어려워질 것이 뻔하다. 자칫 이미 확보한 300억 달러 규모 풋 옵션마저, 허공에 날릴 수 있는 상황.
창수와 김근홍은 추가 매집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이성으로 욕심을 억누른 현명한 판단.
[부담이 팍팍 느는구만!]
[하하하.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커험……. 그건 그렇고, 호튼이 어떻게 개입하게 된 거야? 후지다가 미국 개입을 꺼린다고 말하지 않았어?]
[후지다는 지금도 미국 개입에 부정적입니다. 그런데 토노오와 미카미가 강경하게 주장하고 있어, 어쩔 수 없이 허락한 겁니다.]
[미카미가 후지다의 심기를 거스른다고? 재무 장관이 총리를 버리고 부총리와 손잡은 거야?]
[그렇습니다. 그리고 미카미가 호튼을 끌어들인 것이 분명합니다.]
[부총리와 재무 장관이 미국을 등에 업고 총리와 대립한다면, 쿠데타 아니야?]
[보기 나름이죠. 후지다 입장에서는 연성 쿠데타일 수 있고, 토노오와 미카미 입장에서는 노선 싸움일 수 있는 거니까요.]
[커커커. 완전히 콩가루 집안이구만. 그런데 후지다가 쫓겨나면, 토노오 그 또라이가 총리가 되는 거야?]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자민당 내부 파벌 싸움에서 토노오가 압도적으로 강합니다. 예금 봉쇄 정책도 힘으로 밀어붙여 내각 회의에서 통과시켰습니다.]
일본 정치와 자민당의 고질적인 병폐가 어김없이 나타났다. 자민당은 1955년 창당한 이후 64년간 정권을 잡고 있다. 중간에 4년을 제외하고 일본에서 사실상 1당 독재 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이런 후진적인 정치 행태가 가능한 것은, 사익에 따라 이합집산이 자유로운 일본의 정치 풍토 때문이다.
자민당의 경우, 극우 성향부터 진보적인 성향까지 다양한 인물을 포함하고 있다. 일부지만, 진보적인 야당에서 낼 법한 법안을 만들기도 한다. 굳이 정권 교체가 필요 없다는 주장도 나온다.
심지어 정권 교체가 정당과 정당 사이의 권력 이동이 아니라, 자민당 파벌 사이의 권력 이동이라는 궤변이 통용되기도 한다.
일본 정치 풍토에서 총리파와 부총리파가 세력을 나눠 권력 투쟁을 벌이는 건 특이한 일도 아니고 비난받을 일도 아니다.
일본이 일본 한 것뿐이다.
[창수야, 포지션 60%만으로 충분히 뽑아 먹을 길이 열린 것 같다.]
[그래요? 아이디어가 떠오른 건가요?]
[그래. 또라이 토노오가…….]
창수로부터 일본 수뇌부의 권력투쟁을 전해 들은 김근홍은 효과적으로 일본 금융시장을 교란할 방안을 생각해 냈다.
트레비스 호튼의 개입으로 자칫 어그러질 뻔한 구상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이다.
5.
5월 22일 오후 8시, 일본 뉴스 포털과 언론사 홈페이지에 긴급 뉴스가 올라왔다.
[충격! 정부 예금 봉쇄 카드 만지작!]
[77년 만에 닥친 어둠의 손길!]
[국가의 정책 실패를 국민이 책임지라고?]
부총리 토노오 오키무네가 밀어붙인 국가 부채 해결 방안이 익명의 소식통에 의해 일본 언론사에 알려졌다. 반응은 개탄과 비난 일색.
일본 언론은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본 군국주의 세력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국채를 남발한 내용을 언급했다.
그리고 일본 패망 후, GDP 204%에 달하는 국가 채무를 처리하기 위해, 예금 봉쇄를 저지르고, 90%에 달하는 재산세를 매겨, 일본 국민의 재산을 강탈한 과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 미친!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저런 사기질을 획책하는 거지!?
- 때가 어느 때라니? 21세기 지금도 법적으로 가능한 거야.
- 뭐야!? 그게 정말이야!?
- 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은행에 돈을 맡기지 않겠어? 예전에 당했던 걸 다시 안 당하기 위해서 미리 준비한 거야.
- 헐! 이게 나라냐!?
뉴스를 접한 일본 국민은 황당함과 격앙이 뒤엉킨 아노미 상태에 빠졌다. 일본인이 국가 정책에 순종하는 경향이 있지만, 예금 봉쇄는 그 한계를 넘는 폭거.
가뜩이나 일본 경제가 쇠퇴하는 추세에 사는 것이 팍팍한데, 정부가 평생 모은 재산을 강탈하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온 거다. 얌전히 따르는 것이 이상하리라.
일부는 참혹한 일본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으나, 대다수 국민은 예금 봉쇄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차렸다.
국가가 진 빚을 국민 호주머니 털어 해결하는 것.
그리고 이런 사태를 미리 대비한 어르신들의 선견지명이 재조명됐다. 은행을 믿지 못해 개인 금고에 돈을 보관하던 그들이 시대착오적인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현명한 대비를 했던 거다.
- 한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지금이라도 은행 계좌에 있는 돈 다 빼내야 해.
- 지금 은행 문 닫았는데 어떻게 돈을 빼내?
- ATM 있잖아! 허둥대지 말고 정신 좀 차려!
- 맞아! ATM! 알려 줘서 고마워!
일본에서 은행 영업시간은 대부분 오전 9시에서 오후 3시다. 오후 8시가 넘는 시간에 영업하는 곳은 없기에 은행에서 직접 예금을 인출하는 건 불가능한 일.
그러나 상당수 은행이 야간에 이용할 수 있는 현금인출기를 배치하고 있다. 그리고 현금인출기를 설치한 편의점이 수만 곳.
일본인들은 정부에게 재산을 강탈당하지 않기 위해, 현금인출기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 작작 좀 뽑아! 혼자만 살겠다는 거야!?
- 필요한 만큼 찾는데, 당신이 왜 시비야!?
- 치쿠쇼! 자제 좀 하라고! 혼자 ATM 다 털어 가면 어쩌자는 거야!
- 그게 걱정이면, 다른 현금인출기 찾아봐!
- 이 새끼! 말하는 꼬라지 보소! 돈 앵꼬 나기만 해 봐! 가만히 안 둬!
하지만 현금인출기가 만능은 아니다. 선착순으로 뽑아 가는 상황에서, 앞줄에 선 사람이 독식할 수 있다.
현금인출기에 지폐 1만 매가 들어간다. 일본의 지폐는 1,000엔, 2,000엔, 5,000엔, 10,000엔 4종류가 있고, 가장 많이 쓰이는 단위가 1,000엔과 5,000엔이다.
현금인출기 하나에 대략 3,000만 엔이 들어 있다.
즉, 예금이 넉넉한 부유층 한 명이 현금인출기에 들어 있는 현금을 독식할 수 있는 거다.
한 번에 뽑을 수 있는 금액은 카드 종류에 따라, 3만 엔에서 10만 엔. 한 번씩만 뽑으면, 300명이 몰려와도 다 처리할 수 있으나, 한 번만 뽑는 사람은 거의 없다.
3번은 기본이고 30번을 넘게 뽑는 사람도 상당수다. 이런 상황에서 시비가 안 나면, 그것이 이상한 일일 터.
내 돈 내가 뽑는다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강변하는 사람과 적당히 하라는 사람이 치열한 신경전을 펼쳤다.
- 껌벅! 껌벅!
[현금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밤이 깊어지면서 사달이 발생했다. 현금이 바닥난 인출기가 나오기 시작한 것.
“칙쇼! 이 새끼 죽여!”
- 휘익!
- 팍!
“크아악! 사람 살려! 누가 좀 도와주세요!”
한참을 초조하게 기다렸건만, 눈앞에서 현금이 바닥난 걸 지켜본 사람이, 27번 인출한 사람에게 폭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폭행 피해자가 주위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돌아온 건 도움이 아니라 욕설과 집단 폭력이었다.
이런 상황이 일본 곳곳에서 벌어졌다. 심지어 돈을 빼앗고 살인까지 저지르기도 했다.
* * *
“총리 각하! 즉시 예금 봉쇄 철회 담화를 발표해야 합니다! 경찰력으로 폭도를 막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현금 인출과 관련한 폭력 사건이 발생하자, 경찰이 긴급 출동했다. 그러나 한정된 인력으로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는 폭력 사태를 막기는 역부족이다.
국가 공안 위원장 니시가와 카즈오는 폭력 사태를 부른 예금 봉쇄 문제를 해소해야, 소동을 막을 수 있다 여기고, 총리의 결단을 촉구했다.
“예금 봉쇄에 찬성한 장관이 수두룩한데 나보고 어쩌라는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