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28장. 남쪽 바다를 뚫어라
3.
“명나라 상단에서 사탕수수 가격을 10배나 올리더군요.”
“음……. 엄청난 가격입니다. 가격을 올리는 이유가 뭐라고 하던가요?”
“사탕수수 주산지가 강남인데 올해 작황이 좋지 않아 명나라에서 소모할 양도 부족하다고 말했습니다.”
“사탕수수 수확량이 5할 이상 준 건가요?”
농산물은 가격탄력성이 낮다. 수확량이 급감할 때, 가격이 치솟는 건 납득할 수 있는 일.
만약 명나라 사탕수수 수확량이 대폭 줄어든 것이 사실이라면, 10배 가격도 고려해 봐야 한다.
“아닙니다. 수확량은 줄지 않았습니다. 명나라 거상들이 담합해서 사탕수수를 매점매석해 억지로 가격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런다 해도 명나라 사탕수수 가격은 전년에 비해 2배 오른 정도입니다. 명나라 상단은 거기에 만족 못 하고 10배까지 부르고 있는 겁니다.”
“시장 교란도 모자라 어마어마한 폭리를 취하려는 거군요. 그런 거래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이런 터무니없는 폭리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상인이 가능한 한 높은 이윤을 추구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리라. 그러나 동시에 상도의를 생각해야 한다.
매점매석과 가격 담합으로 정상가격의 10배를 부른 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진상 짓이다.
사실 사탕수수를 10배 가격에 매입한다고 해도, 개량된 암브로시아를 판매하면, 막대한 수익을 올릴 수 있다. 하지만 창수는 명나라 상단의 저열한 장난질에 장단 맞출 생각이 없다.
“그런데 공교롭군요. 명나라 상단이 강짜를 부리는 걸 마치 해적이 돕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점을 지적하는 상단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해적의 정체가 명나라 거상의 사병이라는 주장이 힘을 받고 있습니다.”
명나라 상단의 진상 짓은 류큐와 포모사 상행이 정상적으로 가동하면, 멍청한 뻘짓에 불과하다.
그러나 전열함을 보유한 해적이 남쪽 항로를 가로막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정말 사탕수수가 급한 상단이 울며 겨자 먹기로 명나라 상단의 터무니없는 요구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전열함을 소유한 명나라 거상이 사탕수수 가격 폭등을 위해 일을 꾸민 거라면, 황당해 보이는 일련의 사건이 그림을 갖추게 된다.
“해적들이 사용하는 전열함이 범선인가요? 아니면 증기선인가요?”
“증기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처리할 수 있습니다.”
“예!? 1급 전열함을요? 함대를 동원하기 전까지 격퇴가 불가합니다!”
전열함에도 등급이 있다. 함포 50문~80문을 가진 전투함을 3급 전열함이라 부른다. 함포 80문~100문 미만을 2급 전열함. 그리고 함포를 100문 이상 보유한 전투함을 1급 전열함이라 부른다.
해적들이 사용하는 전투함은 함포 104개를 장착하고 있다. 게다가 나무로 만들어진 범선이 아니라, 강철로 만들어진 증기선이다.
약소국가 해군이 전력을 다해도 격퇴한다는 보장이 없는 괴물.
타무는 창수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지만, 이번에는 자신감이 과도하다고 생각했다.
“이걸 보시면, 제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될 겁니다.”
- 척!
“이……. 이건…….”
창수는 타무가 자기 말을 믿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실망하거나 언짢아하지 않았다. 타무의 반응이 당연한 거니까.
그 대신 창수는 마법자루를 열고 무언가를 보여 줬다.
그리고 동그랗게 커지는 타무의 눈.
4.
- 뿌웅! 뿌붕!
- 슉슉슉!
12월 23일 금요일, 잉커우 항구에서 대형 증기화물선 3척이 남쪽을 향해 출항했다.
“화물선 규모가 대단합니다. 실제로 타 보니 웅장하군요.”
“아이신 1호는 화물 300백만 관을 나를 수 있습니다. 금나라에서는 가장 큰 화물선이죠.”
“아이신 상단은 이런 화물선을 몇 척 가지고 있나요?”
“3척입니다. 이번 상행을 위해 전부 투입했습니다.”
300백만 관은 11,250톤이다. 핸디 사이즈 벌크선 화물 운반량이 1만 톤에서 4만 톤이기에 대형이라고 할 수 없으나, 평행우주 금나라에서는 초대형 화물선이다.
타무는 사탕수수 수송을 위해 아이신 상단의 핵심 전력을 모두 투입했다. 이건 상단에서의 자신의 입지를 추락시킬 수 있는 모험이다.
“대포가 8문이군요. 3척을 합하면 24문이니, 전투 선단이라 불러도 될 듯합니다.”
“우리 상단은 상행에 최소 대포 15문을 배치합니다. 그 정도는 돼야 해적들의 공격을 막을 수 있으니까요.”
“대포 성능은 어떤가요? 해적들이 가지고 있는 것과 비슷한가요?”
“일반 해적인 가지고 있는 대포보다 좋습니다. 하지만 전열함에 배치된 대포보다는 조금 못할 겁니다.”
“사거리가 10리 정도 되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해적 전열함과 전투를 벌인다면, 우리가 2리를 더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아이신 상단의 증기화물선은 ‘무장상선’이다. 해적이 출몰하는 수역을 빈번히 지나야 하기에 자체적으로 무력을 갖춘 것.
적이 10리(4km) 안으로 들어오면 대포로 타격을 가하고, 가까이 접근하면 소총을 사용한다.
전투에 특화된 여진족답게 과하다 싶을 정도로 무장이 충실하고, 선원들 훈련도 정규군 못지않게 잘돼 있다.
증기화물선 3대가 연계만 잘하면, 웬만한 해적은 모두 물리칠 수 있을 정도로 전력이 강하다.
그러나 상대가 대포 104문을 가진 1급 전열함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전열함이 12리(4.8km) 거리에서 포격을 시작하면, 포탄을 뚫고 800m를 전진해야 반격할 수 있다.
대포의 숫자가 상대적으로 적은 상황에서 선공을 당해야 하기에, 전투가 벌어지면 매우 불리하다.
“날틀을 사용하면 해적의 위치를 먼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상황이 불리해 보이면 우회할 수 있고, 전투가 벌어지면 사각으로 들어가 우리가 먼저 공격할 수 있을 겁니다.”
“정찰은 우리가 확실히 앞서죠. 김창수 님만 믿겠습니다.”
창수는 3종류의 정찰 드론을 가지고 있다. 기존 초소형 벌새 드론과 40km 범위를 감시할 수 있는 정찰 드론 이외에, 이번에 100km를 커버할 수 있는 신형 드론을 구매했다.
‘수직이착륙 고정익’ 형태를 가진 이 드론은 이륙과 착륙을 일반 드론처럼 하지만, 비행기 형태를 가지고 있어 이륙 후 빠른 이동이 가능하다.
감시 장비도 훌륭해 광학 감시 장비와 열 감지 장비는 물론이고, 레이저 감시 장치도 장착하고 있다.
한 대 가격이 500만 달러에 달하는 고가지만, 돈값을 하는 장비. 화력이 상대적으로 뒤진 상태에서 역전을 가능케 하는 게임 체인저가 될 것이 분명하다.
* * *
“주군, 40km 전방에 해적 선단이 발견됐습니다.”
“전열함이 포함된 거야?”
“아닙니다. 전형적인 해적선입니다. 모두 5척이고 대포는 총 30문 정도로 파악됩니다. 영상을 보십시오.”
창수 일행이 탑승한 아이신 1호가 상하이 인근에 접근할 무렵 고정익 드론이 신호를 보냈다.
인공지능을 탑재한 고정익 드론은 지정된 경로를 이동하면서,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물체가 보이면, 자동으로 보고하도록 만들어졌다.
통제장치를 가지고 있던 츠네는 고정익 드론이 보내오는 영상을 확인한 뒤 창수에게 보고를 올린 것이다.
영상에 나타난 건 전열함을 가진 해적이 아니라, 일반적인 해적.
“타무 님, 어떻게 할까요?”
“저 정도는 우리 상단 힘으로 충분히 처리할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준비하신 대로 대응하세요. 츠네와 저는 정찰을 계속하면서 돌발 상황에 대비하겠습니다.”
창수는 해전 경험이 없고 츠네도 작은 배만 상대해 본 경험이 있다. 선단이 맞붙는 대결에 끼어들었다가 도움이 아니라 방해가 될 수 있는 상황.
창수는 정찰에 집중하겠다고 말하며, 해적과의 전투를 타무에게 맡겼다.
- 슈우웅!
- 사아악!
창수와 츠네는 수직이착륙 고정익 드론과 정찰 드론을 총동원해, 해적들의 움직임을 손바닥 보듯이 파악했다.
해적 일부는 노략질한 재물을 감상하며 희희낙락하고 일부는 숨어서 술을 홀짝였다. 경계병이 배치돼 있기는 하지만, 꾸벅꾸벅 졸고 있는 상황.
이 정보를 바탕으로 타무는 증기화물선을 분산시킨 뒤, 3면에서 해적 선단을 포위하는 전술을 실행했다.
“해적들이 아직까지 우리 움직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1리만 더 가면, 대포 사정거리 안입니다.”
“해적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알려 주십시오. 가까이 접근할수록 명중률이 높아집니다.
드론으로 초수평선 정찰을 할 수 있는 창수 일행과 다르게, 해적들은 지구 곡률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바다에서 수평선의 거리는 4.5km. 배 위의 높이를 4m라고 하면, 수평선의 거리는 대략 7km가 된다.
현재 증기화물선의 위치는 해적들로부터 4.4km 떨어져 있다. 감시를 철저히 한다면, 발견할 수 있는 거리.
하지만 기강이 해이한 해적들은 다가오는 위험을 감지하지 못했다.
타무는 보유한 모든 대포를 함수 쪽으로 이동한 후, 발사 타이밍을 기다렸다.
“해적들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알겠습니다! 김창수 님!”
아이신 1호가 해적 선단으로부터 2km 떨어진 곳까지 접근한 시점에서, 해적들이 허둥대는 모습을 보였다.
어떤 해적은 손가락으로 아이신 1호를 가리키고, 어떤 해적은 아이신 3호를 가리켰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정찰 화면에 나타나는 해적들의 표정을 보아 경악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모두 지정받은 해적선을 조준하라!”
- 척! 척! 척!
타무는 육성과 마법통신구를 통해 선단이 보유한 대포 24문에게 발사 예비 명령을 내렸다.
대포 포수들은 타무의 지시에 따라 각자 할당된 해적선을 조준했다.
“발사하라!”
- 꽝! 꽝! 꽝!
- 슝! 슝! 슝!
타무의 명령에 따라 대포 24문이 일제히 불을 뿜으며 포탄을 발사했다.
- 획! 획! 획!
- 첨벙! 첨벙! 첨벙!
평행우주 너머 세상에서 사용하는 대포의 명중률은 그다지 높지 않다. 더구나 출렁이는 바다에서, 게다가 이동하면서 발사한 대포의 명중률은 육지보다 현저히 떨어졌다.
최대한 가까이 접근해 발사했음에도 포탄 대부분이 해적선을 타격하지 못하고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쾅! 쾅!
- 콰쾅! 콰쾅!
“으아악!”
“쿠아악!”
하지만 모든 포탄이 빗나간 건 아니다. 포탄 24발 중 5발이 해적선 3척에 명중했다.
해적선을 가격한 포탄이 폭발하자 불길과 파편이 날아가면서, 해적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해적 일부는 즉사하고, 일부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명중률이 20.8%에 불과하지만, 기습 공격에 성공한 것이다.
“재장전 실시!”
- 슥슥! 슥슥!
- 척! 척!
타무는 초탄을 발사한 직후, 포탄 재장전 명령을 내렸다. 재장전에 걸리는 시간은 1분 30초에서 2분 사이.
잠시 여유를 가진 타무는 창수에 질문을 던졌다.
“김창수 님, 해적선에 얼마나 타격을 준 건가요?”
“적 1번 함과 4번 함에 포탄 두 발이 명중했습니다. 3번 함에는 한 발이 명중했습니다. 두 번째 발사는 2번 함과 5번 함에 집중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김창수 님이 계시니, 전투에서 지려야 질 수가 없겠군요!”
“하하하. 과찬입니다. 타무 님의 지휘가 뛰어난 거죠.”
생사가 오가는 전장이지만, 창수와 타무는 덕담을 주고받았다.
이것은 자만이 아니고, 강자가 가지는 여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