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31장. 한 수 앞을 내다본다
2.
“이놈! 말하는 꼬락서니 보소! 내가 너에게 원한 산 일이 있냐!? 아니면 해적 졸개 노릇이 자랑스러운 짓이냐!? 살수 짓이나 하는 주제에 뭘 잘했다고 목소리를 높여!?”
“…….”
“주군! 이런 놈은 사실을 실토할 때까지 혹형을 가해야 합니다!”
코를 찌르는 강한 약품 냄새를 맡고 정신을 차린 관시엔은 목에 마나구속구가 채워져 있고, 온몸이 결박된 상태라는 걸 알게 됐다.
탈출할 수 없고 자살도 어렵다는 걸 알아차린 관시엔은 자존심이라도 지키기 위해 소리를 질러 댔다. 격분한 창수가 단번에 자신을 죽여 주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상대는 얕은 잔머리에 넘어갈 만큼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다. 창수는 관시엔의 속셈을 꿰뚫어 보고, 시시비비를 조목조목 따지며 비난을 이어 갔다.
곁들여, 옆에 있던 츠네가 고문하자고 설치니, 담대한 절정 무사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자백마법이라고 들어 봤지?”
- 척!
“…….”
“이게 자백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스크롤이야. 네놈이 실토하든 말든 정보를 뽑아내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어. 그래도 말할 기회를 주는 건 네놈이 받을 고통을 줄이기 위한 거다.”
창수는 진실과 거짓을 교묘하게 섞어 관시엔을 압박했다. 손에든 자백마법 스크롤은 진품이다.
하지만 5서클 유저 고사누가 만든 것이기에 아직도 결함이 있어, 상대방이 묻는 정보를 명확히 인식해야 효과를 발휘한다. 관시엔처럼 무턱대고 협조를 거부하는 대상에게 사용하기 어려운 상황.
창수는 이 사실을 숨기면서 관시엔에게 호의를 베푸는 모습을 보였다. 관시엔이 속아 넘어가 정보를 술술 불면 좋고, 아니더라도 창수가 질문하는 내용을 인식하면, 목표 달성.
“그… 그건…….”
“솔직하게 모든 걸 털어놔. 만약 네 사정이 딱하면, 너그럽게 용서해 줄 수도 있는 거니까.”
관시엔은 자백마법 스크롤의 능력을 잘 알고 있다. 천살단에서 사용하는 광경을 직접 눈으로 봤으니까.
워낙 고가이기에 함부로 쓰지 못하지만, 사용하기만 하면 상대방은 정보를 털어놓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자백마법에 당한 사람이 끔찍한 고통을 겪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관시엔이 창수의 제안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자, 기회를 잡았다고 판단한 창수는 더 탐스러운 밑밥을 던지며, 자백을 유도했다.
“정말 풀어 줍니까?”
“나는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야. 그리고 어차피 너는 모든 사실을 불어야 해. 손해 볼 게 없는 거야.”
“후……. 말씀드리죠. 제가 소속된 곳은 천살단입니다. 그리고 천살단은 강남의 부호 웨이텐 대인의 암살 부대입니다.”
“웨이텐이라……. 그놈이 해룡방도 조종한 건가?”
“그렇습니다. 자금을 지원하고 수족처럼 부리고 있습니다.”
“해룡방이 사쓰마 번 함대와 협력하던데, 그것도 웨이텐이 관여한 건가?”
“그건 알지 못합니다. 다만, 웨이텐 대인이 다수의 해외 세력과 손잡으려 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반란을 꾸민다는 거야?”
“독립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말씀하신 대로 반란이겠죠.”
‘헐……. 정보가 술술 나오네. 이러다가 정말 살려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창수는 적을 상대하면서 거짓과 기만을 가리지 않지만, 약속한 건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창수는 얻기 힘든 고급 정보를 술술 불어 대는 관시엔을 보며, 살려 준다는 약속을 지켜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예감을 가지게 됐다.
“천살단에서 우리 상단 위치를 정확히 알고 쫓아오던데, 무슨 방법을 쓴 거지?”
“해룡방에서 화물선 하나에 마법물품을 부착했습니다. 거기서 나오는 신호가 300리까지 감지됩니다.”
“지금 한 말 사실이야? 화물선 3척을 모두 조사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데.”
“수면 아래 부착돼 있어 찾기가 어려울 겁니다.”
“흠……. 쥐새끼들이 쥐새끼 같은 짓을 했구만. 그런데 너는 지위가 어떻게 되기에 이런 내용을 다 알고 있지?”
“천살단 부단주입니다. 웬만한 일은 제가 관여하기에 주워들은 이야기를 말씀드린 겁니다.”
창수의 신경을 자극하던 문제가 드디어 풀렸다. 천살단이 무언가 수작을 부리고 추격했다는 걸 알아차리고, 아이신 1호부터 3호까지 증기화물선 전체를 내부부터 샅샅이 수색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아이신 상단에 세작이 침투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뒀으나, 확실한 증거를 잡지 못해 나서지 않은 상황.
만약, 마법물품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면, 금나라로 돌아간 이후에도 불신의 씨앗이 남을 뻔했다.
관시엔의 실토가 아이신 상단과의 불화를 사전에 막는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면 이제 너의 문제를 말해 봐. 보아하니 해적질과 암살이 적성에 맞는 건 아닌 듯한데, 무슨 이유로 천살단에 들어간 거지?”
“3년 전, 제가 살던 명나라의 마을에 지독한 역병이 퍼졌습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 고가의 약재와 치료비가 필요했습니다. 그 돈을 갚기 위해 천살단에 입단한 겁니다.”
“돈을 못 갚으면 어떻게 되는 건데?”
“마을 여인들이 기루로 팔려 갈 겁니다.”
“혼자서 여기까지 온 것도 빚을 갚기 위해서인가?”
“아이신 상단 수뇌부를 암살하면, 은자 50만 냥을 준다는 약속이 있었습니다.”
“흥! 마을 여인을 구하기 위해 죄 없는 아이신 상단 사람들은 죽어도 된다는 건가?”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씨족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 타인을 죽이는 것은 정당화할 수 없다.
창수의 날카로운 질문에 관시엔은 유규무언의 심정이 됐고, 자신이 여기서 죽으면 수많은 마을 사람들이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차마 말하지 못했다.
전후 관계를 알게 된 창수는 한동안 깊은 생각에 빠졌다. 관시엔을 살려 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리라.
“너의 이야기 잘 들었다. 나름대로 불가피한 면이 있군. 그래서 약속 내용을 바꾸려 한다.”
“어떻게 말입니까?”
“자백마법 스크롤을 사용해 네 말이 사실인 것으로 밝혀지면, 네 목숨을 살려 줄 뿐만 아니라, 은자 50만 냥을 주겠다. 그러나 네 말이 거짓이라면, 너는 죽게 될 거다. 내용 변경에 동의할 건가?”
“당연히 동의합니다! 마법스크롤을 사용해 주십시오! 제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아시게 될 겁니다!”
은자 50만 냥은 은 18,750kg, 1억3,120만 환(1,312억 원)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창수가 제안한 약속 내용 변경은 선물과 다를 바 없다. 목숨만 살려 줘도 감지덕지한 상황에서 거액을 주겠다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좋아. 약속이 체결됐군.”
- 찌이익!
“큭!”
자백마법 스크롤을 사용하자, 통증이 왔으나 참을 만했다. 그리고 사실을 말하자 큰 고통이 없었다.
“모든 게 사실이군. 좋아, 약속을 지키지.”
- 척!
“감사합니다! 대인!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녹색마탑에서 발행한 전표는 위조와 변조가 불가능하기에 명나라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그리고 멀리 유럽까지 널리 통용된다.
은자 50만 냥을 확인한 관시엔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부여잡으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 * *
“주군, 살수에게 너무 관대하신 것 아닐까요?”
“약속은 지켜야지. 그리고 그자의 능력을 너도 봤잖아?”
마나구속구를 풀어 주자, 관시엔은 가부좌를 틀고 기력을 모았다. 그리고 물에 떠 있는 고속정 잔해를 사용해 산둥반도 쪽으로 이동했다.
다시 한번 절정 무사의 능력을 발휘한 것.
“그래도 10만 냥을 추가로 주신 건 과하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무공을 얻을 계획으로…….”
“이번 전투에서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됐어. 그걸 얻을 기회를 만든 거야.”
“하지만 아무리 은혜를 베풀어도, 저자가 무공을 타인에게 전해 주지 않을 겁니다.”
“내가 약간의 호의를 보인 건 사실이야. 그러나 핵심은 가난한 마을에 돈맛을 알게 했다는 거지. 60만 냥은 필요한 자금의 1/3에 불과해. 나머지를 구하기 위해서 반드시 나를 찾아올 거야.”
“그렇군요! 주군의 심모원려를 알아보지 못해 죄송합니다!”
“하하하. 심모원려는 무슨. 그냥 내가 가진 강점을 사용한 것뿐이야.”
창수는 자백마법 스크롤을 사용해 관시엔의 씨족 마을 능천곡이 처한 상황을 파악하고, 10만 냥을 노잣돈 명목으로 건네줬다.
은자 10만 냥은 절정 무사도 쉽게 구할 수 없는 거금. 관시엔이 다시 한번 감격의 인사를 올린 건 당연한 일이리라.
그러나 10만 냥은 단순한 호의가 아니었다. 무공을 얻기 위한 초강력 떡밥.
능천곡이 갚아야 할 금액은 모두 180만 냥으로, 이번에 지급된 60만 냥은 급한 불을 끄는 정도에 불과하다.
채권자의 압박이 심해지고 능천곡 여인들이 수난을 당할 위기가 오면, 관시엔이 부유하고 관대한(?) 창수를 찾아올 것이 분명하다.
그때 무공을 구매하겠다고 제안하면, 거절하기 어려울 터.
츠네는 창수의 배포와 순간적인 판단 능력에 경탄했다. 매뉴얼에 얽매이고 속 좁은 일본인은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 * *
관시엔이 알려 준 대로 아이신 3호에 부착된 마법물품을 제거한 아이신 상단은 2023년 1월 17일, 무탈하게 금나라 잉커우에 도착했다.
류큐까지 왕복으로 25일이 걸렸다. 진류방, 시마즈 3전대, 해룡방 그리고 천살단과 전투를 벌였다는 걸 고려하면, 신속하고 성공적인 상행이라 평가받기 충분하다.
“김창수 님!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부상자 한 명 없이 항해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제안한 상행입니다. 아이신 상단 여러분의 안전을 지키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다음번 상행에도 불러 주십시오. 김창수 님과 함께라면, 두려울 게 없습니다.”
잉커우에 도착한 뒤 사탕수수 하역을 시작하자, 그제야 안심이 된 타무가 창수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사실 이번 상행은 전멸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험했다. 창수 덕분에 모든 위험을 극복한 거다.
게다가 아이신 상단 내부에서 자신의 입지까지 강화되니, 타무의 행동은 단순한 인사치레가 아니다. 이번 상행을 계기로 창수와 장기 계약을 맺고 싶은 것이 타무의 솔직한 심정.
“아무래도 남방행은 중단해야 할 것 같습니다. 웨이텐이 반란을 획책하고 있어, 상당 기간 남쪽 바다를 틀어막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도 김창수 님의 힘이라면, 충분히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번에는 웨이텐이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기습했기에 피해 없이 상행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자가 대비한다면, 앞으로 상행에 큰 위험이 따를 겁니다.”
타무는 창수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했지만, 창수는 아니다. 류큐를 왕복하면서 써먹은 전술을 그대로 반복하다가는 괴멸적인 타격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웨이텐이 만만한 인물이 아니니까.
“남방행을 중단하면, 사탕수수를 어디에서 구해야 할까요? 비싸더라도 명나라 상단에 손을 내밀어야 할까요?”
“명나라 상단의 배후에 웨이텐이 있습니다. 그자를 배불려 줄 수 없는 일이죠.”
“그렇다면, 어디서…….”
“염려하지 마십시오, 타무 님. 저에게 사탕수수를 대량으로 구할 방안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