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36장. 런던의 고인물
1.
“야! 왜 나를 걸고넘어져? 내가 뭘 어쨌다고?”
“네가 너무 잘나가서 그래. 기업 에너지부 장관이 나를 직접 찾아왔었어.”
“흠. 거물이 왔군. 그자가 내 약점을 알려 달라고 하던? 그래서 네가 나를 변호하다가 쫓겨날 뻔한 거야?”
거시경제 연구에 몰두하던 로버트 카빌의 일상에 예상하지 못한 불청객이 등장했다. 애덤 로퍼스 영국 기업 에너지부 장관.
웬만한 장관이면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애덤 로퍼스는 영국 총리의 최측근이다.
김근홍은 절친이 자기 때문에 곤경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일주일 전부터 영국 정부 차원에서 전방위적으로 자신을 압박하고 있으니까, 그 불똥이 튄 것이리라.
“아니야. 나보고 너 꼬셔서 영국인 만들라고 하더라. 너를 설득할 영국인은 나밖에 없다고 하면서 말이야.”
“커커커! 이놈의 인기. 어딜 가나 나를 찾는구만. 그런데 그거 하기 싫다고 말하다가 찍힌 거냐?”
영국은 일부 개방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매우 보수적인 국가다. 외국인을 은근히 아래로 보고, 심지어 ‘식민지 출신 하층민’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영국 최고라 불리는 대학에서 수재라 불리던 김근홍도 예외는 아니다. 실력 때문에 앞에서는 말을 못 해도 뒤돌아서 아시아 출신이라고 비웃는 차별을 경험해야 했다.
그런데 영국 정부의 실세가 직접 나서서 자기를 귀화시키려고 한단다. 김근홍은 마음 한구석에 맺혀 있던 응어리가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맞아. 네가 꼴통이라 남의 말은 안 듣는다고 하니까, 나를 못 믿겠다는 듯이 쳐다보더라. 그래서 쏘아붙였지.”
“뭐라고 했는데?”
“슈퍼 모델이나 미인 대회 우승자를 알아보라고 했어. 그게 어려우면 당신 여직원 중에 아무나 골라도 나보다 나을 거라고 했지. 그랬더니 발작하면서 소리치더라고.”
“껄껄껄! 잘했다! 잘했어! 그래야 내 절친이지!”
단순한 친구와 절친은 큰 차이가 있다. 로버트 카빌은 김근홍이 영국 사회에서 당한 냉대를 알고 있다. 이제 와서 영국 귀화를 선택할 리 없다는 것도 잘 안다.
더구나 영국 정부가 노리는 것이 김근홍 개인이라기보다는 신물질 버닝스톤이라는 걸 눈치챘기에 협조할 수 없었다.
김근홍은 자기가 할 말을 대신해 준 절친의 행동에 시원한 사이다를 느꼈다.
“그자가 난리 치기에 나도 목소리를 높여 대판 싸웠지. 조금 지나니 소장님이 달려와서 말리더군. 노인 양반이 안쓰러워서 내가 참았는데, 그게 끝이 아니었어. 최종 보스가 등장한 거야.”
“오……. 설마 영국 총리가 직접 찾아온 거야?”
“직접 연구소에 온 건 아니고, 전화를 걸더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주절주절하더니, 국가 예산으로 편하게 연구하고 있으니 밥값 좀 하라고 하는 거야. 열받아서 연구소 때려치우려고 했는데, 스태프들이 걸려서 사표 못 냈어.”
로버트 카빌 같은 촉망받는 경제학자가 연구소를 그만둔다고 하여 일할 곳이 없을까? 솔직히 말해 모셔갈 곳 넘친다.
그런데도 영국 총리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것은 연구를 도와주는 팀원 5명의 장래를 걱정했기 때문이다.
모두 뛰어난 학자적 소양을 가지고 있으나, 홀로서기 할 역량을 아직 갖추지 못했다. 연구소에서 축출당하면 학자로서 경력이 절단되는 것은 물론이고, 생활고에 시달릴 가능성이 크다.
로버트 카빌은 스태프들을 위험에 빠트리는 것보다 자신이 김근홍을 만나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렸던 거다.
“로버트, 네 팀원 모두 데리고 나와라. 필요하면 소장님도 모셔 오고 마음에 드는 직원도 뽑아.”
“연구소 운영은 만만치 않아. 버는 돈은 거의 없고 지출만 많은 곳이야.”
“걱정하지 마라. 지금 받는 월급의 2배를 주고, 연구비도 2배로 지원할 수 있어.”
“정말이야? 그렇게 돈이 많아?”
“그래. 나 부자다. 이것저것 합하면 영국 왕실보다 재산이 많을 거야.”
영국 왕실 재산을 운영하는 크라운 에스테이트가 보유한 자산의 가치는 약 180억 달러. 김근홍은 이보다 50억 달러 많은 230억 달러를 가지고 있다.
물론 영국 왕실이 보이는 재산 이외에도 브랜드 가치만 1,000억 달러에 달하기에, 김근홍이 영국 왕실보다 부자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실질적인 재산과 당장 사용할 수 있는 현금 동원력에서 영국 왕실을 아득히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김근홍은 로버트 카빌이 근무하는 경제 연구소를 통째로 인수하고 2배 지원해도 넉넉한 자금을 쌓아 놓고 있다.
“헐……. 엄청나구나. 언제 그렇게 거물이 된 거야? 암브로시아와 버닝스톤 실소유자가 너야?”
“아니야. 나는 조력자일 뿐이야.”
“그러면 김창수 대표라는 사람이 실소유주야?”
“그건 지금 대답해 줄 수 없어. 네가 내 제안을 받아들이면 그때 알려 줄게.”
로버트 카빌이 절친이기는 하지만, 현재 영국 총리의 지시를 받고 김근홍을 회유하러 온 처지다. 모든 것을 다 알려 줄 수 없는 상황.
“네가 설립하는 연구소로 오면, 암브로시아와 버닝스톤에 대해서 어디까지 공개해 줄 수 있지?”
“내가 아는 건 다 알려 줄 수 있어. 그런데 왜 그걸 알려고 하는 거지? 조금 수상한데.”
“정보 빼돌리려는 건 아니야. 내가 하는 연구에 새로운 전기가 될 것 같아 알려고 하는 거야.”
“거시경제 연구에 개별 품목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고?”
점점 더 수상한 말을 한다. 암브로시아와 버닝스톤이 슈퍼 아이템이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 전체적인 경제 현상을 분석하기 부족하다.
개별 상품에 관한 연구는 미시경제학에서 다루는 분야로, 로버트 카빌이 해 온 연구와 거리가 있다.
“암브로시아와 버닝스톤이 신산업을 형성하고 신수요를 충족하는 과정을 연구하려는 거야. 이게 내가 집중하는 분야야.”
“흠……. 그렇게 말하니 조금 이해가 가는군. 하지만 둘을 신산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상품 자체가 아니라 상품과 영향력을 연구한다면, 거시경제의 연구 분야가 될 수 있다.
절친에게 가졌던 김근홍의 의구심이 조금 누그러졌다. 하지만 여전히 남는 궁금증, 과연 암브로시아와 버닝스톤이 신산업일까?
“암브로시아는 기존 설탕이 가지고 있던 시장 논리를 무시하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있어. 게다가 암브로시아에 자극받은 제당업체에서 고성능 올리고당을 연구하기 시작했어. 신산업으로 불리기 충분해. 에너지 역사를 바꿀 버닝스톤은 말할 것도 없고.”
“기존에 있던 산업을 조합해 새로운 산업을 만들고, 또 그것이 역으로 기존 산업에 영향을 준다는 거야?”
“맞아! 바로 그거야! 역시 척하면 착이군! 바로 알아듣는구만!”
“커커커. 어째 네 얘기를 들으니, 내가 스카우트 제안 안 했어도, 우리 쪽으로 오려고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내가 착각한 거냐?”
“착각은 아니야. 오백세건강과 어떻게 해서든 공동 연구 하려고 했으니까.”
“좋아. 그러면 우리 쪽에 합류하는 거다.”
“오케이. 여기서 물러날 수 없지. 연구소 만들어. 스태프들 모두 데리고 올게.”
호박이 넝쿨째로 들어왔다. 버닝스톤을 노리고 어설픈 공작을 펼쳤던 영국 정부가 귀중한 인적 자산을 잃게 된 것.
이제 창수 곁에 암브로시아와 버닝스톤의 진정한 경제적 가치를 알려 줄 인물이 자리하게 됐다.
게다가 특급 정보도 함께.
2.
[창수야, 버닝스톤 일 어떻게 진행되니?]
[아주 잘되고 있습니다. 선배님 쪽은 어떤가요?]
로버트 카빌을 만난 뒤 12시간이 지난 후, 김근홍이 보안 메신저를 통해 창수와 연락했다.
[나도 잘되고 있어. 화요일에 인도 총리 측과 만나서 담판을 지을 예정이야. 저번에 말한 대로 예상 지역은 안다만 니코바르제도야.]
[거기라면 최적이죠. 그런데 인도에서 내주려 할까요?]
안다만 니코바르제도는 인도 극동 쪽에 위치한 군도로 벵골만과 미얀마해를 가르는 기준점이 된다. 500개가 넘는 크고 작은 섬이 있고, 면적 8,250km²에 39만 명이 거주한다.
인도 본토에서 1,000km 이상 떨어져 있으며,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와 가깝다. 조세 회피처를 만들고 오백세건강의 근거지로 삼기 적당한 지역.
그러나 안다만 니코바르제도는 국제 해상 무역의 중심 중 하나인 믈라카해협의 왼쪽에 위치하면서 뚜껑을 닫는 형태를 띠고 있다.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
창수는 인도가 이곳을 양보할 거라 확신하지 못했다.
[최소한 섬 하나는 받아야지. 델리와 뭄바이 공기 오염이 심각한 수준이라, 우리 요구를 거절할 수 없을 거야.]
[섬 하나라면, 리틀 안다만을 말하는 건가요?]
[맞아. 그 정도는 돼야 제대로 근거지를 만들 수 있어.]
리틀 안다만은 안다만 제도 남쪽에 있다. 면적 707km²로 싱가포르보다 28km² 작고 서울보다 102km² 넓다. 도시 하나를 세울 수 있는 규모.
김근홍은 안다만 니코바르제도 전체 면적의 8.6%에 해당하는 이 지역을 충분히 받아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하는 근거는 인구 1,900만 명에 달하는 수도 델리 인근과 광역 인구 1,840만 명을 가진 뭄바이 인근의 공기 오염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인도의 핵심지역 두 곳에 버닝스톤 생산 공장을 세우면, 인근 공기를 정화할 수 있다. 그리고 인도 내부에서 생산된 버닝스톤을 연료로 사용하면, 공업지대와 인구 밀집 지역의 대기질을 급격히 향상할 수 있다.
또한, 버닝스톤과 암브로시아로 벌어들일 수익을 생각하면, 김근홍의 뜻대로 협상이 진행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리틀 안다만을 얻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죠. 선배님에게 모든 걸 맡기겠습니다.]
[오케이. 이건 걱정하지 마. 그런데 조심해야 할 일이 생겼어.]
[걸림돌이 생긴 건가요? 사업 쪽인가요? 아니면 안전 쪽인가요?]
[양쪽 다일 수 있어. 빅벤이 우리를 노리고 있다는 정보야.]
[빅벤이면, 런던에 있는 시계탑을 말하는 건가요?]
[정확히는 시계탑을 만든 세력을 말하는 거지. 런던의 고인물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거야. 지금까지 상대한 적과 차원이 다른 놈들이니, 조심해야 해.]
빅벤은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궁전 북쪽에 있는 4면 시계탑을 말한다. 1859년에 만들어진 빅벤은 높이 96m에 달하는 크기와 유려한 고딕 양식으로 런던의 명물이 됐다.
김근홍은 빅벤을 만든 세력이 위협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절친 로버트 카빌이 건네준 특급 정보가 바로 이것. 김근홍은 정보 네트워크를 활용해 빅벤의 움직임을 알아보고, 확인 과정을 거친 뒤 창수에게 연락한 거다.
[이유가 뭔가요? 그자들도 버닝스톤을 노리는 건가요?]
[정확한 이유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어. 워낙 은밀히 움직이는 놈들이니까. 하지만 빅벤은 시티에서 가장 지독한 부류로 알려져 있어. 우리를 공격 목표로 삼았다면, 반드시 실행할 거야.]
런던은 1,572km² 면적에 인구 850만 명을 보유한 대도시다. 그리고 런던 안에 ‘시티 오브 런던(시티)’이라고 불리는 지역이 있다.
이곳은 2.9km²의 협소한 면적에 인구 8,100명에 불과하지만, 뉴욕 월가와 함께 세계 금융시장의 양대 산맥으로 통한다.
시티는 기원전 1세기에 만들어진 이후, 줄곧 런던의 핵심 역할을 해 왔다.
[성가신 놈들이네요. 그냥 놔둬서는 안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