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28장. 남쪽 바다를 뚫어라
1.
빈민촌 입구에 도착한 증기화물차에서 운전수와 조수 2명이 내리더니, 뒷문을 열고 화물을 하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적재함에서 내려온 화물은 시체를 담을 관이 아니었다.
- 저거 밀가루 포대 아닌가?
- 맞아, 밀가루 포대야.
- 누가 횡재했나? 밀가루를 몇 포대나 주문한 거야?
- 부럽다! 부러워! 저거 가지면 1년은 먹을 수 있겠어!
화물의 정체는 밀가루 포대였다. 운전수가 적재함에서 포대를 내려 주자 땅바닥에 있던 조수들이 만만치 않은 무게를 가진 밀가루 포대를 받아 공터에 쌓았다.
쌓인 포대가 10개를 넘어가면서 빈민촌 주민들의 탄식이 이어졌다. 더도 말고 밀가루 한 포대만이라도 있다면, 굶주린 가족을 상당 기간 먹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 칙칙! 칙칙!
- 척!
밀가루 포대를 싣고 온 증기화물차는 한 대가 아니었다. 화물차 5대가 추가로 왔다. 그중 4대에 밀가루 포대가 담겨 있었고, 나머지 1대에는 건장한 남자들이 가득 차 있었다.
“촌장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어디로 가야 하나요?”
“제가 촌장입니다. 무슨 일로 찾으시나요?”
무리의 책임자인 듯한 남자가 판자촌 입구로 걸어와 주민들에게 촌장의 위치를 물었다.
마침 판자촌 입구에 몰려 있던 주민 사이에 촌장이 있었다. 마을 입구에 낯선 증기화물차들이 몰려오니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고 나와 있던 것.
“마을 주민에게 밀가루를 기증하려고 합니다. 공평하게 배분할 수 있도록 촌장님이 도와주십시오.”
“예!? 밀가루를 공짜로 주신다고요!?”
“그렇습니다. 5인 이하 가구에 한 포대씩 나눠 주고 식구가 많은 가구에 두 포대를 배분할 예정입니다. 가구별 분류가 가능할까요?”
“당연히 할 수 있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무조건 콜. ‘공짜라면 양잿물도 먹는다’라는 말이 있듯이, 무료로 주겠다는데 마다할 사람은 드물다.
게다가 빈민촌 주민들 대부분이 극심한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다. 밀가루를 거저 준다고 하는데 무슨 일이든 못 할까?
“이 집은 4식구입니다.”
- 척!
“이렇게 귀한 식량을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어려울수록 돕고 살아야죠. 그리고 이 비표를 꼭 가지고 계시다가 내일 2차 배급 받으세요.”
“2차요? 밀가루를 또 준다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식구 수에 따라 고기, 채소, 기름, 황탄을 나눠 드릴 겁니다. 비표가 없으면 배급이 안 되니까.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잃어버릴 리가 있나요!?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가족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얼마 만의 고기인가?
1포대에 5,000문(5만 원) 하는 밀가루도 구하지 못해 배를 곯아야 하는 처지에서, 고기는 언감생심. 고기가 헤엄치듯 들어간 국물을 먹어 본 지도 6개월은 지난 것 같다.
그런데 고기를 공짜로 얻을 수 있는 비표를 받았다. 목숨 걸고 지켜야 할 귀물이다.
“이 집은 7식구입니다.”
- 척! 척!
촌장은 마을 주민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배급받으러 온 주민의 가구원 수를 거침없이 알린 것.
촌장의 목소리는 해당 주민도 들을 수 있기에 크로스 체크가 가능한 상황. 그런데도 반발이 없다는 건 촌장의 말이 정확하다는 걸 나타낸다.
자칫 소란이 발생할 수 있는 배급이 유능한 촌장 덕분에 무탈하게 진행됐다.
- 마을 입구에서 밀가루 포대를 공짜로 나눠 준다고 하는데, 정말일까?
- 주기는 주는 것 같더라고. 포대 짊어지고 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 그래? 하지만 밀가루 받고 나중에 몇 배로 토해 내는 거 아닐까?
-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어. 요즘 세상이 얼마나 살벌한데 식량을 공짜로 줘?
빈민촌 사람들 대부분이 밀가루를 나눠 준다는 소식을 듣고 앞을 다퉈 마을 입구 쪽으로 달려갔지만, 그렇지 않은 소수도 있었다.
가난하지만 그나마 입에 풀칠할 정도는 되는 사람들. 그들은 무료로 나눠 주는 밀가루가 악의적인 함정일 가능성이 크다고 여겼다.
이건 그들만의 생각이 아니고 빈민촌 주민 대부분의 생각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은 설령 함정이라도 개의치 않고 밀가루 포대를 받았다.
그나마 잃을 것이 있는 소수가 몸을 사린 것.
왠지 손해 보는 느낌이 들지만, 형편이 나은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공짜의 위험성을 말하며, 자신들의 선택이 옳았다는 걸 이야기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낼 때, 먹고살 만하지만 밀가루 포대를 받은 주민이 다가왔다.
- 이 사람들아, 배급 안 받고 뭐 해?
- 후환이 두려워서 어디 받겠어?
- 후환은 무슨 얼어 죽을 후환. 밀가루 나눠 주는 분들이 내일 고기도 나눠 준다고 했어. 오늘 배급 안 받으면 내일도 못 받아.
- 뭐!? 고기!? 얼마나 준다고 하는데?
- 일인당 10근 준다고 했어.
- 그렇게나 많이 준다고!? 당장 가야지! 비싼 거 준다는데! 뒷일이 문제야!?
- 잘 생각했어. 늦기 전에 빨리 가라고.
선양에서 고기 1근 가격은 300문(3천 원)이다. 5인 가족이 받을 수 있는 고기는 50근, 15,000문(15만 원)에 해당한다.
다른 빈민촌 주민보다 형편이 조금 낫다고 하지만, 무시하기 어려운 금액.
밀가루 배급이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사람들이 주저하던 모습을 버리고, 마을 입구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2.
12월 19일 월요일 오전 10시, 창수의 집무실로 고사누가 찾아왔다.
“대표님, 암브로시아 시제품이 나왔습니다.”
“예상보다 빨리 만들었군요.”
“상업성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어 서둘렀습니다. 대표님이 판별해 주십시오.”
“직접 맛보지 않은 건가요?”
“맛을 봤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설탕보다 확실히 단맛이 강하지만, 이 정도로 입맛이 까다로운 부유층을 만족하게 할지 확신이 안 섭니다.”
암브로시아가 인체에 유익하다는 것은 과학적 성분 분석으로 증명된다. 그러나 평행우주 너머 세상에는 그걸 입증할 시설과 과학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초기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내세울 수 있는 건 깊은 풍미를 가진 단맛.
창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말했으나, 고사누는 자신이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날밤을 지새운 노력으로 단기간에 신형 암브로시아를 만들었으나, 여전히 상업성에 의문이 드는 상황.
“알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맛을 보죠.”
고사누의 불안한 눈을 본 창수는 놀려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이성으로 꾹 참고 시식에 들어갔다.
- 슥!
“헉! 엄청난 맛입니다! 고사누 님! 엄청난 걸 만드셨어요!”
“예……. 그렇게 맛이 좋은 건가요?”
“그렇습니다! 개량하기 전보다 맛이 몇 배는 더 좋아졌습니다! 상업성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보증합니다!”
창수는 원조 암브로시아를 처음 먹었을 때 못지않은 충격을 받았다. 개량한 암브로시아의 맛이 기대치를 아득히 넘었기 때문이다.
암브로시아를 맛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은 사람은 없다.
원조 암브로시아만 해도 끊을 수 없는 중독적인 맛으로 고객을 사로잡고 있다. 평행우주 너머 세상의 부유층 입맛이 아무리 까다롭더라도 개량한 암브로시아의 유혹을 벗어날 수 없을 거다.
“대표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믿음이 갑니다!”
“지금 만들어 놓은 암브로시아 양이 얼마나 되나요?”
“5근 정도 됩니다.”
“내일까지 얼마나 만들 수 있나요?”
“1관 정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사탕수수를 구하기 어려워 생산량에 한계가 있습니다.”
선양 인근에서도 사탕수수를 재배하지만, 적은 양에 불과하고 12월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고사누가 구한 사탕수수는 마탑 온실에서 자란 것이라 본격적으로 판매할 물량을 만들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1관이면 견본으로 적당합니다. 판매용 암브로시아는 사탕수수를 충분히 확보한 뒤에 만들어야겠죠.”
“겨울에 금나라에서는 사탕수수를 구하기 어렵습니다. 해외 수입을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류큐나 포모사에서 수입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운송 기간을 알아보니, 대략 한 달 정도 걸린다는군요. 그사이에 생산 시설을 확충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그리 알고 준비하겠습니다.”
선양에서 7시 방향으로 100km 떨어진 곳에 항구도시 잉커우가 위치해 있다.
잉커우는 금나라의 관문 역할을 하며, 대형 화물을 운송하는 증기선이 수시로 출입하는 곳이다.
증기선을 운영하는 상단의 말에 따르면, 잉커우에서 류큐(오키나와)까지 9일, 포모사(대만)까지 10일이 걸린다고 한다.
사탕수수를 증기선에 싣고 내리는 시간, 그리고 잉커우에서 선양까지 육로로 이동하는 시간을 고려하면, 운송 기간을 30일 내외로 잡아야 한다는 설명.
창수는 전문가인 상단의 의견이 타당하다고 생각하고, 고사누에게 암브로시아 생산 시설을 확장하라고 말했다.
* * *
11월 19일 오후 2시, 창수의 집무실로 타무가 찾아왔다. 타무는 와르카 마적단과 첫 번째 전투를 벌일 때, 창수를 도운 인물이다.
“죄송해서 어떻게 하죠? 아무래도 사탕수수 운송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증기화물선 예약이 꽉 찬 건가요?”
타무의 아이신 가문이 상단을 운영하고 증기화물선을 보유하고 있다. 창수는 타무와 사탕수수 수입을 논의했고, 긍정적인 답을 받았다.
그런데 갑자기 사탕수수 수송이 어렵다고 한다. 사정이 있어서 하는 말이겠으나, 기분이 언짢아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건 아닙니다. 남쪽 바다에 문제가 생겨서 그렇습니다. 전열함을 보유한 해적들이 남쪽 바다를 막고 노략질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런데 전열함은 국가 독점 아닌가요? 어떻게 해적들이 그걸 손에 넣은 거죠?”
오해해서 미안하다. 창수는 타무에게 느꼈던 서운함을 털어 버리고, 전열함에 집중했다.
전열함은 대포를 50문 이상 배치해 화력을 극대화한 전투함이다. 전열함이 바닷길을 막으면, 무장이 빈약한 증기선은 운항이 불가하다.
전열함을 보유한 해적 때문에 사탕수수 운송이 어렵다는 타무의 말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국가급 군대가 독점하고 있는 전열함을 해적이 운용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말이다.
“두 가지 가능성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는 일본 사쓰마 번에서 노략질하는 것. 다른 하나는 명나라 거상이 사병을 동원해 해적질하는 겁니다.”
“어느 쪽이든 정규 해군 못지않은 전력이군요.”
“맞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신 상단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상단이 류큐와 포모사 상행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해적이 잠잠해질 때까지 사탕수수 운송이 어렵습니다.”
사쓰만 번은 큐슈 남부 가고시마에 위치한 곳으로 예전부터 노략질로 악명이 높았다.
겉으로는 무역을 보호하기 위해 해군을 양성한다고 했으나, 스스로 해적 전초기지 역할을 한 것이 사쓰마 번의 본모습.
그리고 황권을 우습게 아는 명나라 거상들 역시, 전열함을 보유할 수 있다.
금나라 상인들도 이 내용을 잘 알고 있기에, 수익을 포기하고 남쪽 상행을 중단하려는 거다.
“사탕수수는 명나라 남부에서도 구할 수 있지 않나요?”
“우리 상단도 그 가능성을 염두에 뒀습니다. 그런데…….”
공식 계약을 맺지 않았으나, 타무는 창수와 나눈 이야기를 실현하기 위해, 차선책을 찾았다.
사탕수수를 취급하는 명나라 상단과 접촉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