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31장. 한 수 앞을 내다본다
1.
1월 11일 오전 10시, 타무와 차를 마시며 담소를 즐기던 창수에게 귀찮은 소식이 다시 전해졌다. 아이신 상단을 목표로 다가오는 고속정이 등장했다는 보고를 들은 것.
“이번에는 어떤 놈들이야?”
“어젯밤 전투를 벌인 고속정 중 하나로 보입니다.”
“뭐야!? 이것들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슬슬 짜증이 나려고 한다. 아니 이미 짜증이 나 버렸다. 10척 중 8척이 박살 났으면, 자기 실력을 알고 물러나는 것이 상식 아닌가?
고속정 달랑 한 척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일까? 자살하러 오는 것도 아닐 거고, 도대체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저……. 그런데…….”
“왜? 이상한 점이라도 있어.”
“다가오는 자가 한 명입니다.”
“한 명이 고속정을 몰고 온다고? 사신으로 오는 건가?”
사신이라면 단독으로 파견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은밀한 내용을 전달할 때 여럿 보내는 것보다 한 명 보내는 것이 효과적이니까.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사신이라면 표식을 달아야 합니다. 하지만 고속정에는 아무런 표식이 없습니다.”
“사신의 표식이 없다면, 홀로 전투를 벌이려는 미친놈인 거군.”
평행우주 너머 이곳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통으로 통하는 규칙 중의 하나가 사신에 관한 것이다.
창대에 하얀색 천을 달거나 하얀색 깃발을 들고 있다면, 전투 의사가 없는 사신으로 취급한다.
물론, 사신의 표식을 하고 기습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사신의 표식을 했으나 무시당하고 공격받는 일도 있다.
그러나 확실한 건, 하얀색 천이나 깃발을 들지 않은 적은 사신으로 취급할 수 없다는 것.
“김창수 님, 저자는 해룡방 배후 세력이 보낸 살수일 가능성이 큽니다.”
“살수의 특징이나 정황이 있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명나라 산적과 해적 중 악랄한 자들은 노략질이 실패할 경우, 무림 고수를 동원해 해코지합니다. 저자의 움직임은 전형적인 살수입니다.”
고정익 드론이 보내온 영상을 살펴본 타무가 다가오는 자가 미치광이가 아니라 암살 목적을 가진 무림 고수일 가능성을 말했다.
해룡방의 배후 세력이 전투 패배를 승복하지 못하고, 지저분한 뒤끝을 남겼다는 의미.
“저자가 무림 고수라면 조심해야겠군요. 그런데 바다에서 살수가 통할까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야간전투에 강합니다. 바다에서 기습이 더 어렵죠. 저자도 그걸 알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잉커우에 상륙한 이후를 노리는 거군요.”
“고속정이 거리를 두고 우리를 따라온다면, 그렇게 봐야 합니다.”
명나라 범죄 세력에 관해선 타무의 지식이 창수와 츠네를 앞선다. 아이신 상단이 명나라에서 대형 상행을 적지 않게 행하고 있어 정보가 축적된 것.
타무는 고속정에 탑승한 자가 바다에서 미행한 뒤, 금나라에서 기습할 거라 예상했다.
“고속정이 100리 거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살수가 분명합니다.”
타무의 예측대로 고속정은 아이신 상단과 40km 간격을 두고 쫓아왔다. 아이신 상단이 이동속도를 10km/h로 늦췄음에도 거리가 좁아지지 않았다. 이건 미행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
창수와 타무는 살수를 상대할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 * *
- 통통! 통통!
- 슈우욱!
1월 14일 오전 6시, 아이신 상단의 뒤를 밟고 있던 고속정이 산둥반도 동쪽 끝 인근에 도달했다.
여기를 지나면 보하이만으로 들어간다. 금나라 세력이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치는 곳. 아이신 상단을 미행하는 난이도가 급격히 어려워지는 구간이다.
더구나 어두운 밤을 밝혀 주던 하현달도 사라져, 주위가 온통 깜깜하다.
살수는 어딘가에서 보내오는 신호를 주시하며, 아이신 상단과 40km 거리를 유지하는 데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 슝!
- 쾅!
- 콰쾅!
갑자기 날아온 물체가 고속정을 타격하면서, 열 폭풍이 발생했다. 매복하고 있던 창수가 RGP-7 열 압력 탄두를 발사한 것.
- 풍덩!
- 사악! 사악!
“주군, 살수가 아직 살아 있습니다.”
“흠……. 실력이 대단한 놈이군. 열 압력탄을 두 방이나 맞고 살아남다니.”
살수의 정체는 천살단 부단주 관시엔. 창수는 정찰 드론을 통해 대장선에서 천살단주 닝이천의 지시를 수행하던 관시엔의 얼굴을 파악하고 있었다.
1월 10일 밤, 대장선이 열 압력 탄두에 맞아 폭발할 때, 관시엔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속정을 단독으로 몰고 따라오던 살수의 얼굴을 확인하고, 자신이 판단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됐다.
살수가 운이 극도로 좋은 자이거나, 열 압력탄에서 발생하는 열 폭풍을 견딜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가진 자라 추측했다.
그리고 지금 관시엔이 두 번째 열 압력탄 폭발을 견디는 걸 보고, 능력자라는 생각을 굳히게 됐다.
“상급 마법방어구를 착용하면 열 폭풍을 막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살수에게 그런 보물을 지급할 리 없죠. 저자는 절정급 무사가 분명합니다.”
절정의 경지는 소드 익스퍼트 상급과 유사한 등급으로, 검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마나를 사용해 신체를 보호할 수 있다.
그 보호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관통력이 약한 열 압력탄의 파괴력을 막아 준 것.
“절정급이면 어디 가서도 대접받을 건데 해적 졸개 노릇도 모자라 살수 짓이나 하고 있군.”
“개인적인 사정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가? 어떤 사정이 있는지 모르지만, 우리를 두 번이나 노린 자를 살려 둘 수 없지.”
“그렇습니다. 이참에 확실히 제거해야 합니다.”
창수는 받은 만큼 돌려주는 걸 신조로 삼고 있다. 관시엔에게 어떤 스토리가 있는지 모르지만, 자신을 연거푸 노리고 달려드는 상대에게 자비란 없다. 돌아갈 걸 죽음뿐.
- 탕! 탕! 탕!
창수는 고무보트를 몰고 관시엔 쪽으로 다가간 뒤, 소총을 발사했다.
- 틱! 틱! 틱!
“철갑탄을 막아 내다니, 절정 무사의 실력은 명불허전이군.”
“완전히 막은 것은 아닙니다. 총탄이 피부에 조금씩 파고들고 있습니다.”
“좋아! 절정 무사가 철갑탄을 얼마까지 버티는지 시험해 보는 거야!”
창수는 이번에 평행우주를 넘기 전에 여러 가지 무기를 대량으로 구매했다. 그중의 하나가 신형 철갑탄이다.
기존에 주로 사용하던 5.56mm M995급 철갑탄은 100m 거리에서 균질 압연 장갑 1.2cm를 관통한다.
신형 철갑탄은 150m 거리에서 균질 압연 장갑 1.5cm을 뚫을 수 있다. 탄두 열처리가 향상되고, 탄피에 담긴 화약량이 대폭 증가했기에 성능이 강화된 것.
창수는 신형 철갑탄의 효용성을 확인할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연사를 시작했다.
- 탕! 탕! 탕!
- 틱! 틱! 푹!
“큭!”
창수와 츠네가 탄창을 갈아 끼우며, 200여 발을 발사했을 때, 관시엔의 방어가 일부 헐거워지며, 철갑탄 한 발이 팔뚝에 반쯤 박혔다.
연속 타격이 영향을 미친 거다.
“물량에는 장사 없지. 소총 바꿔서 계속 공격해.”
“알겠습니다! 주군!”
창수는 신형 철갑탄이 무림 고수에게도 일정 부분 먹힌다는 걸 알아보고, 사격을 지속했다.
화약량이 늘어나면서 총기에 가해지는 열기가 상승했지만, 예비로 마련한 소총이 10자루에 달하기에 문제 될 게 없다.
- 툭!
- 타다닥!
“이런 미친! 물 위를 걸어!”
하지만 관시엔도 가만히 당하고 있지 않았다. 물 위에 떠 있는 고속정 잔해를 밟고 튀어 오르더니, 해수면을 밟고 빠르게 달려왔다.
말로만 듣던 ‘등평도수’를 펼친 것.
- 탕! 탕! 탕!
관시엔은 150m 거리를 단숨에 좁혀 왔다. 창수와 츠네가 연속해서 철갑탄을 날렸지만, 저지하기 역부족.
- 슈욱!
고무보트 인근에 도달한 관시엔이 오른손에 든 칼에 마나를 집어넣고 내리쳤다. 고무보트를 단번에 갈라 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보트에 타고 있던 창수와 츠네에게도 타격을 줄 요량.
‘헤이스트’
- 위이잉!
- 쏴아악!
하지만 사기적인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건 관시엔 혼자만이 아니다. 츠네는 미궁 마스터로부터 각인받은 헤이스트 마법을 사용해 자신의 몸놀림을 빠르게 한 뒤, 신속하게 고무보트를 이동시켰다.
“허허허! 잘못하면 죽을 뻔했군!”
“죄송합니다! 주군! 제가 행동이 느려서 그만…….”
“무슨 소리야? 츠네, 네가 빠르게 움직여서 우리가 무사한 거야.”
간발의 차이로 위기를 모면한 창수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죽음의 위기를 벗어났다는 안도감과 함께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관시엔의 무공에 감탄한 것.
츠네는 자신의 대처가 늦어 창수를 위험에 빠트린 것을 자책했다. 그러나 창수는 츠네가 최선의 대응을 했다는 걸 알고 있다.
츠네가 헤이스트를 제때 사용하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당했을 터. 창수에게 블링크 마법이 있으나, 이동 거리가 15m에 불과해 사용 직후 바다에 빠졌을 거고, 결국 관시엔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을 거다.
“주군! 마법화살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아주 끝장을 내야 합니다!”
츠네는 창수의 말에 가슴이 따뜻해지면서, 동시에 살수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느끼게 됐다. 살수가 또다시 고무보트 쪽으로 헤엄치며 다가오는 것을 목격하고 꼭지가 돈 것.
관시엔은 마나를 과도하게 사용해 당장 등평도수를 펼칠 수 없으나, 빼어난 수영 솜씨를 보이며, 경보에 버금가는 이동속도로 접근했다.
츠네는 이례적으로 창수에게 공격 방법을 제안했다. 이건 이 자리에서 관시엔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좋아! 볼트23을 사용해. 하지만 목숨은 붙여 놔. 붙잡아서 알아내야 할 것이 많으니까.”
“아… 알겠습니다! 주군!”
창수의 지시가 옳다. 분노에 싸여 중요한 정보 소스를 날려 먹을 뻔했다.
창수에게 정보를 뽑아낼 확실한 방법이 있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살수에게 심한 고통을 줄 수 있다.
살수에게 고통을 가한 뒤 정보를 얻고, 쓸모없어지면 제거하면 된다. 이 방법이 그냥 죽이는 것보다 살수에게 월등히 괴로울 터.
츠네는 자신의 실수를 바로 알아차리고, 창수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 쉐에엑!
- 팍!
- 지지직!
“끄아악!”
창수와 츠네가 볼트23을 마법자루에서 꺼낸 뒤, 헤엄쳐 오는 관시엔의 양어깨를 향해 전격마법이 담긴 화살을 연속해서 발사했다.
신형 철갑탄을 겨우겨우 막아 내던 관시엔의 몸은 마법화살의 강력한 관통력에 맥없이 무너졌다.
이건 관시엔이 마나를 과다하게 사용해 방어력이 떨어진 것과 2,187J에 달하는 화살 운동에너지를 가진 볼트23의 위력이 만든 합작품.
- 철컥!
관시엔이 초인적인 의지로 전격마법에 대항했으나. 7발을 맞고 기절하고 말았다.
절정 고수로서 무공을 모르는 창수 일행에게 당한 것은 굴욕적인 일이리라. 그러나 동시에 상대방의 숨은 힘을 파악하지 못한 실책이 만든 자업자득이기도 하다.
창수는 고무보트를 몰고 관시엔 쪽으로 다가가 끌어올린 뒤, 목에 마법구속구를 채웠다. 여기에 당하면, 화경의 고수가 아니고서 자력으로 풀 수 없다.
그리고 마법구속구는 관시엔이 자살하는 걸 방지하는 효과도 있다.
“이봐! 해적 졸개! 네놈의 배후가 누구냐?”
“말할 수 없소! 어서! 죽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