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28장. 남쪽 바다를 뚫어라
5.
“2호선은 검은 깃발을 단 해적선만 공격한다! 3호선은 해골 표시 해적선을 집중 공격하라!”
타무는 창수의 조언에 따라, 초탄에 맞히지 못한 해적선 2척에 포탄 8발씩을 발사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포탄 한 발을 타격한 해적선에 포탄 4발을 발사하고, 포탄 두 발을 타격한 나머지 2척에 각각 포탄 2발씩을 발사하라고 명령했다.
화력을 집중하면서도 해적선 전부를 커버하는 합리적인 지시에 아이신 상단 병력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다.
- 꽝! 꽝! 꽝!
- 슝! 슝! 슝!
초탄 발사한 뒤 1분 30초 만에 2차 공격이 시작됐다. 해적선을 향해 날아가는 포탄은 모두 24발. 이건 아이신 상단 포병의 숙련도가 매우 높다는 걸 나타낸다.
반면, 해적들은 아직까지 단 한 발의 반격도 하지 못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해적들도 기습당하니 별수 없군.’
초탄에 피격당한 해적선 3척은 물론이고, 피해를 입지 않은 2척도 신속한 반응을 하지 못했다. 전투에 이골이 난 전문가(?)답지 않은 모습.
예상하지 못한 전투 양상에 해적들이 낯선 공포와 생경함을 느낀 것이리라.
그 와중에 일부 정신 차린 해적이 아이신 상단 증기화물선에 대응 사격 하기 위해 대포를 이동했으나, 정위치로 가져가는 것도 버거웠다.
아이신 상단에서 2차 포격을 시작한 순간까지 위치를 잡고 장전에 들어간 해적선 대포가 4문에 불과했고, 장전을 마친 대포는 단 하나도 없었다.
정찰 드론을 활용한 기습이 기대 이상의 효과를 만든 것이다.
- 쾅! 쾅!
- 콰쾅! 콰쾅!
“꾸아악!”
“으아악!”
그리고 기습에 대비하지 못해 발생한 연쇄 효과는 처참했다.
초탄 발사로 영점을 잡은 아이신 상단 대포의 명중률이 2차 포격에서 급격히 상승한 것. 24발 포탄 중 14발이 해적선을 강타했다. 명중률 53.8%.
해적선 5척 모두 포탄에 맞았고, 해적들은 아비규환에 빠졌다. 이제 해적들이 아이신 상단에 반격할 가능성은 0%에 가깝게 떨어졌다.
“두목! 탈출해야 합니다!”
“젠장! 어디서 튀어나온 놈들이야!?”
“대형 화물선입니다! 갑자기 튀어나온 게 아니라, 우리가 경계에 실패한 겁니다!”
“개돼지보다 못한 놈들! 내가 그렇게 경계를 소홀히 말라고 경고했건만! 감히 농땡이를 부려! 이놈들! 쳐 죽여야 해!”
“처벌은 나중 일입니다! 일단 살고 봐야죠!”
“빌어먹을! 알았다! 퇴각 신호 보내!”
- 뿌! 뿌우! 뿌!
- 타다닥! 후다닥!
해적단 부두목이 퇴각 나팔을 불자, 해적들이 살길을 찾아 사력을 다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지러운 해적선이 더 깊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 크윽! 이봐, 나 좀 부축해 줘!
- 다리를 움직일 수 없어! 도와줘! 버리지 마! 제발!
- 이놈들아! 의리 없이 너희만 도망가냐!?
살려 달라고, 버리지 말라고 아우성치는 부상자들. 몰골이 비참하고 처량하다.
일부 동료애가 있는 해적이 부상당한 동료를 도왔으나, 대부분 도움 요청을 뿌리치고 자기 살길을 찾아갔다. 죽음의 위기 앞에서 본성이 나온 것.
- 통! 통! 통!
- 슈우욱!
아비규환을 뚫고 소형정에 올라탄 해적들이 사지에서 탈출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타고 있던 해적선에 대한 미련이 눈곱만치도 없는 듯 보였다.
“타무 님, 해적들이 도주하고 있습니다. 추적해야 하지 않을까요?”
추격전을 벌여 도주하는 적을 처단하는 것이 전술의 기본이다.
물론, 함정에 걸릴 수 있으나, 주변 해역을 철저히 감시하고 있다. 위협이 될 만한 것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추격전을 펼치는 것이 당연하다.
“추격은 어렵습니다. 우리 배로 고속정을 따라잡을 수 없으니까요.”
“흠……. 그렇다면 포격이라도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명중률이 떨어지더라도, 쫓긴다는 느낌 자체로 해적들에게 공포가 각인될 수 있습니다.”
증기화물선 속도로 소형 고속정을 따라잡는 건 불가능한 일. 아이신 상단은 해적이 소형정을 타고 도주하면, 추격을 안 하는 건 물론이고, 전투 자체를 중지한다.
대포로 소형정을 맞히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성과 없이 포격을 지속하다가 안전사고가 날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포탄과 화약 자체가 만만치 않게 비싸기에 전투를 중단하는 거다.
하지만 창수의 판단은 달랐다.
“해적들이 다른 선박을 구해서 우리가 돌아오는 길목을 막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해적들 배후에 명나라 거상이 있다면, 해적선을 추가로 마련하는 건 문제가 아닐 겁니다. 지금 해적들에게 죽음의 공포를 심어 주면, 다음번 전투를 유리하게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아! 그렇겠군요! 알겠습니다! 즉시 포격을 실시하겠습니다!”
평상시라면 아이신 상단의 전투 방법이 옳다. 그러나 지금 창수 일행은 류큐로 이동한 뒤 사탕수수를 싣고 금나라로 되돌아와야 한다.
다시 조우할 가능성이 있는 적에게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최대한 피해를 주는 것이 미래를 대비하는 현명한 선택이다.
타무는 창수가 말하는 진의를 알아듣고 해적들이 탑승한 소형정에 포격을 가하라고 지시했다.
- 쾅! 쾅! 쾅!
- 풍덩! 풍덩! 풍덩!
“지독한 놈들! 얼마나 쏴 대는 거야!?”
“아예 작정한 것 같습니다! 빨리 사거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증기화물선이 느리지만, 전속력으로 쫓아오자 소형정이 거리를 벌리는 속도가 늦어졌다.
벌써 3차례 포격을 받았고, 소형정 한 척이 포탄에 맞아 침몰했다. 명중률이 매우 낮지만, 근접해서 날아오는 포탄에 죽음을 느끼고 있다.
“그걸 누가 몰라!? 짜증나게 뻔한 소리 하지 말라고!”
“재물이 든 상자들을 바다에 던지세요! 무게가 줄면 속도가 올라갈 겁니다!”
해적 두목이 타고 있는 소형정에는 노략질로 긁어모은 금은보석과 골동품이 실려 있다. 도주하는 와중에도 부하들을 동원해 재물을 챙긴 것.
두목이 탄 소형정은 다른 소형정보다 무게가 150kg이 더 나가 속도가 느렸다. 더구나 재물을 챙기려고 시간을 지체했기에, 도주하는 소형정 행렬에서 후미로 처지고 있다.
아이신 상단의 집중 포격 대상이 된 상태.
소형정 조타 핸들을 잡은 부두목은 이대로 가다가 포탄에 피격당할 가능성이 높다 생각하고, 두목에게 재물을 버리라고 종용했다.
“보물을 버리라고!? 말도 안 되는 개소리하지 마!”
“두목! 일단 살아남는 게 우선입니다! 욕심을 버리세요! 이러다간 모두 죽습니다!”
“안 돼! 절대로 못 버려! 무게만 줄이면 되는 것 아니야!?”
- 훅!
- 풍덩!
“두……. 두목님! 왜 이러세요!?”
“너희들은 천천히 헤엄쳐 와!”
“두목님! 제발…….”
- 풍덩!
- 풍덩!
해적단 두목은 소형정에 타고 있던 해적 3명을 바다로 밀어 버렸다. 재물을 버리는 대신 부하를 버린 것이다.
이제 소형정에 남은 건 두목과 부두목 그리고 재물이 가득 담긴 상자 3개뿐.
“두목! 무슨 짓입니까!? 부하를 버리다니요!?”
“시끄러워! 무게가 줄어서 속도가 빨라지고 있잖아! 우리는 이제 살게 된 거야!”
“그래도 이건 아닙니다! 돌아가서 부하들을 구해야 합니다!”
“헛소리 말고! 조종이나 똑바로 해! 계속 주절거리면, 너도 바다에 처넣어 버릴 거니까! 알아들어!?”
“두목…….”
소형정에 실은 금은보화와 골동품은 수년간 목숨을 걸고 해적질해서 모은 것이다.
죽는 한이 있어도 버릴 수 없는 보물.
언제든지 끌어모을 수 있는 부하 3명을 희생해서 보물을 지킬 수 있다면, 백만 배 남는 장사다.
재물에 눈이 돌아간 두목은 서슴없이 부하를 버렸다. 부두목이 성심을 다해 두목의 마음을 돌리려 했으나, 소용없는 일.
자칫 자기 목숨도 위험한 상황에서 부두목은 말을 아껴야 했다.
* * *
“김창수 님, 해적선과 해적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해적선 내부를 살피고, 해적들을 사로잡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지 않을까요? 가능한 한 빨리 이 지역을 벗어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타무가 지휘하는 병력은 정규군 못지않은 강군이다. 그러나 이 병력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적의 공격에서 상단을 방어하는 것.
전투가 종결됐다면, 상행을 속개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시간이 소비되더라도 감수해야 합니다. 작은 정보라도 건지면 우리에게 더 유리하니까요. 적의 의도를 알면 대처가 쉬워집니다. 그리고 도주한 해적들이 패거리를 끌어오는 건 정찰로 대비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정보 파악이 우선이죠.”
타무가 이번 전투에서 배운 교훈은 ‘정보가 승패를 좌우한다’라는 것이다.
만약 창수가 정찰 드론을 사용해 해적들의 위치를 사전에 파악하지 못했다면, 지금처럼 깔끔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을 거다.
아이신 상단은 부상자와 선체 파손은커녕 포탄 한 발, 총탄 한 발도 맞지 않았다.
정확한 전장 정보를 사전에 파악한 뒤, 원하는 방식으로 전투를 벌인 것이 완벽한 승리의 원인.
타무는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시간을 소비하자는 창수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 촤르륵!
“역시, 이 해도에도 표시가 있군요. 해적들이 무언가 꾸미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어 답답합니다.”
해적선 5척 중 한 척은 포탄에 맞아 침몰했고, 다른 한 척은 선실이 대파돼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다.
나머지 3척에서 해도를 확보했는데, 공교롭게도 3장 모두 유사한 표시가 돼 있었다. 해적들의 집단행동을 나타내는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해독이 어려운 상황.
“주군, 어쩌면 저 표시 내용을 알려 줄 해적이 있을 듯합니다.”
“응? 해적 놈들이 모두 입 다물고 있지 않나? 자백마법도 안 통하고.”
창수와 타무의 대화를 듣고 있던 츠네가 한 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 사로잡은 해적에게서 정보를 빼내자는 것.
그러나 이미 시도한 일이다. 해적 47명을 붙잡았으나, 누구 하나 정보를 털어놓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마법스크롤을 사용해 자백을 받아 내려 했지만, 3장 사용하고 그만뒀다. 대부분 지위가 낮은 잡부급 해적이라 중요한 내용을 알지 못한 것.
게다가 중간 관리자급으로 보이는 해적이 보이기에 마법스크롤을 2장 더 사용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도주하는 배에서 밀려나 바다에 빠진 해적들 있지 않습니까?”
“어, 알지. 동료에게 배신당한 불쌍한 놈들.”
“해적들 대화를 감청해 보니, 해적 3명을 밀어낸 놈이 두목이었다고 합니다. 재물이 들어 있는 상자를 지키기 위해, 수발을 들던 부하들을 버렸다고 합니다. 그자들 지위가 낮아도 두목 측근이라면, 해도에 나타난 표시를 알 수 있을 겁니다.”
“옳거니! 츠네! 당장 3명 이리로 끌고 와! 두드려 패든지 마법을 쓰든지 정보를 뽑아낼 거니까!”
“알겠습니다! 주군!”
지금 창수의 심기가 좋지 않다. 무려 4서클 마법이 담긴 마법스크롤을 5장이나 사용하고도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폭발 직전에 놓였던 창수는 두목에게 버림받은 해적 3명에게 분노를 풀 생각이다.
조금 전까지 그들에게 가졌던 연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고.
* * *
- 휘청!
끌려온 해적 3명은 매우 지쳐 보였다. 바다에 빠져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한동안 헤엄친 것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타격을 준 것.
게다가 믿었던 두목에게 버림받았다는 상실감이 그들을 더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어이! 해적 놈들! 고통스럽게 죽을래? 죽을 때까지 맞고 죽을래? 선택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