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29장. 류큐 해전
3.
“시마즈 전투함이 이제야 출항 준비 하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반응이 느리군요. 이유가 뭘까요?”
타나미함의 부산한 움직임을 정찰 드론이 놓칠 리 없다. 그리고 증기화물선이 떠난 걸 뒤늦게 알고 호들갑 떠는 타나미함 선원들의 모습을 영상으로 관찰한 창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됐다.
“부두에 사탕수수를 남긴 것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점심시간을 이용한 것이 탁월한 선택이었죠. 우리가 출항 준비 하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으니까요.”
선박 규모가 클수록 출항을 위한 준비 기간이 길어진다. 아이신 상단의 증기화물선은 오전 사탕수수 선적이 끝난 직후 출항 준비를 시작해 1시간 뒤에 출항할 수 있었다.
만약 점심시간이 아닌 다른 시간에 출항 준비 했다면, 출항 전에 시마즈 졸개들에게 발각됐을 거다.
“항구에서 포격전을 벌이는 일이 없어 다행입니다.”
“맞습니다. 자칫 민간인이 전투에 휩싸일 뻔했습니다.”
“항구에서 전투를 벌였다면, 여러 가지 골치 아픈 일이 벌어졌을 겁니다. 지금 시마즈 전투함 7척이 북쪽 120리 거리에서 빠르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가능한 한 신속하게 서북쪽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맡겨 주십시오. 전속력으로 전진하면, 꼬리가 잡히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아이신 상단이 가진 전투력으로 충분히 타나미함을 상대할 수 있다. 하지만 항구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발목이 잡혀, 남하하는 시마즈 함대에 덜미를 잡힐 가능성이 크다.
좁은 해역에서 적함 7척의 공격을 받는다면, 생존할 확률이 극단적으로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창수는 조금만 지체해도 함정에서 빠져나갈 출구가 닫힐 것이라는 걸 알고, 증기화물선들이 최고 속도를 낼 수 있도록 독려했다.
타무는 창수의 말에 완전히 동감하며, 휘하 선장들에게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했다.
* * *
“야인 놈들이 도주한다! 어서 포격을 실시해!”
“하지만 함장님! 지금 사격 각도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증기화물선들이 빠르게 항구에서 멀어지자, 다급한 마음에 타나미함장 시모쥬쿠 타이헤이가 포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증기화물선들이 10시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어, 공격 각도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타나미함이 전방에 대포 2문을 배치하고, 좌우 양옆에 대포 9문씩 배치하고 있기에 공격이 어려운 상황.
“포신을 틀면 될 거 아니야!?”
“포신을 제대로 고정하지 못하면, 명중률이 떨어집니다!”
“우리 포수들의 능력이면 충분히 맞힐 수 있다! 더 이상의 반론은 항명으로 간주하겠다! 당장 포격 실시해!”
“알겠습니다! 함장님!”
선체가 비좁은 타나미함은 대포를 이동식이 아니라 고정식으로 묶어 놨다. 포신 방향을 이동할 수 있으나, 완전한 고정이 어렵다.
부관은 이 점을 지적했지만, 궁지에 몰려 정신이 반쯤 나간 시모쥬쿠 타이헤이는 역정을 내며 명령을 관철했다.
- 쾅! 쾅! 쾅!
- 풍덩! 풍덩! 풍덩!
그러면 그렇지. 포수들 능력은 개뿔. 억지로 포신을 틀어 포탄을 발사했지만, 증기화물선을 맞힌 포탄은 단 한 발도 없었다.
목표와 멀찌감치 떨어진 포탄이 속절없이 바다 속으로 사라질 뿐.
“선체를 옆으로 틀어! 이 상태로는 100방을 쏴 봐야 헛일이야!?”
“움직일 공간이 없습니다! 우선 항구를 빠져나가야 합니다!”
“칙쇼! 어서 움직여! 조금이라도 굼뜬 놈은 내 손으로 즉결 처분 한다!”
“하이!”
시모쥬쿠 타이헤이는 무모한 명령을 내린 것에 후회하거나 반성하지 않았다. 그 대신 또 다른 무모한 명령을 내려 판단 착오를 가리려 했다.
아이신 상단을 조준하기 위해 선체를 우측으로 돌리라고 지시한 것.
하지만 복잡한 항구 내에서 회전이 자유로울 리 없다. 게다가 아직 출항 준비를 마치지 못해 움직일 수도 없다.
출항 준비 시간이 증기화물선처럼 1시간은 아니지만, 적어도 20분은 필요하다. 부두에 쌓인 사탕수수 더미에 현혹돼, 아이신 상단의 움직임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뼈아프게 다가온다.
<시모쥬쿠 함장, 야인 선박은 지금 어떤 상태지?>
<그……. 그것이…….>
타나미함이 운텐항을 막 빠져나올 무렵, 류큐를 향해 다가오던 시마즈 함대와 통신이 연결됐다.
전투함 7척을 지휘하는 3전대장 호케츠 타마후미가 아이신 상단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었으나, 시모쥬쿠 타이헤이는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증기화물선들이 출항하는 걸 막지 못했다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한 것.
<이봐! 보고 안 하고 뭐 하는 건가!?>
<야인 화물선들이 운텐항을 빠져나가, 서북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뭐야!? 운텐항을 빠져나가!? 너는 그동안 뭐 하고 있었어!?>
<죄송합니다, 전대장님. 교활한 야인의 술수에 넘어가서 그만…….>
<닥쳐! 이 멍청한 놈! 당장 추격해서 꼬리를 잡아! 그러지 못하면, 네놈 목을 잘라 버릴 거야!>
<하이! 명심하겠습니다!>
예상대로 불호령이 떨어졌다. 3전대장 호케츠 타마후미가 전후 사정을 알아보지도 않고 시모쥬쿠 타이헤이를 몰아붙인 것.
그런데 말하는 자세가 시모쥬쿠 타이헤이가 부관에게 했던 것과 유사하다.
하긴 시마즈는 이런 식이다. 당주부터가 거리낌 없이 노략질을 일삼는 자이니, 수하들이 제정신일까?
* * *
“타무 님, 시마즈 전투함이 10리까지 따라붙었습니다.”
“흠……. 너무 무모한 행동이군요. 우리 전력을 무시하는 건가요? 아니면 공명심일까요?”
타나미함의 전방에 배치된 대포는 2문에 불과하다. 그 화력으로 아이신 상단이 보유한 대포 24문을 상대하는 건 어리석은 만용이다.
타무는 타나미함장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게 됐다.
“운텐항 방향으로 남하하던 시마즈 전투함 7척이 서쪽으로 진로를 바꿨습니다. 우리 진행 방향을 알고 양동작전을 펼치는 듯합니다.”
“그런 노림수가 있었군요! 이동 방향을 바꿔야겠습니다!”
“그래야죠. 하지만 먼저 따라붙은 전투함을 처리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가 움직이는 방향이 고스란히 알려질 겁니다.”
창수는 정찰 드론과 고정익 드론이 보내오는 정보를 취합한 뒤, 타나미함이 정찰과 미끼 역할을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증기화물선이 전속력을 낸다고 해도, 전투함보다 빠를 수 없다. 타나미함을 제거하지 못하면, 시마즈 함대에 덜미를 잡히는 건 시간문제일 터.
지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타나미함을 공격하는 것이다.
“전함! 모든 대포를 후방에 배치하라!”
덩치가 큰 증기화물선은 전투함과 비교해 여유 공간이 충분하다. 게다가 보유한 대포는 고정식이 아니고 이동식이다.
타무는 증기화물선 3척 후방에 대포 24문을 집결시켰다.
“지난번 소형정 사격과 유사하다! 각자 지정된 위치로 조준하라!”
상하이 인근에서 진류방과 전투를 벌인 뒤 아이신 상단 포병의 전투 능력이 급상승했다.
특히, 도주하는 소형정을 공격하면서 얻은 경험이 단일 목표에 대한 집중 사격 능력을 강화했다.
타무는 대포 24문에 일일이 조준점을 정해 줘, 둥근 화망을 만들게 했다.
“일제히 발사하라!”
- 쾅! 쾅! 쾅!
- 슝! 슝! 슝!
아이신 상단에서 발사한 포탄 24발이 날카로운 파공음을 만들며 타나미함으로 날아갔다.
“함장님! 야인들이 대포를 발사했습니다!”
“칙쇼! 함수를 왼쪽으로 돌려! 어서!”
“알겠습니다!”
- 슈우욱!
증기화물선을 추적하던 타나미함이 대포에서 발생하는 연기를 발견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건 뻔한 일.
시모쥬쿠 타이헤이는 즉시 함수를 틀어, 날아오는 포탄을 피하려 했다.
- 획! 획! 획!
- 풍덩! 풍덩! 풍덩!
빠른 대처가 효과를 본 것일까?
타나미함은 정면으로 날아오던 포탄을 피할 수 있었다. 그중 한 발은 1m도 안 되는 차이로 비껴갔기에 운도 따르는 상황.
- 획! 쾅! 쾅!
- 콰쾅! 콰쾅!
“으아악!”
“쿠아악!”
그러나 운도 물량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제법 기민하게 움직였지만, 타무가 만든 화망을 벗어나기 역부족.
첫 번째 포탄이 앞부분에 떨어지며 타나미함의 우현을 깨 버렸다. 두 번째 포탄은 중앙 갑판을 타격해 커다란 불꽃을 만들었다.
이어서 후방을 포탄 두 발이 추가로 타격하면서, 타나미함은 아비규환 상태로 변하게 됐다.
“기관 서행! 재장전 실시!”
포탄 4발에 피격당한 타나미함은 반파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타무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속도가 뚝 떨어진 타나미함과 거리를 맞추기 위해 증기화물선에 속도를 줄이라고 지시하고, 대포 24문에 재장전을 명령했다.
“전 탄 발사!”
- 쾅! 쾅! 쾅!
- 콰쾅! 쾅! 콰쾅!
2차 공세에 날아간 포탄 24발 중 20발이 타나미함에 적중했다.
아이신 상단을 성가시게 하던 시마즈 호위함이 처절한 비명과 함께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 *
“전대장님! 타나미함과 통신이 끊겼습니다!”
“뭐라고!? 어디서 교신이 끊긴 거야!?”
- 척!
“이 지점입니다! 야인 화물선을 공격할 사정거리에 접근한다고 말한 것이 마지막 교신입니다!”
타나미함이 침몰한 지 10분이 지날 무렵, 통신참모가 3전대장 호케츠 타마후미에게 돌발 상황을 보고했다.
타나미함으로부터 곧 공격을 시작할 거라는 말을 들은 뒤, 소식이 없자 수차례 재교신을 시도했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통신참모가 직감적으로 사달이 발생했단 걸 알아차리고 전대장에게 알린 것이다.
“시모쥬쿠! 그 멍청한 놈이 야인에게 당한 거구만!”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무능한 놈! 주둥이만 나불거리더니……. 부관! 현장으로 정찰선을 파견하라!”
호케츠 타마후미는 타나미함장 시모쥬쿠 타이헤이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그래도 최소한 성가신 모기 역할은 할 거라 봤는데, 그것도 못한 거다.
그래도 분노만 할 수 없는 일. 교전이 벌어졌을 거로 예상되는 해역에 정찰선을 보내 자세한 정보를 파악하려 했다.
“전대장님, 타나미함이 당했다면, 금나라 선박의 항로가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야인 놈들이 우리가 있다는 걸 눈치챘다는 말인가?”
“그렇게 봐야 합니다. 금나라 상단은 충분한 무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운텐항을 도망치듯이 빠져나왔습니다. 우리 전대의 존재를 모르고 했다면, 해괴한 짓입니다.”
“하긴 그래……. 호전적인 야인 놈들이 약한 상대를 보고 도주하는 게 이상한 일이지. 그러면 누가 정보를 흘렸다는 건데…….”
부관은 3전대장과 참모들이 인지하지 못한 사실을 지적했다. 아이신 상단이 전투함 7척으로 구성된 3전대의 출현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
호케츠 타마후미는 부관의 가설에 타당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정보를 흘린 반역자를 현재로선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지금은 대응에 집중해야 한다고 봅니다.”
“좋아. 그렇다고 치지.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지?”
“두 가지 방안이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우리 전대 전체가 사고 해역으로 이동하는 겁니다. 다른 방안은 전대를 둘로 나누는 것입니다.”
부관은 현재 3전대가 서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7척 전부를 교전이 예상되는 지점으로 이동시키거나, 일부를 이동시켜야 한다고 여긴 것.
“아니! 둘로 나누는 거로 부족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