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27장. 훈훈한 겨울
6.
“투이나 언니, 왜 집에 안 들어가? 추운데.”
“아……. 그냥…….”
투이나는 올해 15살로 비일라가 거주하는 천막 바로 옆에 살고 있다. 평소 친언니처럼 따르던 투이나가 추운 밤에 홀로 나와 떨고 있으니, 비일라가 걱정이 돼서 물어본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투이나가 답을 못 한다. 여러 번 물어봐도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비일라의 궁금증이 늘어 가는 상황.
- 꼬르르!
하지만 말을 안 한다고 야밤에 서성이는 이유를 감출 수 없다. 몸이 알려 주니까.
“먹을 거 없어서 그러는 거야?”
“응. 어제저녁에 다 떨어져서, 오늘 하루 종일 알아봤는데 구할 데가 없었어.”
투이나의 처지는 비일라 만큼이나 절박하다.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할머니와 어린 동생 두 명과 함께 산다.
설상가상 며칠 전 식모살이로 푼돈이라도 벌던 곳에서 쫓겨났다.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데 여의치 않은 것이 현실.
- 슥!
“언니, 이거 절반 가져.”
“어머! 손좌빙 아니니!? 이거 다 어디서 난 거야!?”
“착한 아저씨가 사 줬어.”
“아는 아저씨야?”
“아니. 처음 보는 아저씨인데, 집에 가서 식구들하고 먹으라고 준 거야.”
“정말 좋은 아저씨구나. 그러면 한 개만 줘.”
“왜? 언니네도 네 식구잖아. 한 개 가지고 모자라잖아.”
“비일라, 항상 좋은 아저씨를 만날 수 있는 게 아니야. 먹을 게 있을 때 아껴야 해. 우리 집은 손좌빙 한 개면 오늘을 넘길 수 있어. 내일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 돈을 마련할 거야. 그러니까 괜찮아.”
15살에 소녀 가장이 된 투이나는 세상 물정을 잘 알고 있다. 오늘밤 비일라가 창수를 만난 건 흔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양심을 가지고 있다. 어린 비일라를 속이려 하지 않고, 오히려 주려고 하는 손좌빙 세 개를 거절하고 한 개만 받으려 했다.
“웅……. 알았어. 언니 말대로 할게.”
“그래. 고마워. 그리고 내일 꼭 돈 벌어서 갚을게.”
“아니야. 저번에 언니가 먹을 거 많이 줬잖아. 그냥 가져.”
“그건 그때고. 이번에 내가 빌렸으니까. 갚아야지.”
아이들이 어른보다 낫다. 서로 궁핍하고 음식이 절실한 상황이지만, 비일라와 투이나는 나누고 양보하는 미덕을 보여 줬다.
아이들의 가족 역시, 작은 먹을거리나마 만족하며 즐거운 저녁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다음 날 이른 아침.
“여보! 어서 일어나 봐요! 콜록! 어서요! 콜록!”
“아니 이 사람이! 몸도 안 좋으면서 아침부터 성화야?”
어젯밤 오랜만에 먹거리다운 먹거리를 먹은 비일라의 모친이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일어났다.
행상을 나갈 정도는 아니지만, 어질러진 천막 안이라도 정리할 요량. 그런데 천막 입구 쪽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급하게 남편을 깨웠다.
비일라의 아버지는 몸이 성치 않은 아내가 아침 일찍 일어나 기침을 하는 것을 듣고 짜증스럽게 응답했다.
쓸데없이 부지런 떨다가 몸만 축난다고 여긴 것.
“콜록! 눈 뜨고 저기 보라고요! 밀가루 포대하고 고기예요!”
“아이참! 이 사람이 귀찮……. 헉! 저게 뭐야!? 진짜 밀가루잖아!?”
금나라 서민의 주식은 밀이다. 비일라의 아버지는 20관(75kg) 밀가루 포대를 단번에 알아보고, 아내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이걸 누가 놓고 간 거죠?”
“지금 그게 중요해? 식량이 생겼으니, 당신하고 아이들 먹으면 되는 거지!”
“그래도 나중에 물어내라고 하면 어떻게 해요?”
“우리가 잃을 게 뭐가 있어?”
“하긴……. 그러네요.”
“여러 생각하지 말고 당신은 누워 있어. 내가 근사하게 아침 만들 거니까. 당신 몸 추스르는 게 제일 중요한 거야.”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이 곱다. 누가 어떤 이유로 귀중한 식량을 천막 안에 넣은 건지 모르지만, 굶주린 배를 채우는 것이 먼저다. 뒷감당은 나중에 고민해도 될 일.
특히 중요한 건 비일라의 모친이 독감을 이겨 내고 건강을 되찾는 거다. 그래야 비일라 가족이 생계를 이어 갈 수 있으니까.
비일라의 모친이 행상을 다시 할 수 있다면, 밀가루와 고깃값도 지불할 수 있다.
풀리지 않은 의문이 여럿이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삶의 벼랑 끝에 놓여 있던 비일라의 가족에게 한 가닥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이 희망의 빛은 바로 옆에 사는 투이나의 가족도 공평하게 비췄다.
7.
12월 15일 오전 10시, 공동 연구 건으로 마탑에 머물고 있던 고사누가 창수의 집무실에 찾아왔다.
며칠 더 연구를 진행해야 하지만, 오랜만에 선양을 방문한 창수를 만나려고 일찍 나선 거다.
“5서클 유저가 되셨다고요! 축하합니다! 미궁 마스터가 고사누 님의 잠재력을 잘못 평가한 겁니다. 이대로 5년만 지나면 5서클 마스터에 오를 것이 분명합니다.”
고사누의 발전은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미궁에서 보라색 크리스털을 개방한 뒤 채 6개월이 되지 않아 5서클 유저의 경지에 오른 것.
5서클은 비기너, 유저, 엑스퍼트, 그리고 마스터로 분류한다.
미궁 마스터는 고사누가 5서클 마스터에 오르는 시간을 20년 후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지금 페이스로 보면 5년 안에 경지에 다다를 가능성이 크다.
4서클 마스터에서 5서클 비기너가 된 과정을 제외하고, 5서클 비기너에서 유저가 되는 평균 기간이 5년 10개월이다.
고사누는 이 기간을 1/10로 단축했다. 창수의 예상은 과장이 아니다.
“대표님의 믿음과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야 보조적인 역할이죠. 마법을 온전하게 소화한 것은 고사누 님의 능력입니다.”
“크리스털을 제가 관리하지 않았다면, 5서클 유저가 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겁니다. 그리고 마법 실험에 소요되는 막대한 비용도 대표님의 후원이 아니었다면, 저로서는 감당하지 못했을 겁니다.”
고사누는 자신이 얻은 성취를 창수의 공으로 돌리는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이건 공치사가 아니고,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다.
핵심적인 5서클 마법이 모두 담겨 있는 보라색 크리스털은 전설급 미궁의 핵심 보상이고, 강대국에서도 탐내는 국보급 귀물이다.
창수는 보라색 크리스털을 고사누에게 맡기고 마음대로 열람하도록 허락했다. 국왕과 대귀족이 소유한 4서클 수준의 크리스털도 마법사가 열람하려면, 사유서를 쓰고 복잡한 행정절차를 거쳐야 한다.
“고사누 님 덕분에 크리스털의 비밀을 밝혀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와르카 마적단과 미궁에서 얻은 재물에 고사누 님의 몫도 적지 않습니다. 받을 만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고사누 님의 성취가 곧 저의 성취입니다. 저에게 빚졌다는 생각보다 정진의 과실을 같이 나눈다고 생각하세요.”
“대표님 말씀 새겨듣겠습니다.”
선은 선으로 대하며 악은 악으로 대한다. 그리고 겸손에는 겸손으로 대한다. 이것이 창수의 사고방식.
고사누는 독선과 자만에 빠진 마법사 대부분과 다르게 겸손을 아는 특별한 마법사다. 그렇기에 창수로부터 특별한 대접을 받는 거다.
고사누는 창수의 말을 듣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창수에 대한 신뢰가 천정을 뚫을 기세로 올라간다.
“이번에는 어떤 마법으로 5서클 유저가 된 건가요?”
“그것이……. 이번에도 쓸모없는 마법입니다. 발전이 있어 좋기는 하지만, 기뻐할 일인지 애매합니다.”
“혹시, 설탕 변환 마법인가요?”
“예. 단맛이 두 배 강해지고, 열량이 절반으로 떨어지는 마법을 연성하고 유저가 됐습니다.”
영양가를 줄이는 몹쓸(?) 마법에 성공하면서 다시 한번 등급 상승을 이룬 고사누. 성취감은커녕 자괴감을 느끼고 있다.
“오! 그래요! 정말 반가운 소식이군요! 설탕 변환 마법진이 20개 정도 필요한데, 언제쯤 완성될까요?”
“아……. 5일이면 될 겁니다. 재료가 충분하니까요.”
공기가 단번에 변해 적응이 어렵다. 고사누는 초탈한 수도승의 모습을 보이던 창수가 갑자기 훅 치고 들어 오자,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치솟던 창수에 대한 신뢰감이 아래로 꼬꾸라지는 느낌.
“영양 공급이 과도해 식사량을 줄여야 하지만, 단맛을 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마법 처리한 설탕은 건강을 지키는 최고의 선택입니다.”
“조선은 그토록 풍요로운 나라인가요?”
“조선뿐만이 아닙니다. 어떤 나라든 부유층은 영양 과잉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리고 영양 과잉은 비만과 각종 질환의 원인이 되죠.”
“음……. 그렇군요. 이곳 선양만 해도 비만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사누 님의 마법이 가치가 있는 겁니다. 자신감을 가지세요.”
창수가 새로운 마법진에 환호하는 이유는, 암브로시아 플러스를 능가하는 암브로시아 계열 신제품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막대한 수익을 가져다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고사누에게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설명할 수 없는 상황. 창수는 대안으로 비만에 시달리는 부유층을 언급했다.
“하지만 영양이 부족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도움이 안 되는 마법이라 너무 아쉽습니다.”
“아닙니다. 식량이 부족한 사람들을 설탕 변환 마법으로 충분히 도울 수 있습니다.”
“예!? 어떤 방법으로 가능한가요?”
“변환 마법으로 만든 설탕을 부유층에게 판매하면, 수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수익을 사용해 식량을 사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면 됩니다. 사람을 돕는 방법은 한 가지가 아닙니다. 부자에게는 건강이라는 도움을 줄 수 있고, 서민들에게는 식량 지원이라는 도움을 줄 수 있는 겁니다.”
“그……. 그렇군요!”
“고사누 님은 뛰어난 가치를 가진 마법진을 만든 겁니다. 충분히 칭송받을 성과를 올린 것에 자부심을 가져도 됩니다.”
고사누는 명석한 두뇌와 집중력을 가진 마법사지만, 하나의 틀에 얽매여 유연한 사고를 못 하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이번 경우도 마찬가지, 사업 가치가 충분한 마법진을 만들어 냈음에도, 그것을 이용해 서민을 도울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다.
고사누의 취약점을 인지하고 있던 창수는 합리적인 방안을 제시하며, 고사누가 귀중한 마법진을 만들었다는 걸 알려 줬다.
창수는 암브로시아의 가치를 단번에 파악했고, 실제로 판매해 천문학적인 수익을 올린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제 평행우주 너머 세상에도 암브로시아 판매가 시작될 거다.
* * *
- 칙칙! 칙칙!
- 츄우욱!
- 뭐지? 우리 마을에 화물차가 다 오고?
- 누가 죽었나?
- 그런 이야기 없었는데.
- 요새 같은 날씨에 급사하는 사람이 한둘인가? 어디서 또 송장 하나 치운 거야.
- 그렇긴 하지. 빌어먹을 세상.
12월 15일 오후 4시 50분, 해가 서쪽으로 넘어갈 무렵, 비일라가 사는 빈민촌 입구에 증기화물차가 도착했다.
가난한 빈민촌 사람들이 증기화물차를 소유할 리 없다. 화물차 운전수가 빈민촌 사람일 가능성이 있으나, 이곳에 화물차를 주차하면, 다음 날 화물차 잔해만 남을 것이 분명하다.
빈민촌 사람들은 증기화물차가 숨진 시신을 나르려고 이곳에 왔다고 생각했다.
- 척!
- 어! 저거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