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35장. 줄을 서시오
3.
베이타운 인근에는 30여 개에 달하는 정유 시설이 자리하고, 하루 700만 배럴에 달하는 원유를 정제한다. 미국 전체 정제량의 46%를 차지하는 물량.
텍사스 주지사 조쉬 윌리암슨은 베이타운 인근에 화력발전소를 건설한 뒤 버닝스톤을 투입해, 뿜어져 나오는 이산화탄소를 제거할 계획이었다. 빨라야 2년 후에 이산화탄소 감소 효과가 나타날 상황.
하지만 버닝스톤 생산과정에서도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기에 화력발전소를 따로 건설할 필요가 없어졌고, 감소 효과도 당장 보게 됐다.
게다가 1공장이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추이를 보고 2공장을 건설하면, 텍사스주 전체를 미국에서 가장 청정한 지역으로 만들 수 있다.
조쉬 윌리암슨은 창수의 계획이 텍사스를 위한 최선의 방안이라는 걸 깨닫고 찬사와 함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됐다.
* * *
[텍사스 주지사가 흥미로운 발표를 했습니다. 버닝스톤 생산과정에서 이산화탄소를 대량으로 흡수해, 텍사스 공기 질이 미국에서 가장 좋아졌다고 합니다. 이 주장이 사실인가요? 아니면 정치적인 선전인가요?]
공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를 줄이는 건 주지사의 업적이다. 정치인 조쉬 윌리암슨이 이 호재를 그냥 넘길 리 없다.
텍사스주 산하 연구 기관에서 버닝스톤 생산 공장 인근을 포함한 주 전역의 이산화탄소 농도를 측정한 뒤, 언론에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텍사스 주민들이 박수로 환호하는 건 당연한 일.
그러나 모두가 텍사스의 성공을 반기는 건 아니다. 텍사스에 이어 미국 내 경제력 3위에 랭크된 뉴욕주를 중심으로 언론에서 검증에 나섰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텍사스주의 발표는 사실입니다.]
[예! 조작된 데이터가 아니라고요!?]
[조작이 아닙니다. 우리 연구진이 측정해 본 결과, 휴스턴 인근 이산화탄소 농도는 277ppm이었고, 오스틴이 305ppm, 댈러스가 311ppm이었습니다.]
[텍사스 대도시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전국 평균보다 100ppm 낮은 거군요. 이것이 버닝스톤 생산의 힘인가요?]
[그렇게 봐야겠죠. 다른 원인이 없으니까요.]
꼬투리를 잡으려 했지만, 오히려 선전만 해 주고 말았다. 사실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조작이 불가능에 가까운 영역이다. 실제로 이산화탄소 농도가 낮아졌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팩트.
[버닝스톤 생산이 그렇게 유용하다면, 텍사스가 독점하면서 홀로 이익을 보는 것이 문제 아닐까요?]
[텍사스만 혜택을 보는 건 아닙니다. 뉴올리언스도 이산화탄소 농도가 360ppm을 기록하며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 전역이 골고루 혜택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에 동감합니다.]
심기가 상한 방송 진행자가 억지를 부리며 텍사스를 비난했으나, 조사를 실행한 과학자는 텍사스 공기만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명확히 알렸다.
베이타운에서 470km 떨어진 뉴올리언스의 이산화탄소 농도도 50ppm 떨어졌다. 이건 무시할 수 없는 수준.
다만, 조사 비용과 방송 출연료를 지급한 방송국의 체면을 봐서, 버닝스톤 생산 공장을 미국 전역에 세워야 한다는 것에 동감을 표했다.
- 개쩐다! 버닝스톤을 태우지 않고 만들기만 해도 이산화탄소가 없어지네!
- 캐나다에서 그런 소문이 있기는 했는데, 진짜인지 몰랐어.
- 오백세건강이 진짜 외계인 감금하고 있는 거 아니야?
- 외계인은 몰라도 노벨상은 줘야 할 것 같아.
- 오백세건강 모집 광고 안 뜨냐? 주식을 못 사면, 취업이라도 해야겠어!
- 아서라. 텍사스에서 구인 광고 떴는데, 경쟁률이 500 대 1이란다.
- 그거라도 어디냐? 텍사스로 가야겠어!
연소 과정에서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특성 하나만으로 버닝스톤은 슈퍼 아이템이다. 여기에 특성이 추가되니, 열광적인 관심을 받는 건 당연한 일.
잠시 숨 고르기에 들어갔던 버닝스톤에 관한 대중적 관심이 다시 폭발하게 됐다.
4.
4월 27일 목요일, 서울에 있는 오백세건강 한국 지사 사무실에 고위급 정부 인사가 방문했다.
“처음 뵙습니다, 뱌체슬라프 이사님. 산업 통상 자원부 2차관 최창해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차관님. 바쁘신 분이 어떤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오백세건강이 잘나가는 회사라고 해도 사기업 이사가 산자부 차관을 홀대하기 어렵다. 그리고 연배도 20살 이상 최창해가 많아 예의를 차리는 것이 도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창해를 맞이하는 뱌체슬라프의 자세는 자못 퉁명스러웠다.
“어제 박희두 정책관이 여러 가지 실례를 저지른 것 같아 사과드리는 의미로 왔습니다.”
“사과할 게 있습니까? 정책관처럼 지체 높은 분이면, 저 같은 고려인 3세 정도는 대충 대해도 되는 거지요.”
“마음이 많이 상하셨군요. 박 정책관 그 친구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외골수라 사고 친 겁니다. 이사님이 오백세건강의 실세라는 걸 모르고 저지른 일이니, 화 푸시기 바랍니다.”
“커험……. 차관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조금 위로가 되는군요.”
정책관은 2급 공무원으로 공무원의 꽃이라 불리는 국장 직위다.
한국 중앙 부처의 국장은 해당 분야 실무 총책임자로, 작정하고 딴죽 걸면 장관도 업무 추진이 어렵다고 할 정도로 공무원 사회에서 파워가 있다.
어제 오백세건강을 찾아온 박희두는 자신을 응대한 뱌체슬라프를 어리다고 낮잡아 보며 하대했다. 평소에 거들먹거리던 나쁜 버릇이 그대로 나타난 것.
아직 20대지만, 인생 밑바닥 경험을 하며 산전수전 다 겪은 뱌체슬라프가 가만히 당하고 있을 리 없다. 박희두와 같은 방식으로 맞받아치며 멱살잡이 직전까지 갔다. 민간 기업 이사가 중앙 부처 국장과 맞짱 뜬 것.
정부 눈치를 봐야 하는 한국 기업 환경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런 사건이 벌어지면 민간 기업 이사가 무릎 꿇고 사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뱌체슬라프는 사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국장의 상사인 차관이 직접 찾아와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이건 정부 측에서 뱌체슬라프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는 걸 의미한다.
“사과를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고 김창수 대표님과 면담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요? 장관님께서 몹시 기대하고 있습니다.”
“음……. 아마 어려울 겁니다. 그 양반 보기보다 속은 좁은 사람이라서요.”
“예!? 속이 좁다고요?”
최창해가 뱌체슬라프의 비위를 맞춘 이유는 창수와의 면담을 성사하기 위함이다.
대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는 오백세건강 한국 지사 경영을 전담하는 걸로 미루어, 뱌체슬라프가 창수의 최측근이라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뱌체슬라프는 자신이 받는 대접의 근원을 아는지 모르는지 외부인 앞에서 직장 상사를 까 대기 시작했다.
돌발 상황에 살짝 당황하는 산자부 2차관.
“대표님은 지위가 낮거나 가난하다고 해서 깔보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는 그 이상 보답하죠. 그런데 상대방이 건방지게 나오거나 수작을 부리면, 용서하지 않습니다. 아주 철저하게 밟아 버립니다. 무서울 정도로요. 뒤 끝이 아주 지독하죠.”
“김창수 대표님은 게임이론에 따라 팃포탯 대응 하는군요. 그건 속 좁은 것이 아니라 전략적인 행동입니다.”
상대방이 협력하면 나도 협력하고, 상대방이 배반하면 나도 배반한다. 이 방식을 반복해서 상호작용에 적용하는 것이 팃포탯 전략이다.
눈높이 대응과 일맥상통한 것으로 간단명료하면서 강력한 게임이론 전략으로 평가받고 있다.
엘리트 공무원 최창해는 뱌체슬라프의 말을 듣고 창수의 성향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예? 티… 뭐라고요?”
“처세술의 하나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무튼 김창수 대표님이 산업 통상 자원부에 섭섭한 일이 있는 것 같군요. 그것이 무엇일까요?”
“산자부는 아니고 경찰에게 황당한 일을 당해 기분이 상한 겁니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실은…….”
뱌체슬라프는 최창해에게 자기를 포함한 오백세건강 임직원이 강희만과 고진석의 실종 건으로 조사받은 것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말씀을 들으니, 정말 황당한 일을 당하셨군요.”
“그렇죠. 대표님이 열 받아서 암브로시아 판매 거점을 러시아로 옮기려고 했어요. 저와 직원들이 난리 치는 대표님을 간신히 말렸죠. 지금 버닝스톤 때문에 대표님과 면담하려는 것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번에 쌓인 응어리를 풀지 못하면, 만나 봐야 소용없을 겁니다.”
“면담을 추진하기 전에 풀어야 할 문제가 있었군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사님.”
뱌체슬라프가 창수의 뒷담화를 치고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성향이 같다. 자신을 깔본 박희두를 거칠게 대한 반면, 자신에게 잘해 주는 최창해에게는 친절하게 상황 설명을 해 줬다.
그리고 이건 매우 높은 가치를 가진 정보다. 창수가 한국 정부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과 그 이유를 아는 것이 그의 마음을 움직이는 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상한 두뇌를 가진 최창해는 뱌체슬라프로부터 결정적인 정보를 얻었다는 걸 알아차리고, 웃는 얼굴로 돌아갔다.
* * *
산자부로 돌아온 최창해는 뱌체슬라프에게 들은 이야기들을 검증하기 시작했다. 결과는 대체로 사실.
확인을 마친 최창해는 장관에게 보고하고 함께 버닝스톤 대책 회의가 열리는 장소로 이동했다.
산자부 2차관은 한국 에너지 정책을 총괄하는 위치에 있다. 휘하에 관련된 부서만 20개에 달한다. 버닝스톤과 관련된 안건은 에너지 분야이기에 최창해가 대책 회의에 참석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 해도 산자부 장관이 참석하는 회의에 함께 참여하는 건 대책 회의 급수가 높다는 걸 의미한다.
“오백세건강은 국가 발전에 큰 공헌을 한 기업입니다. 상을 주지는 못할망정, 석연치 않은 이유로 수사한 건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최창해 차관님, 수사기관이 피의자를 조사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라는 겁니까?”
청와대에서 열린 대책 회의에 참석한 최창해가 경찰의 무리한 수사를 비판하자, 국가 수사 본부장 이영수가 발끈하고 나섰다.
“증거가 없고 범죄 연관성도 희박한 것이 문제입니다. 게다가 수사 과정에서 무죄 추정의 원칙이 제대로 지켜졌는지도 의문입니다.”
“한국 최대 모델 에이전시 대표와 경쟁 업체 비서실장이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오백세건강이 의심받는 건 당연한 겁니다.”
“하이퍼 에이전시는 계약 불이행으로 40억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 받았고, 대표는 업무방해죄로 수배 중입니다. 게다가 대유제당이 하이퍼 에이전시와 공모했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습니다. 경찰의 행위는 범죄에 당한 피해자를 겁박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말이 지나칩니다.”
“아니죠. 처지를 바꿔 생각해 보십시오. 본부장님께서 오백세건강 관계자라면, 웃는 얼굴로 수사를 받을 건가요?”
“그거야…….”
사실 이영수도 오백세건강을 수사하는 것이 무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법원에서 영장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으니까.
그런데도 수사를 강행한 건 정부와 정치권에서 오백세건강을 옹호하는 목소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산자부 2차관이 오백세건강을 강하게 두둔하니,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이영수 본부장, 무슨 일을 그따위로 하는 겁니까?”
“시… 실장님. 무슨 말씀이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