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25장. 때리는 놈, 맞는 놈, 그리고 돈 버는 놈
7.
11월 29일 뉴욕 시간 오전 8시, 올드만의 대표 소이어 칼슨이 보안 문자 서비스를 사용해 중국 VVIP 고객과 첫 만남을 가졌다.
[왕 선생님, 중국이 조만간 대만에 어떤 조치를 발표할 가능성이 있나요?]
[물음이 아니라 확신이군요. 왜 그런 생각을 하나요?]
[대만 증시가 출렁이고 있습니다. 대만의 정치와 경제가 안정된 상황에서, 증시를 움직일 수 있는 건 중국뿐입니다.]
[중국과 일본의 긴장이 대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중국과 일본의 긴장은 깊어지지 않을 거라 봅니다. 한국 증권시장에 아무런 영향이 없고, 폭락했던 일본 증권시장도 서서히 반등하고 있습니다.]
중국과 일본이 전투를 벌인다면, 단기적으로 한국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하늘길과 바닷길이 막혀 경제에 타격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29일 한국 주식시장은 별다른 동요가 없고 오히려 0.5% 상승했다.
게다가 어제 5% 이상 하락한 종목이 수두룩했던 일본 주식시장이 추가 하락 없이 바닥을 다지는 모습을 보였다.
반면, 28일 1.5% 상승했던 대만 주식시장은 상승분을 모두 반납하는 것도 모자라, 2%가 더 빠졌다. 오늘 하루 -3.5%를 기록한 것.
[한국과 일본이 중국의 군사력을 얕보는 것이 원인일 수 있습니다.]
[그럴 리가 있나요? 미군이 나서니 안정화되는 거죠.]
[미군이 개입한다는 이야기 호튼 재무장관이 전해 준 겁니까?]
[트레비스로부터 두루뭉술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 시장에서 미군의 구체적인 움직임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만 증시에서도 알 만한 사람은 알고 있습니다.]
미국이 일본을 방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정보가 한국 증권시장과 일본 증권시장에 파다하게 퍼졌다.
동아시아 본부장 패트릭 우의 보고에 따르면, 대만 증권시장에서도 미군 개입 소식이 알려졌다고 한다.
[하긴 함대가 이동하는 데 모를 리가 없겠죠. 그러나 중국군이 미군에 일방적으로 밀릴 정도는 아닙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동지나해에 집결한 중국 전투함이 48척입니다. 아무리 미군이 강하다고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이죠. 하지만 중국군이 미군과 충돌하면서 일본과 전쟁을 벌이는 것은 쉽지 않을 거라 봅니다.]
[중국은 핵보유국입니다. 미국이 전범국 일본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벌일까요?]
[미국이 가진 핵무기는 중국보다 20배 많습니다. 미국은 일본과 안전보장조약을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 곳곳에 군사기지를 가지고 있지요. 중국이 일본을 공격하면 전투에 참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안전보장조약은 파기할 수 있는 겁니다.]
[조약은 철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충분한 시간과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중국의 압박에 갑자기 안전보장조약을 파기하면 셀든 대통령 재선은 불가능하게 될 겁니다. 게다가 미군 기지의 안전 문제가 대두되면, 미국은 절대로 물러날 수 없습니다.]
정보를 알아보려는 것이 어느덧 토론으로 변질됐다.
그러나 소이어 칼슨은 짜증내지 않고, 진지하게 대화에 임했다. 지금 이 과정이 정보를 얻어내는 첩경이라는 걸 경험으로 알기에.
[그건 칼슨 대표님 개인 생각인가요? 아니면 미국 정부와 민주당의 의중인가요?]
[공화당, 민주당, 무당파 할 것 없이, 미국 시민이 가진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일방적이고 자신감이 넘치는군요.]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왕 선생님, 이제 중국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려 주시겠습니까?]
[구체적으로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조만간 대만 경제에 큰 타격이 갈 거라는 겁니다. 올드만에서 대만에 투자한 것이 있다면, 가능한 한 빨리 회수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왕 선생님의 도움 잊지 않겠습니다.]
VVIP는 뒤도 돌아보지 말고 대만에서 빠져나가라고 말했다.
속칭 빤쓰 런.
자세한 설명은커녕 대략적인 내용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이어 칼슨은 VVIP가 정말 귀중한 정보를 넘겨줬다는 걸 알아차렸다.
권력의 핵심에 있는 인물이 흘려서는 안 될 정보를 건네줄 때 사용하는 어법이니까.
* * *
VVIP와 문자 대화를 마친 소이어 칼슨은 동아시아 본부장 패트릭 우와 보안 통신을 이용해 통화했다.
<현재 우리가 매도한 풋 옵션 포지션이 얼마요?>
<2억 달러가 남았습니다. 지시하신 대로 극외가격을 모두 정리하고 외가격부터 차근차근 정리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손실은?>
<3억 달러입니다. 프리미엄(옵션거래 가격)이 급격히 불어 손실이 커졌습니다.>
<내일 장이 시작되면, 나머지 2억 달러 포지션도 모두 정리하시오.>
<이대로 환매하면 추가 손실이 적어도 12억 달러가 될 겁니다. 대표님, 오늘 대만 시장 막판에 반등 기미가 보였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보는 것이 어떨까요?>
옵션의 구조상 기초 자산의 변동이 클 때, 극외가격 가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패트릭 우가 소이어 칼슨의 지시대로 극외가격과 외가격을 정리했지만, 대만 증시가 -3.5% 급락하면서 손실이 커졌다.
그래도 지시 초기에 극외가격 풋 옵션을 모두 정리해 추가 손실을 막은 거다.
29일 대만 증시는 -4%까지 빠졌다가 막판에 0.5% 상승했다. 패트릭 우는 이 상승 기조가 30일에도 이어질 거라 예상하고,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간절히 바라면서, 환매를 늦추자고 말했다.
<만약, 내일 대만 증시가 10% 하락하면, 우리가 떠안을 손실이 어느 정도 되는지 계산해 봤소?>
<지금 추세로는 100억 달러가 넘을 겁니다.>
<100억 달러 손실이 나면 올드만 전체가 휘청거릴 수 있소. 하지만 15억 달러 미만으로 막으면 내가 해결할 수 있지.>
<그 말씀은 대만 증시가 반드시 폭락한다는…….>
<쓸데없는 말 하지 마시오! 당신은 내 지시에 따르면 돼! 그러면 불이익이 없을 거니까!>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경고하는데, 오늘 나와 나눈 이야기 기억에서 지우시오! 만약 이상한 소문이 퍼지면, 용서하지 않을 거요!>
<명심하겠습니다! 대표님!>
내일 대만 증시가 열리고 초기에 풋 옵션을 환매하면, 전체 손실은 15억 달러로 제한될 거다. 막대한 손실이지만, 올드만이 위험에 빠질 정도는 아니다.
소이어 칼슨은 대만 지사를 희생양 삼아, 이번 소동을 정리할 요량이다.
* * *
뉴욕 시간 오전 9시 20분, 패트릭 우에게 지시를 마친 소이어 칼슨은 올드만 본사에 위치한 메인 트레이딩 센터로 이동했다.
대표로 승진한 이후 잘 들르지 않은 곳이지만, 시절이 하 수상하기에 비상대기한다는 각오로 자리를 잡은 것.
“대표님! USMC 풋 옵션에서 대량 매매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뉴욕 시간 오전 9시 30분, 뉴욕 증권시장이 개장하자마자 돌발 사건이 발생했다.
대만 증권시장과 뉴욕 증권시장에 동시에 상장된 USMC의 풋 옵션에 뭉텅이 돈이 들어온 것이다.
“거래량이 얼만가?”
“5억 달러입니다!”
“젠장! 여기서도 당하는 건가!”
“무슨 말씀이신지…….”
“대만에서 분탕질 친 놈들이 USMC에 치고 들어온 거야!”
금융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소이어 칼슨은 USMC 풋 옵션을 대량 매입한 세력과 대만 증권시장에서 풋 옵션을 매집한 세력이 동일하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참을 수 없는 짜증에 분노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상황.
“오늘 USMC가 무너지면 내일 대만 증시는 더 하락할 겁니다. 조처를 해야 합니다.”
“젠장! 제이콥! 누가 그걸 모르나! 빌어먹을! 이럴 줄 알았으면, 모든 포지션을 정리했어야 하는 건데!”
한국 상장사 시가총액에서 미리내전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20% 남짓이다, 그런데도 미리내전자의 행보에 한국 주식시장 전체가 좌지우지된다.
대만의 경우 USMC가 차지하는 비율이 33%가 넘는다, USMC가 폭탄 맞으면, 대만 주식시장이 무너질 수 있다.
올드만 본사 트레이드 센터장 제이콥 맥카티가 우려를 표한 건 당연한 일. 그러나 분노가 쌓인 소이어 칼슨은 충언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역정을 냈다.
대만 증권시장이 열리려면 앞으로 11시간 이상을 더 보내야 한다. 핵폭탄급으로 성장한 풋 옵션 매도 포지션을 당장 해소할 방안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제이콥 맥카티의 말이 충언이 아니라 약 올리는 말로 들린 것이다.
“대표님, USMC 풋 옵션을 우리가 매수하면 헤지(위험 회피)가 가능합니다.”
“대만 시장이 하한가로 폭락한다고 가정할 때, 예상 손실이 100억 달러야. 그걸 USMC 하나로 복구할 수 있다고?”
“제 전공이 옵션입니다. 손해를 완벽하게 상쇄하는 포지션을 구축하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올드만 같은 대형 투자은행은 다양한 금융 상품을 취급한다. 기초 자산을 매개로 한 파생 상품도 선물, 옵션, 스와프, 자산 유동화 증권 등 여러 분야가 존재한다.
그중에서 소이어 칼슨은 원유 선물과, 외환 거래에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
반면, 제이콥 맥카티는 옵션을 전문적으로 연구해 박사 학위를 받은 인물이다. 금융 천재들이 모인 올드만을 통틀어도 옵션에 대한 지식에서 제이콥 맥카티를 따라올 인물이 없다.
“자금이 얼마나 필요하지?”
“선점당해서 효율은 좋지 않습니다. 100억 달러 수익을 내려면 50억 달러가 필요합니다.”
“70억 달러 투자해!”
“수익을 남기라는 말씀인가요?”
“그래! 이 상황에까지 왔는데, 본전으로 끝낸다는 건 말이 안 돼! 모든 책임은 내가 질 거니까! 소신껏 해 봐!”
“맡겨 주십시오!”
대만 증시에서 매도 포지션 해소가 어렵다면, 대안으로 뉴욕 증시에서 USMC 풋 옵션을 매수해 더 많은 수익을 올리면 된다.
소이어 칼슨은 제이콥 맥카티의 능력을 믿고 과감하게 베팅했다.
일반적인 시각으로 볼 때, 소이어 칼슨의 결정은 미친 짓이다. 만약 USMC 주가가 폭락하지 않는다면, 70억 달러를 고스란히 잃어버릴 수 있으니까.
그런데도 무모한 투기를 강행하는 것은 대만 증시부터 USMC까지 일관된 흐름이 폭락을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 * *
“어! 이거 뭐야!?”
뉴욕 시간 오전 10시 30분, 태국 시간 오후 10시 30분, USMC 풋 옵션 매입을 마친 김근홍은 창수와 술자리를 하기 위해 트레이딩 룸을 나가려 했다.
그리고 마지막 점검으로 풋 옵션 프리미엄을 살펴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왜 그러세요?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요?”
“USMC 풋 옵션에 고래가 들어온 것 같아.”
“고래요?”
“금융시장에서 큰손을 고래라고 불러. 무려 70억 달러를 집어넣었어.”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우리가 돈방석에 앉게 된 거지. 벌써 수익이 10억 달러야.”
제이콥 맥카티는 자신이 손수 만든 옵션 가격 계산기를 바탕으로 주가 하락 20%에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풋 옵션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단기간에 거금이 들어오니 수요공급의법칙과 옵견 가격 결정 원리에 따라 프리미엄이 뛰어오른 건 자연스러운 일.
창수와 김근홍은 불과 1시간 만에 원금 2배 수익을 얻게 됐다.
“돈 벌어서 좋기는 한데, 조금 무섭네요.”
“살벌하기는 하지. 하지만 익숙해지면 스릴이 넘치는 곳이지.”
“전문가가 아니라 익숙해지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지금은 자세한 내용을 보려 하지 말고 숫자 흐름만 지켜봐. 그러면 자연스럽게 안목이 쌓일 거야.”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할까요? 뉴욕 시장 끝난 뒤에 술자리 할까요?”
“그냥 여기서 마시자.”
김근홍은 술과 여자를 좋아하지만, 절제를 알고 있다. 자기 일터이자 전쟁터인 트레이딩 룸에는 술과 여친을 일절 들이지 않았다.
창수와 트레이딩 룸에서 술자리를 하자는 건 매우 이례적인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