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29장. 류큐 해전
1.
2023년 1월 5일 오전 7시, 류큐 운텐항 인근 해역을 감시하던 츠네가 중무장한 함선을 발견했다.
“해적선인가?”
“아닙니다. 시마즈 가몬(가문 문장)이 보입니다. 사쓰마 번 전투함이 분명합니다.”
“해적보다 더 악랄한 놈들이 왔군.”
시마즈는 일본 규슈 지방 토호 세력으로 노략질을 통해 부를 쌓은 악명을 가지고 있다.
임진왜란 때도 해적질을 일삼던 병력을 차출해 조선 남해안에 큰 피해를 줬다. 하지만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함대에 의해 450척에 달하는 전투함이 수장되면서 전력의 90%를 잃어버리는 참패를 당했다.
임진왜란 후 원기 회복을 위해 고심하던 시마즈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참여했다가 또다시 패배해 정치적 입지가 더 줄어들었다.
연이은 패배와 도쿠가와 막부의 견제로 죽어 가던 시마즈가 기사회생한 건 류큐 왕국을 공격해 반식민지로 삼은 이후다.
시마즈의 더러운 역사를 알고 있는 창수는 운텐항을 향해 다가오는 전투함이 결코 좋은 목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대포가 20문입니다. 정면 대결 해도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한 척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류큐와 사쓰마는 빠른 배로 2일 거리야. 전력에서 우리가 절대적으로 불리한 거야.”
“주군의 말씀이 옳습니다. 가능한 한 충돌을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충돌한다면, 신속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바로 그거야. 지금부터 저놈들을 철저히 감시해야 해. 그래야 깔끔한 처리가 가능하니까.”
“알겠습니다, 주군.”
창수의 목적은 사탕수수를 구매해 금나라로 돌아가는 것. 시마즈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돌발적으로 충돌을 일으켜 상행을 위험에 빠트릴 수 없는 일이다.
창수는 시마즈가 어떤 행동을 할지 지켜보기로 했다.
* * *
“사쓰만 번에서 세금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세금이요? 류큐 왕국에 이미 지불한 것 아닌가요?”
“지불했습니다. 사쓰마가 걸고넘어지는 건 사탕수수를 평소보다 3할 싸게 구매한 부분입니다.”
“그거야 판로가 막혀서 가격이 떨어진 거죠. 우리가 강제로 할인받은 게 아니고, 불법을 저지른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당한 방법으로 할인을 받은 겁니다. 하지만 사탕수수 가격이 떨어지면서 사쓰마 번에 돌아가는 수익이 줄어들었습니다. 그걸 변제하라고 강짜를 부리고 있는 겁니다.”
예감이 맞았다. 시마즈가 시비를 걸어온 것.
류큐 왕국을 점령한 시마즈는 왕국을 공식적으로 흡수하지 않았다. 흡수하면 도쿠가와 막부에 빼앗길 가능성이 크니까.
그 대신 류큐 왕국을 껍데기만 남긴 채 알짜를 빼먹고 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분야가 사탕수수.
사탕수수 판매 금액의 80%가 시마즈의 호주머니로 들어간다. 수요공급의법칙으로 자연스럽게 사탕수수 가격이 30% 떨어졌으나, 시마즈는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거다.
“추가로 요구하는 금액이 얼마인가요?”
“조선 돈으로 945만 환입니다.”
“큰 금액은 아니군요. 하지만 사쓰마 번을 지배하는 시마즈의 성정을 생각하면, 그냥 내줘서는 안 됩니다. 약세를 보이는 상대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자들이니까요.”
시마즈가 벌이는 행각은 해적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시마즈의 본성을 잘 알고 있는 창수는 돈을 주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거라 판단했다.
“돈 요구를 거절하면, 전투가 벌어질 수 있습니다.”
“전투를 대비해야죠. 그리고 사탕수수 선적을 마칠 때까지 시간을 끌어야 합니다.”
“면담을 회피하자는 말씀인가요?”
“아닙니다. 시마즈가 두려워하는 도쿠가와 막부를 들먹이면 됩니다. 시마즈는 류큐에서 사탕수수로 벌어들이는 돈 상당수를 막부에 알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 점을 치고 들어가면,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을 겁니다.”
“그렇군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평행우주를 넘나든 이후, 창수는 틈틈이 양쪽 세계의 역사를 공부하고 있다. 역사가 상당 부분 뒤틀려 있으나, 공통점도 존재하기에 실속 있게 활용할 수 있다.
지금이 바로 그런 상황. 시마즈는 1867년 대정봉환으로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지기 전까지, 류큐에서 생산하는 사탕수수를 사용해 부족한 재원을 충당했다.
평행우주 너머 이곳에는 2023년에도 도쿠가와 막부가 존재한다. 이건 뒤틀린 역사지만, 시마즈는 여전히 류큐의 사탕수수에 빨대 꽂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시마즈가 가진 약점이 될 수 있다.
창수는 터무니없는 강짜를 부리는 시마즈에게 최강의 카운터펀치를 준비했다.
2.
타무는 사쓰마 번의 징세관 우루타 히사요시를 만나, 30% 돈 요구를 거절하며, 이 문제를 막부에 알리겠다고 통보했다.
의기양양하던 우루타 히사요시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면담을 마쳐야 했다.
“함장님, 야인들이 비협조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세금을 못 내겠다고 버티는 거요?”
“버티는 정도가 아닙니다. 추가 세금이 부당하다고 하면서, 막부에 보고해 시시비비를 가리겠다고 합니다.”
“뭐요!? 막부에 알려!?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요! 절대로!”
사쓰마 소속 호위함 타나미의 함장 시모쥬쿠 타이헤이가 경기를 일으키며 발작했다. 아이신 상단이 도쿠가와 막부에 사탕수수 세금 문제를 제기하면, 시마즈의 자금줄이 통째로 날아갈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
“아이신은 금나라 유력 가문입니다. 막부와도 친분이 있습니다. 세금은 없는 것으로 하고, 그냥 넘어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당신도 잘 알지 않소? 주군께 이미 보고했소. 만약 여기서 일을 그르치면, 당신과 나는 할복해야 할 거요.”
현재 시마즈는 심한 재정난에 봉착해 있다. 한 푼이라도 아쉬운 상황에서 금 3,600냥(135kg)에 해당하는 거금을 놓칠 수 없다.
장거리 마법통신을 통해 새로운 재원(?)을 보고받은 당주 시마즈 시게히사는 반드시 재물을 받아 내라고 지시했다.
주군이 직접 내린 명령을 이행하지 못하는 건 죽음을 의미한다.
“일이 잘못 풀리면, 함장님과 제 목숨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중신들께 설명해서 파국을 막아야 합니다.”
“헛소리하지 마시오! 우리가 왜 죽어! 죽을 건 야인 놈들이지!”
“무력을 사용하자는 말씀인가요?”
“애초부터 그렇게 하기로 한 거 아니요? 죽은 놈들이 막부에 고자질할 리도 없고!”
창수의 예상이 맞았다. 시마즈의 졸개들은 아이신 상단이 30%를 내든 안 내든 상관없이 꼬투리를 잡아 공격할 계획을 하고 있었다.
시모쥬쿠 타이헤이는 아이신 상단이 순순히 재물을 내놓지 않고 반격을 가하자, 공격 시점을 앞당기자고 말한 것이다.
“아이신 상단의 책임자가 저와 면담하기 전에 금나라 본점과 연락한 정황이 있습니다. 사탕수수 추가 세금 관련 내용을 본점이 알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 책임자라는 자를 인질로 잡으면 아이신 상단 본점도 어쩌지 못할 거요.”
“제압이 쉽지 않을 겁니다. 아이신 상단이 류큐로 오는 길에 해적을 소탕해 44명을 붙잡았다고 하니까요.”
“그깟 해적 나부랭이가 무슨 대수요?”
“전투함 5척을 가진 해적이었다고 합니다. 우리 힘만으로 무리입니다. 야인의 전투력을 낮잡아 봐서는 안 됩니다.”
운텐항에는 장거리 마법통신을 사용할 수 있는 마탑 지부가 있다. 우루타 히사요시는 타무가 자신을 만나기 전에 마탑 지부에 들렀다는 걸 파악했다.
죽여서 입을 봉하자는 수작이 안 통하는 상황.
게다가 운텐항을 관리하는 치안 책임자를 통해 아이신 상단이 진류방에 완승을 거둔 사실을 알게 됐다.
호위함 타나미로 해적선 5척을 상대하기 버겁다. 그런 해적에 완승을 거둔 아이신 상단을 타나미 하나로 공격하는 건 자살행위와 다를 바 없다.
“흠……. 그러면 어쩔 수 없이 원군을 청할 수밖에 없겠소.”
“아닙니다! 아이신 상단과 충돌을 피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어허! 전투에 관련된 건 내 소관이오! 그리고 주군께 관련 내용을 모두 보고하고, 하명받을 거요! 선을 넘지 마시오!”
“…….”
당주 시마즈 시게히사는 지금 돈에 목말라 있다. 그리고 시마즈 가문의 핏줄을 이어받아 노략질에 거리낌이 없다.
모든 내용을 소상히 보고하면, 사건 봉합이 아니라 함대를 증파해 아이신 상단을 말살하려 들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
우루타 히사요시는 깊은 수렁에 발을 디딘 것 같은 암담함을 느껴야 했다.
* * *
“시마즈 전투함 7척이 나타났습니다. 신시 중간쯤에 교전이 가능한 지역으로 들어올 겁니다.”
“사탕수수 선적을 모두 마치려면, 유시 중간쯤은 돼야 합니다.”
“미시 전까지 출항 준비를 마쳐야 합니다. 나머지 사탕수수는 남겨 둘 수밖에 없습니다.”
1월 7일 오전 10시, 북쪽 해역을 정찰하던 고정익 드론이 시마즈 함대를 발견했다. 함대 이동속도를 볼 때, 오후 4시경에 운텐항 인근에 도착할 것으로 보였다.
창수와 타무는 이 함대가 그들을 공격하려는 목적으로 파견된 것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정면 대결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신속하게 운텐항을 떠나는 것이 유일한 해법이다
문제는 사탕수수 선적 완료 시간이 오후 6시라는 점. 창수는 오후 1시까지 출항 준비를 마쳐야 한다고 말하며, 남겨질 사탕수수를 포기하자고 했다.
“남길 물량이 50만 관이나 됩니다. 우리가 선적하지 않으면 애물단지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손님 3명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에게 처리를 맡기면 될 거라 봅니다.”
“아! 그러면 되겠군요!”
50만 관(1,875톤)을 운텐항에 버리고 떠나면, 항구가 마비 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류큐 왕국의 분노를 사면서 아이신 상단 평판이 추락할 게 불문가지.
타무는 이점을 우려했으나, 창수에게는 대안이 있었다. 아이신 1호에 남아 있는 해적 3인방에게 사탕수수를 넘기는 방법이다.
- 슉슉슉!
- 솨아아!
1월 7일 오후 1시, 아이신 상단 소유 증기화물선 3척이 일제히 운텐항을 떠났다.
- 어! 갑자기 화물선이 떠나고 있어! 어떻게 된 거야!?
- 그러게 말이야. 오후에 작업을 계속한다고 하더니, 그냥 가 버리네.
- 일당은 받아서 손해는 없는데, 저기 남아 있는 사탕수수가 골치네.
오전 선적 작업을 끝마친 건 1시간 전이다. 아이신 상단은 선적 작업을 위해 고용한 인부들에게 하루 일당을 주며, 점심 먹고 오후 작업을 시작한다고 통보했다.
그런데 막상 시간 맞춰 선적 작업 할 부두로 돌아와 보니 증기화물선이 떠나고 있었다. 인부들은 삼삼오오 모여 황당한 심정을 토로했다.
- 짝! 짝!
“다들 주목하시오! 아이신 상단은 사탕수수를 팔고 떠났소! 여기 있는 사탕수수는 야적장으로 옮길 거요! 그게 오후 작업이오!”
그러나 혼란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탕수수 소유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오후 작업을 시켰기 때문이다.
일부 인부는 작업이 끝났다고 떠났지만, 대부분은 군말 없이 작업 지시를 따랐다. 오후 일당을 추가로 준다고 하니, 마다할 이유가 없던 것.
* * *
“함장님! 아이신 상단 화물선들이 항구를 떠나고 있습니다!”
“칙쇼! 교활한 놈들! 우리 눈을 속이고 도주해! 당장 추격해! 어서!”
남겨진 사탕수수와 인부들은 무리 없이 처리됐지만, 지원군을 기다리고 있던 시마즈 호위함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부두에 쌓여 있는 사탕수수에 현혹돼, 아이신 상단의 출항을 막지 못한 것이다.
타나미함장 시모쥬쿠 타이헤이는 뒤통수가 얼얼해지는 느낌을 받으며, 추격 명령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