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35장. 줄을 서시오
5.
오늘 회의는 NSC(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에서 관련 분야 참석자를 늘린 것이다.
회의를 주재하던 국가안보실장 장지환이 대놓고 질책하자, 이영수가 크게 놀라며 말을 더듬었다.
“검경 수사권을 조정하고 국가 수사 본부를 출범한 건, 외압이 없는 상태에서 공정하게 수사하라는 국민적 열망을 담은 결단이었습니다. 지금 오백세건강에 벌인 수사는 누가 봐도 편파적입니다. 이렇게 해서 국민의 기대를 충족할 수 있을 거라 봅니까?”
“민원이 빗발쳐서 수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민원을 누가 넣었는지 뻔한 거 아닙니까? 암브로시아가 잘나가니 어떻게 해서든 딴죽을 걸어 보려는 시기심에 국가 수사 본부가 휘말려서 어쩌자는 겁니까?”
“…….”
장지환이 무리한 수사의 핵심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질책을 이어 갔다.
국가안보실장은 장관급이지만, 의전 서열이 부총리급에 해당하고 권한은 총리와 맞먹는 막강한 자리다.
국방, 외교, 치안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는 거물이 근거를 가지고 조여 오자, 이영수는 감히 대답을 못 하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대유제당이 수작 부리는 것이 눈에 보이지만, 그래도 국내 기업이니 마냥 무시할 수 없습니다. 국가 수사 본부는 불가피한 수사를 한 거죠. 게다가 오백세건강은 조세 회피 지역에 세운 페이퍼컴퍼니입니다. 의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봅니다.”
“오백세건강이 대한민국에 기여한 것이 적지 않다고 알고 있습니다. 국세청에서는 어떻게 보고 있나요?”
이영수가 궁지에 몰리자, 상관이라 할 수 있는 행안부 장관 우영철이 거들고 나섰다.
이에 맞서 장지환은 국세청장 하정민을 대항마로 삼았다.
“2022년 사업으로 오백세건강이 납부한 법인세는 1조 7,000억 원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영업하는 전체 기업 중 납부 순위 3위입니다. 그리고 올해 추세를 보면, 법인세가 5조 원을 넘을 것으로 예측됩니다.”
“페이퍼컴퍼니 한국 지사지만, 낼 세금은 꼬박꼬박 내는 거군요.”
오백세건강은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생산된 암브로시아를 한국으로 수입하면서 가격에 장난치지 않고 제대로 세금을 내고 있다. 낼 돈은 낸다는 창수의 경영 방침이 원인.
아직 총매출액이 10위권에 들지 못하지만, 납부한 법인세는 미래자동차보다 1조 원이나 많다.
창수가 조세 회피처에 본사를 둔 목적은 세금을 회피하기 위함이 아니라, 불필요한 간섭과 공격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함이다.
“그렇습니다. 게다가 내지 않아도 될 세금을 내고 있습니다.”
“그래요? 구체적으로 어떤 세금을 더 내고 있습니까?”
“오백세건강은 2022년 독거노인과 고아를 위해 1조 원을 기부했습니다. 경제 사정이 어려운 중증 환자 치료를 위한 기금도 1조 원 마련했습니다. 기부금과 납부금을 계산하면, 7,500억 원을 절세할 수 있음에도 법인세를 그대로 납부했습니다.”
“특이하군요. 이유가 뭔가요?”
“기부금에서 세금을 공제하면, 기부한 취지가 희석된다고 하더군요. 제가 세무 공무원으로 35년을 지냈지만, 오백세건강과 같은 양심적인 기업은 처음입니다.”
국세청장이 사기업을 극찬했다. 매우 이례적인 일. 하지만 자연스러운 일이다. 오백세건강이 칭찬받아 마땅한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기업은 가능한 한 납부할 세금을 줄이려 노력한다. 양심적인 부류는 법률적 한계를 지키며 절세를 시도하고, 그렇지 못한 부류는 불법과 탈법을 동원해 세금을 줄인다.
그러나 오백세건강은 2조 원에 달하는 기부금을 내면서도, 누려야 할 혜택까지 포기하는 대인배의 모습을 보였다.
“이 정도면 오백세건강이 대한민국에 충분히 공헌하고 있다고 보는데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국내 기업보다 더 훌륭합니다. 믿고 협력할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오백세건강이 버닝스톤 원천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걸 고려해야 합니다.”
“저도 장관님 의견에 동감합니다. 버닝스톤은 에너지 역사를 새로 쓸 슈퍼 아이템입니다. 반드시 잡아야 합니다. 근거 없는 홀대로 오백세건강과 척지는 건 국가 장래를 망치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국가안보실장이 운을 띄우자, 산자부 장관과 차관이 버닝스톤을 언급하며 맞장구쳤다. 척하면 척. 버닝스톤을 확보하기 위해 오백세건강과 불편한 관계를 해소하자는 의미.
회의 참석자들은 장지환의 의도를 알아듣고 무언의 찬성을 보냈다. 하지만 그때, 우영철이 다시 한번 나섰다.
“버닝스톤은 미국과 캐나다가 독점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현재 미국 텍사스주와 캐나다 앨버타주가 버닝스톤 생산 라이선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2개 주로 전 세계의 수요를 감당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동아시아 라이선스를 우리가 가져와야 합니다.”
“암브로시아와 유사한 상황을 만들자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대한민국이 버닝스톤 동아시아 허브가 되면, 반도체를 능가하는 무역 먹거리를 확보하게 될 겁니다.”
“흠이 있더라도 덮고 넘어가야 할 상황이라는 거군요. 법치주의에 맞는 걸까요?”
“오백세건강에게는 드러난 흠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왕 정부가 나선다면 흠을 덮고 가는 정도로는 안 됩니다. 오백세건강에 흠이 나지 않도록 우리 정부가 나서서 지원해야 합니다. 그래야 미래를 이끌어 갈 슈퍼 아이템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회의 참석자 중 버닝스톤의 가치를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산자부 2차관 최창해가 날카로운 안목으로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우영철이 계속해서 딴죽을 걸어 보지만, 최창해의 논리적인 주장을 상대하기 역부족이었다.
“버닝스톤을 반드시 확보해야 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백세건강과 관계를 강화할 방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대한민국 경제를 지킬 기둥을 세우는 일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저절로 이뤄지기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최창해가 논리로 우영철을 압살하자, 회의 참석자들이 의견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오백세건강과 불편한 관계를 정상화하고, 버닝스톤 생산 라이선스를 확보하자는 것.
침묵하며 회의 상황을 지켜보던 국가 수사 본부장 이영수의 얼굴이 점점 흙색으로 변해 갔다.
6.
<대표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좋은 소식? 제수씨가 다섯째 가졌냐? 보너스 좀 줄까?>
<그런 거 아니고요!>
뱌체슬라프가 창수에게 목매는 결정적인 이유가 아이들이다. 23세에 결혼해서 벌써 자녀가 4명.
어린아이들을 키우고 대가족을 건사하려면, 창수가 심하게 굴려도 군말 없이 따라야 하는 것이 뱌체슬라프의 처지다.
창수가 오랜만의 통화에서 농담을 던지자, 목줄이 조여드는 느낌 같은 느낌을 받은 뱌체슬라프가 발끈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이구, 귀청이야!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냐?>
<대표님이 자꾸 썰렁한 농담을 하니까 그렇죠!>
<알았다, 알았어. 그래, 좋은 소식이 뭐야?>
<한국 정부에서 수사 관련해 무리한 점이 있었다고 공식 사과했습니다.>
<응? 정말이야?>
<예. 그리고 무리한 수사를 강행한 국가 수사 본부장을 직위 해제 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암브로시아 론칭 행사를 방해한 혐의로 대유제당에 압수 수색을 실시했습니다.>
오백세건강과 관계 개선하기로 의견을 모은 대책 회의 결과가 대통령에게 보고됐고, 후속 조치가 신속하게 진행됐다.
대유제당에 편향적인 자세를 보이던 국가 수사 본부장 이영수가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대유제당의 사보타주 사주에 관한 수사가 시작됐다.
한국 정부가 오백세건강과 관계 개선을 위해, 연 매출액 25조 원에 달하는 한국 재벌 그룹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이다.
<호오! 벽창호 같은 사람들이 웬일이지?>
<뻔한 거죠, 뭐. 버닝스톤 때문에 대표님에게 잘 보이려는 거예요. 산자부에서 면담 요청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누가 면담하자고 하는데?>
<산자부 장관이요.>
<흠……. 정부에서 성의를 보이는데 한번 만나는 게 예의겠지?>
<그럼요. 먼저 손 내미는 사람을 매몰차게 뿌리치는 건 대표님답지 않은 행동이죠.>
<알았다. 다음 주에 귀국할 거니까, 그때로 면담 시간 정해.>
<알겠습니다, 대표님. 산자부에 연락해서 약속 잡겠습니다.>
창수는 한국 정부가 국가 수사 본부장을 경질하고 재벌 기업에 칼을 겨눈 것이 쉽지 않은 결단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면담 정도는 응해 주는 것이 인간적인 도리.
그렇다고 버닝스톤 생산을 쉽게 허가한다는 건 아니지만, 만나서 대화가 원만하게 풀리면,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다.
한국 정부의 전격적인 조치가 굳었던 창수의 마음을 조금씩 풀어 주기 시작했다.
* * *
“로버트! 오랜만이야!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연구소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냈지.”
4월 29일 토요일, 태국 방센비치에 있는 김근홍의 저택으로 오랜 친구 로버트 카빌이 찾아왔다.
소위 말하는 ‘불알친구’는 아니지만, 영국 대학교에 입학한 이후 처음으로 사귄 친구로, 김근홍에게 몇 안 되는 절친의 한 명이다.
둘은 경제학과에서 수재로 통했다. 차이가 있다면 김근홍이 금융 공학에 관심을 가진 반면, 로버트 카빌은 거시경제에 집중했다. 졸업 이후 진로도 마찬가지.
“커커커. 여전하구만,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태국까지 온 거야? 네가 노벨 경제학상 받기 전까지 유럽을 벗어나지 않을 거라 봤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하지만 남의 돈 받으면서 연구하는 것도 만만치 않더군.”
“엉? 연구소에서 쫓겨난 거냐?”
김근홍은 노벨 경제학상 받는 것이 시간의 문제라 여겼던 친구가 연구소를 떠나 태국에 온 것에 당혹감을 느꼈다.
로버트 카빌은 영국 최고 경제 연구소에서 거시경제를 연구하며, 제2의 케인즈라 불리는 촉망받는 경제학자다.
거시경제학은 특정한 산업과 경제 주체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산업과 경제주체들의 활동으로 만들어진 국가 단위 경제를 다루는 학문이다.
국민소득, 물가, 실업률, 국제수지, 환율 등이 연구 대상.
거시경제학이 대두된 배경은 1929년 전 세계를 강타했던 세계 대공황을 기존 경제학이 설명하지 못한 것에 있다.
당시 케인즈는 <고용, 이자,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이라는 역대급 저술을 발표하며, 유효수요를 창출하는 것이 경제공황을 탈출하는 방법이라는 걸 세상에 알렸다.
케인즈의 이론은 시간이 지나면서 옹호와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지만,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 여전히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로버트 카빌은 케인즈의 이론에서 한 발 더 나가, <신산업-신수요>를 주창하며,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세계 경제 위기를 막는 연구에 몰두했다.
능력에 비해 유명하지 않은 것은 연구에 방해된다고 미디어 노출을 꺼리기 때문이다.
이런 친구가 뜬금없이 태국으로 날아온 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 분명하다.
“정부에서 시키는 일은 안 한다고 고집부리다가 경제 연구소에서 거의 쫓겨날 뻔하기는 했어.”
“영국 정부가 사람을 쓸 줄 모르는구만. 로버트, 거기 때려치워라. 내가 연구소 설립해서 너 소장 만들어 줄게.”
“마음은 고맙다. 그런데 말이야.”
“그런데 뭐?”
“내가 경제 연구소에서 쫓겨날 뻔한 원인에 너도 포함돼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