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28장. 남쪽 바다를 뚫어라
6.
“대인! 살려 주십시오!”
“살려 달라고? 네놈들 노략질로 죽은 사람들의 원혼이 구천을 떠도는데 살려 줘!? 헛소리하지 마!”
“참회할 기회를 주십시오! 살려 주시면, 평생 속죄하면서 살겠습니다!”
고통스럽게 죽는 거나, 죽을 때까지 맞는 거나, 어차피 죽는 건데 무엇을 선택하라는 말인가?
게다가 죽일 거면 선택권을 주지도 않았을 거다. 조울증이 심한 해적 두목 곁에서 시중들며 눈치를 키운 해적들은 창수가 자신들을 떠보는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바닥에 바짝 엎드려 목숨을 구걸했다.
“참회? 거짓을 일삼는 놈들이 참회할 거라고?”
“아닙니다! 저희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도 거짓이다! 네놈들이 두목 놈 측근이라는 거 내가 모를 것 같아?”
“그……. 그것…….”
“정체를 숨기는 음흉한 놈들이 퍽이나 참회하고 살겠다! 풀려나면 곧바로 해적질이나 하겠지!”
“대인, 오해이십니다! 우리가 바닷물에 빠졌다가 살아나 경황이 없어 말씀드리지 못한 겁니다! 절대로 대인을 속일 마음이 없었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거짓말을 잘도 한다. 그리고 연기력이 단순히 출연만 하는 단역 배우보다 몇 수 위다. 최소한 대사는 막히지 않고 술술 떠벌릴 정도는 되니까.
해적들은 창수가 특별한 지위에 있는 자들을 찾는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끝까지 두목과의 연관성을 숨기려 했다. 드러나면 지금처럼 궁지에 몰릴 거라고 예상한 것.
하지만 창수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어떻게 알아낸 건지 모르지만, 해적들이 두목의 최측근이라는 걸 정확히 알아낸 것이다.
그들은 창수가 사실을 간파하자, 속으로 소스라치게 놀라면서도 바다에 빠진 걸 핑계 삼아 위기를 넘기려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것이 거짓 연기에 도움이 됐다는 점.
“오해라고? 좋아, 내가 오해한 건지, 네놈들이 거짓말하는 건지 시험해 보마.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니, 내 물음에 진실을 말해야 할 거야. 아니면 사지가 절단돼 죽을 거니까.”
“감사합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실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창수는 말 몇 마디로 해적들을 사지로 몰아붙였다. 츠네는 날이 시퍼렇게 선 칼을 해적들이 볼 수 있도록 아래로 내리며, 창수의 말이 허풍이 아니라 걸 알려 줬다.
창수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처참하게 죽을 상황. 해적들은 떨리는 심정으로 창수의 질문을 기다려야 했다.
“네놈들은 누구의 사주를 받고 바닷길을 막고 있던 건가?”
“창사표국입니다! 총표두가 은자 5만 냥을 주고, 상선을 노략질하라고 했습니다!”
“창사표국? 국주가 누구지?”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두목 말로는 웨이텐이 녹림과 거래하기 위해 만든 표국이라고 합니다!”
웨이텐은 명나라 강남에서 황제 못지않은 권세를 누리고 있는 거상이다. 소금과 철을 독점하고 장강을 통해 수송과 판매를 하고 있다.
상하이가 장강 하구에 위치한다는 걸 고려하면, 해적이 웨이텐과 관련됐다는 말에 신빙성이 있다.
게다가 은자 5만 냥은 한국 돈으로 130억 원이 넘는 금액이다. 돈을 위해 인명을 살상하는 해적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일 터.
- 슥!
창수는 타무가 해적의 대답을 어떻게 판단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살짝 고개를 돌려 응시했다. 거짓을 일삼는 해적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어 확인에 들어간 것.
- 끄덕!
타무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해적의 말이 이번에는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 촤라락!
“고개를 들고 이 해도를 봐라. 해도에 표시된 것이 무엇을 나타내는 건가?”
첫 질문은 찔러보는 용도였는데, 생각보다 고급 정보를 얻게 됐다. 창수는 미끼성 질문을 2~3개 더 던지려던 계획을 수정하고, 곧바로 핵심 사안으로 들어갔다.
“해룡방의 이동 범위입니다! 저희 진류방의 이동과 겹치지 않도록 표시한 겁니다!”
“해룡방은 어떤 놈들이지?”
“제가 본 적이 없어 잘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해룡방이 은자 20만 냥을 받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전투함 5척으로 구성된 진류방보다 해룡방이 4배 많은 은자를 받았다. 이건 해룡방 전력이 진류방보다 월등히 강하다는 걸 의미한다.
“해룡방이 전열함을 가지고 있는 놈들인가?”
“죄송합니다! 그건 알지 못합니다!”
“해룡방 이외에 다른 해적 놈들이 있는 건가?”
“두목이 신경 쓴 건 해룡방뿐입니다! 다른 방파가 더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좋아. 1차 시험은 통과했다.”
“감사합니다! 대인!”
“너무 좋아하지 마. 2차 시험이 있으니까.”
“예? 2차 시험이라면…….”
“자백마법을 사용할 거다. 고통이 따르겠지만, 통과하면 너희 3명은 자유로운 몸이 될 거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 말이 거짓이라면, 너희들은 끔찍한 고통을 받으며 죽을 거다.”
해적들이 사실을 말한 건지 거짓말을 했는지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창수가 뽑아낼 정보를 명확히 인식한 건 분명하다. 자백마법 발동 조건이 충족된 것.
창수는 자백마법스크롤을 꺼내 가장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해적에게 사용했다. 그리고 결과는 해적들의 진술이 사실인 것으로 판명됐다.
정보를 얻기 위해 투자한 시간이 확실한 성과물을 만든 것이다.
* * *
원하는 정보를 얻어 낸 창수는 해적선에 폭약을 설치하고 터트려 모두 침몰시켰다. 사로잡은 해적들은 증기화물선 3척에 분산 수용한 뒤 상행을 재개했다.
“타무 님, 서쪽으로 50km 떨어진 위치에 전열함이 있습니다.”
해룡방이 동중국해에서 류큐와 포모사로 가는 길목을 동시에 가로막고 있다는 걸 파악한 아이신 상단은 증기화물선을 일본 쪽으로 이동시켰다.
창수는 정찰 반경이 100km에 달하는 수직이착륙 고정익 드론을 사용해 해룡방 위치 파악에 나섰다.
그리고 류큐 북서쪽 250km 지점에서 바닷길을 막고 있는 전열함을 발견하게 됐다.
“해룡방이 전열함을 가지고 있는 거군요.”
“다른 해적들 활동이 감지되지 않는 걸 보면, 그렇게 봐야 할 겁니다. 선단 규모가 확인된 것만 6척인 걸 생각하면, 은자 20만 냥을 받았다는 것도 타당한 말입니다.”
고정익 드론이 보내온 화면에 거대한 크기를 가진 전열함 이외에 전투함 5척이 함께 보였다. 창사표국이 해룡방에 비용을 진류방보다 4배 더 지불한 것이 이해가 간다.
“우리가 제대로 우회하고 있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해적들이 준 정보가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해적들에게 정보를 뽑아낸 건 김창수 님의 공입니다. 덕분에 한고비 넘긴 것 같습니다.”
“타무 님과 츠네의 공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리고 아이신 상단 병력의 출중한 전투력도 빼놓을 수 없죠.”
현재 위치에서 정남쪽으로 내려가면, 하루 만에 목적지 류큐에 도착하게 된다. 중간에 진류방과 전투를 벌이고, 일본 쪽으로 우회하는 바람에 예상보다 2일이 더 걸렸지만, 아무런 피해 없이 류큐에 도착하면 성공적인 항해라 부르기 충분하다.
타무는 창수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며 칭송했고, 창수는 전투에 참여한 모두에게 공적이 있다고 화답했다.
확실한 공적과 훈훈한 덕담. 창수와 타무가 서로에게 느끼는 신뢰도가 급상승하고 있다.
7.
2023년 1월 3일, 창수 일행은 금나라 잉커우항을 떠난 지 11일 만에 류큐의 관문 운텐항에 도착했다.
“배에만 머무르신다니 제가 죄송하네요.”
“아닙니다. 저와 츠네는 여기서 할 일이 있고, 타무 님은 외부에서 할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는 거죠. 괘념하지 마십시오.”
필수 인력만 증기화물선에 남겨 두고, 타무와 아이신 상단 인원 대부분이 배에서 내릴 예정이다.
사탕수수 가격을 알아보고, 해적 44명을 류큐 관청에 넘기는 등 뭍에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창수와 츠네는 아이신 1호에 남아 정찰을 계속할 계획이다. 전열함을 보유하고 있는 해룡방이 운텐항을 봉쇄할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
게다가 류큐 왕국에 일본 세력이 침투해 있을 가능성이 크기에 외부활동을 자제해야 한다.
“그래도 우리 상단만 육지 숙소에서 쉰다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하하하. 염려 마시고 편하게 다녀오십시오. 저도 준비한 것이 있어서 여기서 편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정 마음이 불편하시면, 돌아올 때 류큐 전통 음식을 가지고 오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소문난 음식점 돌아다니며, 최대한 많이 가지고 오겠습니다.”
증기화물선이 비교적 넓은 공간을 가지고 있으나, 배에서 생활하는 건 매우 불편한 일이다.
아이신 상단뿐만 아니라, 상행에 나선 대부분의 상단이 배에 소수 인원만 남기고, 항구 인근 숙소에서 머문다.
그러나 창수는 집 못지않게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첨단 야영 장비를 가지고 있다.
넓은 공간을 차지하기에 그동안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을 아이신 상단 인원이 항구로 이동하면서 이용할 기회가 온 거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류큐의 토속 음식을 먹지 못한다는 것이었으나, 타무가 맛집 탐방 후 조달해 준다고 하니, 그것도 해결.
창수와 타무는 각자의 계획을 가지고 잠시 헤어졌다.
* * *
“사탕수수 가격이 예년에 비해 3할 떨어졌습니다.”
“해적들이 무역 통로를 막아서 그런 건가요?”
“맞습니다. 류큐에서 생산된 사탕수수 절반이 지나가는 길이 막혀 가격이 떨어진 겁니다. 그리고 류큐 왕국이 우리에게 매우 호의적입니다. 골치 아픈 해적을 처리해 준 대가로 항만 시설 사용 우선권을 준다고 합니다.”
배에서 내린 뒤 다음 날 타무가 맛있는 음식과 함께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다.
첫 번째 소식은 사탕수수를 30% 할인된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다는 것. 이건 할인뿐만 아니라 물량을 손쉽게 구할 수 있다는 걸 나타낸다.
두 번째 소식은 류큐 왕국이 창수 일행에게 호의적이고, 해적에게 매우 적대적이라는 것.
류큐에서 뒤통수 맞을 가능성이 대폭 낮아졌다.
“류큐 왕국에서 지원해 주니 사탕수수 선적이 빨라지겠군요.”
“그렇습니다. 4일이면 화물선 3척에 사탕수수를 가득 채울 수 있습니다. 최소 3일은 번 거죠. 지체됐던 일정을 일시에 만회하게 됐습니다.”
“모든 일이 순조롭군요. 그래도 일정을 늦춰서는 안 됩니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요.”
“저도 김창수 님의 생각과 같습니다. 우리 아이신 상단 인원들도 같은 생각을 할 거라 봅니다.”
평온해 보이지만, 이 평화가 얼마나 오래갈지 알 수 없다. 창수 일행이 운텐항에 도착한 사실이 해적들 귀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기에.
보안을 위해 풀어 주기로 약속한 해적 3명을 아이신 1호에 머물게 하고 있다. 그들은 창수 일행이 류큐를 떠날 때, 자유를 찾게 될 거다.
아이신 상단 인원들에게도 최대한 보안을 유지하라고 당부했으나, 오랜만에 금나라에서 온 증기화물선의 등장을 가리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미 운텐항에 창수 일행에 대한 소문이 항구를 중심으로 빠르게 퍼지고 있다.
그 소문이 웨이텐과 해룡방 귀에 들어가기 전에 류큐를 떠나야 한다.
* * *
“주군! 전투함이 다가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