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34장. 만우절 농담이 실현되면
5.
스캔들을 빌미 삼아 마카롱과 협상에 들어가려는 계획을 재무장관 트레비스 호튼이 가로막았다.
“호튼 장관! 그게 무슨 소리요!?”
“안도라는 프랑스가 움직일 수 없는 곳입니다.”
“프랑스 대통령이 공동 영주인데 왜 움직일 수 없다는 거요?”
“안도라는 기본적으로 프랑스보다 교회의 영향력이 강합니다. 그리고 1993년 헌법 개정 이후 교회보다 유럽 부유층의 영향력이 더 강해졌습니다. 마카롱이 발 벗고 나서도 버닝스톤 소유권을 빼 오기 어렵습니다.”
교회 권력과 세속 권력의 팽팽한 힘겨루기 속에서 탄생한 특이한 역사를 가진 안도라.
본래 스페인 우르헬 백작령에 속해 있던 지역을 우르헬 교구 주교가 넘겨받았고, 무력이 약한 주교가 방어를 위해 프랑스 귀족과 손잡으면서 오늘과 같은 공동 영주제가 만들어졌다.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끼어 있음에도 745년을 유지한 것은 교회의 권위와 조세 회피를 위해 모여든 유럽 큰손들이 도움을 줬기에 가능한 일.
현재 안도라는 헌법 개정 이후 봉건국가에서 입헌군주국으로 체제를 바꾸고 국민이 선출한 국회의원과 총리가 국정을 담당하고 있다.
아직까지 교회의 영향력이 남아 있지만, 정치인들과 연결된 부유층이 실질적으로 안도라를 좌지우지한다.
트레비스 호튼의 말대로 마카롱을 움직이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버닝스톤이 미국의 손에 들어올 가능성은 낮다.
“빌어먹을! 어디 가나 탈세범들이 문제군!”
“부유층의 조세 회피는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건 그들을 이용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용이라… 어떻게 이용하자는 거요?”
“안도라를 움직이는 유럽 부유층에게 당근을 줘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면, 버닝스톤 확보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습니다.”
글로벌 투자은행 올드만은 안도라를 조세 회피처로 사용하는 유럽 부유층 상당수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트레비스 호튼 자신도 안도라에 근거를 둔 큰손 고객 여러 명과 지금도 개인적인 연락을 주고받고 있는 상황.
셀든 대통령의 심기를 거스르면서까지 강하게 의견을 내놓은 건, 백악관 회의에 참석한 누구보다도 안도라 상황에 정통하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말 돌리지 말고 핵심을 말하시오. 우리가 안도라 탈세범들에게 어떤 미끼를 던질 수 있는 거요?”
“안도라를 금융 감시 대상 지역에서 해제하고 미국 금융시장과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도록 조치하면 됩니다.”
미국 주도로 OECD는 30여 개에 달하는 지역을 조세 피난처 블랙리스트에 올려 직간접적으로 견제하고 있다. 안도라도 그중의 하나.
안도라가 조세 회피처로 사용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중세 시대까지 이른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 국가가 눈엣가시로 여기는 지역이다.
안도라가 국제 기준에 부합한 세금을 매긴다고 천명했지만, 실질적으로 지지부진해 미국 금융 당국이 감시하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절대 허가할 수 없소! 그리고 당신은 탈세범들을 감시해야 하는 직무가 있소! 탈세를 부추기다니! 무슨 망발이오!?”
“우리가 지금처럼 감시한다고 부유층의 금융거래를 막을 수 있을까요? 암호 화폐를 이용한 금융거래를 막는 건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정보 통신 기술 발달로, 감시를 비웃는 우회 방법이 속속 개발되고 있습니다. 대통령 각하, 실리를 택해야 한다고 봅니다.”
안도라 같은 조세 회피처를 감시하는 것이 미국 재무장관의 직무 중 하나다. 셀든 대통령은 자신의 임무를 망각한 트레비스 호튼에 호통치며 강하게 질책했다.
하지만 미국 대통령의 반응을 먼저 예상하고 있던 재무장관은 물러서지 않고 냉엄한 현실을 말했다.
“각하, 안도라를 풀어 주는 것과 버닝스톤을 소유하는 것의 득실을 따져 봐야 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버닝스톤은 국제경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슈퍼 아이템입니다.”
안도라를 움직이는 유럽 큰손들과 협력하자는 건 트레비스 호튼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비서실장과 국무장관도 합세에 버닝스톤을 위해 손잡자고 말했다.
“흠……. 중론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좋소, 호튼 장관. 안도라와 접촉해서 버닝스톤 소유권을 확보하시오.”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대통령 각하.”
대통령이라도 대세를 거스를 순 없다. 셀든은 트레비스 호튼과 연결된 국제금융 세력에게 끌려다니는 걸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나 믿을 수 있는 측근들이 동조하니 홀로 반대할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안도라를 완벽하게 틀어막을 수 없는 상황에서, 실리를 취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일 수 있다.
결국, 셀든은 유럽 부유층과 손잡는 것을 선택했다.
* * *
[창수야, 미국이 안도라에 작업을 시작했다.]
트레비스 호튼 미국 재무장관이 프랑스 파리로 날아가 유럽 큰손들과 만나 안도라에 대한 감시를 풀고 버닝스톤 소유권을 인수하는 협상에 돌입했다.
이 사실을 파악한 김근홍이 익명이 보장되는 메신저를 통해 창수에게 알렸다.
[예상보다 움직임이 빠르군요.]
[버닝스톤의 가치를 그만큼 높게 보는 거지.]
[미국의 움직임을 저지하긴 어려운가요?]
[어려울 것 같아. 호튼 그자가 엄청난 선물 보따리를 풀고 있으니까.]
[근거지를 다른 조세 회피처로 옮기는 건 어떨까요?]
[지금 미국 자세를 보면 버닝스톤에 올인 하는 것 같아. 다른 곳으로 이동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거야.]
예상은 했지만, 미국의 반응이 예측보다 빠르고 강렬하다. 만우절 마케팅이 대성공을 거둔 것이 원인이리라. 복이 과해 화가 되는 케이스가 돼 버린 것.
창수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다른 국가로 버닝스톤 거점을 이동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사실 안도라가 최적지다. 프랑스와 스페인 중간에 위치해 물리적인 공격에서 안전하다. 정치 체계도 교황청과 프랑스 그리고 유럽 큰손들에게 힘이 분배된 상태이기에, 미국이 개입할 여지가 적었다.
창수가 한국을 버닝스톤 근거지로 삼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미국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 시도가 무력화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선배님, 미국 움직임을 4일만 지연해 주십시오.]
[월요일까지 막으라고? 만만치 않은데…….]
[자금을 살포해서라도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적어도 50억 달러는 들어갈 거야. 그래도 괜찮아? 월요일이 지나면 그냥 날리는 돈이야.]
[그 정도 지출은 감내할 수 있습니다.]
[알았어. 무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안도라가 미국과 합의 못 하도록 지연시킬게.]
50억 달러면 한국 돈으로 6조 원에 근접하는 거금이다. 창수는 안도라를 암중에서 좌지우지하는 큰손들에게 이 돈을 먹일 요량이다.
고작 미국과의 협정을 4일간 막기 위해 천문학적인 자금이 들어가는 것에 속이 쓰리다. 하지만 이대로 손 놓고 당할 수 없는 일.
창수는 과감한 베팅을 시도했다.
6.
<호튼 장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요? 곧 합의가 끝난다고 하더니 파리에서 휴양 보내고 있는 거요?>
<아닙니다! 대통령 각하! 합의를 마치려고 협상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그놈의 협상은 언제 끝나는 거요!? 내 임기가 끝날 때까지 질질 끌 거요!?>
<주말이 끼어 협상이 늦어진 겁니다. 2시간 후에 최종 미팅 할 예정입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워싱턴 시간 4월 10일 월요일 오전 9시, 셀든 대통령이 재무장관에게 독촉 전화를 걸었다.
지난주 금요일에 마무리할 것으로 예상한 협상이 주말을 넘어 월요일에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기에.
트레비스 호튼은 식은땀을 흘리며, 주말 핑계를 댔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다. 협상이 지지부진한 이유가 오백세건강 측의 방해 공작에 기인한다는 걸.
그런데도 내색하지 않은 건 어떻게 해서든 자기 손으로 협상을 마무리해야, 셀든 정권에서 입지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이 마지막이오! 합의가 안 되면, 탈세범 놈들 모두 체포해서 본때를 보여 줄 거요!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소!?>
<명심하겠습니다!>
최후통첩. 셀든 대통령의 선언은 빈말이 아니다. 평상시 신사적인 풍모를 보이지만, 분노하면 물불을 안 가리는 다혈질.
할 말이 많지만, 트레비스 호튼은 속으로 삭이고, 협상 성사를 위해 온 힘을 다했다.
* * *
“대통령 각하! 캐나다 보수당이 총리 불신임안을 국회에 제출했습니다!”
“뭐요!? 무슨 이유로 부이용 총리를 불신임한다는 거요!?”
오전 10시, 기다리는 협상 성사 보고는 없고 비서실장으로부터 불길한 소식이 전해졌다. 캐나다 제1야당 보수당이 실력행사에 들어간 것.
“타국의 첩보를 이용해 앨버타주 탄소 저감 기술 연구를 방해했다는 혐의입니다.”
“타국!? 우리를 말하는 거요!?”
“그렇습니다. 부이용 총리가 미합중국에 과도하게 의지하면서, 캐나다의 미래 산업에 타격을 가했다 주장하고 있습니다.”
“자유당 반응은 어떻소?”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부이용 총리가 우리에게 너무 양보했다는 시각이 지배적입니다.”
창수가 만우절을 이용해 버닝스톤을 홍보하는 동안, 앨버타주 총리 마이클 쿠루니는 보수당 지도부를 움직여 캐나다 총리 로랑 부이용에게 정치적 반격을 시도했다.
국정조사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버닝스톤의 가치가 상승하면서, 여당인 자유당 의원들 일부를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중의 한 명이 외교 위원회 간사 더스틴 와일리. 그는 여당의 중진임에도 불구하고, 탄소 저감 기술을 미국에 넘기려는 로랑 부이용의 자세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캐나다 총리가 미국으로부터 정보를 받은 정황을 포착하고 불신임안 제출에 앞장섰다.
정파 이익을 떠나 미국의 과도한 간섭을 배제하는 것이 캐나다를 위한 길이라 생각한 것.
“멍청한 놈들! 미합중국이 부강해져야 캐나다가 발전한다는 걸 모르는 건가!?”
“승객이 아니라 운전대를 잡고 싶은 마음이 강한 것 같습니다.”
“쯔쯔쯔. 철딱서니 없는 것들. 뜨거운 맛을 보여 줘야겠구만!”
셀든의 입장에서는 로랑 부이용이 캐나다를 위해 제대로 처신하고 있는 거다.
총리를 비판하는 보수당과 자유당 일부 의원들은 국제 정세를 모르는 애송이에 불과하다. 미국의 진정한 힘을 한번 보여 주면, 알아서 꼬리 내릴 거라 판단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파이브아이즈에서 배제하는 건 어떨까요? 정보 네트워크에서 축출당하면, 우리가 준 정보가 귀중한 자산이라는 걸 알게 될 겁니다.”
“그건 당장 실행하기 어렵소. 영국과 호주에서 강하게 반발할 게 뻔하니까.”
“그러면 경제제재 쪽은 어떨까요?”
“그게 좋겠군. 우선 캐나다가 수출하는 목재에 반덤핑관세 조사를 시작하시오. 서서히 목을 조이면, 철딱서니 없는 캐나다 의원 놈들도 정신이 번쩍 들 거요.”
정보에 관련된 사항이기에 파이브아이즈 축출이 가장 직접적인 경고지만, 다른 구성원인 영국, 호주, 뉴질랜드가 미국의 조치에 반기를 들 가능성이 있다.
설득하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당장 실질적인 조치를 하기 어려운 상황.
반면, 목재는 즉각적인 조치가 가능하다. 2022년 기준 캐나다의 대미 목재 수출은 40억 달러에 달한다. 절대적인 기준에서 큰 금액은 아니지만, 선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임가공 분야 유권자의 표심을 움직일 수 있다.
게다가 미국과 캐나다는 NAFTA 체결 이후에도 목재 수출 관련으로 여러 번 충돌을 벌여 왔기에, 제재를 실행할 명분도 있다.
셀든은 무역 대표부를 동원해 캐나다 정치권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전 10시 50분, 파리에서 안도라 관련 최종 협상이 시작되기 10분 전.
“대통령 각하! 텍사스 주지사와 캐나다 앨버타주 총리가 특별 협약을 맺는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