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23장. 판을 키우다
1.
- 스르륵!
첵랍콕 국제공항을 빠져나온 창수는 마법스크롤을 사용해 다시 얼굴을 바꿨다. 이제 조나단 창이라는 가공의 인물이 도움이 아니라 골칫거리가 됐으니, 행적을 지워야 한다.
홍콩이 중국에 종속된 상태지만, 일본과 관계가 나쁘지 않다. 홍콩 전성기에 협력적인 관계를 맺은 분위기가 지금도 여전하다.
조나단 창을 검거하기 위해 공항 보안 요원들이 동원된 걸 생각하면, 일본 정부의 요청을 받아 홍콩 내부에 수배령이 떨어진 것이 분명하다.
‘일단 숙소부터 잡자.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야.’
어제저녁 7시 이후 휴식을 제대로 취하지 못했다. 비행기 안에서 잠시나마 눈을 붙일 시간이 있었으나, 그 정도로 쌓인 피로를 풀 수 없었다.
‘침사추이가 좋겠지. 숙소도 다양하고, 이동하기도 편하니까.’
침사추이는 구룡반도 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폭 1.3km에 불과한 강과 같은 해수를 사이에 두고 센트럴이라 불리는 홍콩섬과 마주하고 있다.
홍콩섬과 육지를 이어 주는 역할을 하는 침사추이는 교통의 중심지인 동시에 쇼핑을 즐기려는 외국인 관광객이 몰리는 곳이다.
자연스럽게 고급 호텔부터 저렴한 모텔까지 다양한 숙박 시설이 있다.
“방 하나 주세요.”
“며칠 묵으실 건가요?”
“하룻밤입니다.”
“숙박비는 500홍콩달러(한화 75,000원)입니다. 선결제하셔야 하고, 신분증을 보여 주셔야 해요.”
“예? 신분증이요? 언제부터 3성급 호텔에서 신분증을 검사했죠?”
“올해 6월부터 법률이 강화됐거든요. 그리고 오늘 갑자기 철저하게 하라는 행정 지시가 내려왔어요. 이해해 주세요.”
‘흠……. 경찰국가가 된 것도 모자라서 일본의 개노릇인가? 홍콩이 갈 데까지 갔군.’
한때 동양의 진주라 불리던 홍콩. 1997년 중국에 귀속된 이후 서서히 빛을 잃게 됐다. 상하이에 아시아 금융 허브 지위를 빼앗겼고, 중국 IT 산업을 주도하는 선전시에 흡수당할 처지에 놓여 있다.
더 큰 문제는 2047년까지 약속된 ‘일국양제’가 유명무실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은 영국과 홍콩 반환 협상을 벌이면서 50년간 민주주의 체제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용인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은 친중파에 유리한 선거제도를 만들고, 공산당이 홍콩 내정에 개입할 수 있는 법률들을 만들고 있다.
창수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번영하던 홍콩의 몰락에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약속을 저버린 중국에 반항하지 못하는 허수아비 홍콩 당국이, 친일적인 모습마저 보이는 것에 한심함을 느꼈다.
“법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 척!
“아! 타이완 분이시군요!”
창수가 사용한 가명은 천즈웨이. 천씨는 대만 인구의 11%를 차지하고, 즈웨이라는 이름은 대만에서 5번째로 흔한 남자 이름이다.
호텔 직원 저우쉬안은 창수가 제시한 대만 여권이 진짜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예, 맞습니다. 그런데 차이니즈 타이베이라고 안 하시네요.”
“차이나와 타이완은 염연히 다른 나라잖아요.”
“그야 그렇죠. 하지만 홍콩에서 타이완이라고 하다가 공산당 눈 밖에 나는 것 아닌가요?”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리고 많은 사람이 공산당이 싫어서 여기를 떠나려 하고 있어요. 저도 돈 벌어서 타이완으로 이주할 거예요.”
중국 공산당이 약속을 저버리고 홍콩에 노골적인 간섭을 시도하자, 2019년 홍콩 시민 200만 명이 모여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공산당은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강경 진압으로 대응했다. 코로나 창궐로 집회 동력이 떨어진 틈을 노려 홍콩 보안법을 통과시키며, 일국양제를 실질적으로 무력화시켰다.
이제 홍콩 시민에게 남은 선택은 중국 공산당 체제에 순응하느냐? 아니면 탈출하느냐?
저우쉬안은 대만으로 탈출을 꿈꾸며, 대만 독립을 상징하는 명칭을 사용했다.
“우리도 사정이 좋은 건 아닙니다. 중국 공산당의 압박이 심하니까요.”
“피부로 느낄 정도예요?”
“그렇습니다. 장거리 로켓포로 타이완을 쓸어 버리겠다고 협박하고 있죠. 그리고 경제 보복도 말하고 있습니다.”
“대담해졌네요.”
“홍콩에서 성공했다고 생각하면서 중국 공산당의 자신감이 강해진 거죠.”
“타이완 사람들이 반발하지 않나요?”
“격분하는 사람이 많죠. 하지만 국력 차이가 너무 나서 뾰족한 대책이 없습니다. 게다가 경제적인 이유로 중국 공산당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음……. 타이완도 녹록지 않군요. 좀 더 안전한 곳으로 가야 할까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세요.”
하나의 중국을 외치는 중국 공산당의 다음 목표는 대만을 완전히 복속시키는 것이다.
창수는 몇 년 사이에 급격히 쇠락한 홍콩을 보면서 대만의 미래도 결코 밝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지만, 호텔 직원이 현명한 판단을 하기 바라며, 대만의 현실을 말해 줬다.
- 슥.
“605호실입니다. 센트럴이 잘 보이는 곳이에요.”
“좋은 방을 줘서, 고맙습니다.”
“손님에게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편안한 시간 되십시오.”
대만 사람을 만나 밝은 표정을 짓던 저우쉬안의 얼굴이 급격히 우울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손님에 대한 예의를 잊지 않고, 창수에게 전망이 가장 좋은 방을 내줬다.
짧은 만남이지만, 창수의 뇌리에 저우쉬안의 선한 인상이 짙게 남았다.
2.
605호실은 홍콩섬이 전부 눈 안에 들어오는 빼어난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피곤한 창수에게는 그림의 떡. 경치 감상할 여유 없이 곧바로 잠에 들었다.
- 띠리링! 띠리링!
‘흠. 벌써 7시군. 푹 자서 그런지 컨디션은 괜찮아.’
창수가 깨어난 건 오후 7시. 4시간이 조금 넘는 수면이라 모자란 듯하지만, 활동하는 데 지장을 느낄 정도는 아니다.
‘빨리 움직이자. 계획에 없는 일정이 생겼으니 서둘러야지.’
본래 계획은 오후 9시에 일어나 홍콩 음식을 즐긴 뒤, 밤 12시 5분에 출발하는 LA행 비행기에 탑승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암담한 홍콩의 상황을 보고 계획을 바꿨다. 중국 공산당과 홍콩 당국을 응징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
‘로우강이라고 해서 규모가 있는 줄 알았더니, 청계천보다 작군.’
오후 8시, 침사추이에서 지하철을 탄 창수는 로우역에 도착했다. 이 역은 홍콩과 선전을 가르는 로우강 인근에 위치해 있다.
여기서 선전으로 들어가려면, 여권과 홍콩 출입국 카드를 제출해야 한다.
- 터벅! 터벅!
창수는 선전시로 들어가지 않고 로우역을 빠져나와 로우 강변에 도착했다.
강이라고 이름이 붙었으나, 청계천 규모를 가진 지류였다.
- 첨벙!
로우역에서 너무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지점을 선택한 창수는 마법자루에서 무언가를 꺼내 강에 던졌다.
그리고 권총을 꺼낸 뒤 소음기를 제거했다.
- 탕! 탕! 탕!
권총이 향한 곳은 강물. 창수는 강물을 향해 연속해서 총탄을 발사했다.
- 삐익! 삐익!
- 투다닥!
홍콩과 선전의 경계에서 총성이 울리자, 로우역에 있던 경비병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 사람이다! 사람이 물에 떠 있다!
- 주위를 살펴! 총격을 가한 자가 있을 거야!
경비병들이 로우강에서 발견한 것은, 총에 맞고 강물로 떨어진 것으로 보이는 몸체였다.
총소리는 1분도 안 되는 조금 전 울렸다. 경비병들은 인근에 총을 발사한 범인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 아무도 없어! 어서 장비 가지고 와!
- 죽은 것 같지 않아? 먼저 보고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 아니야! 선조치 후보고 몰라!? 시체라도 먼저 건져야 해!
가해자를 찾으려 주위를 살폈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제 경비병들이 할 일은 물에 빠져 있는 몸체를 수습하는 것이다.
의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이미 죽은 시체일 가능성이 높지만, 이대로 방치하다가 상관에게 불호령을 들을 수 있다. 가능한 한 빨리 조치해야 한다.
‘떡밥을 제대로 물었군. 이만하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어.’
투명망토를 가동한 채 경비병들의 어수선한 움직임을 지켜보던 창수는, 계획대로 일이 진행된다고 생각하며 안도했다.
이제 할 일은 침사추이로 돌아가 딤섬과 완탕면을 먹은 후, LA행 비행기에 탑승하는 것.
창수는 홀가분한 마음을 가지며 로우강에서 멀어졌다.
* * *
“뭐라고!? 실종됐던 오노자와 소장이 홍콩에서 발견돼!?”
“정확히는 홍콩과 선전의 경계선입니다. 총탄에 피격당해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게 말이 되는 거요? 연구소에서 나간 기록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홍콩에서 죽는다는 거요? 공간 이동이라도 했다는 거요?”
창수가 로우강에 던진 것은 비밀 미사일 연구소장 오노자와 소스케의 시체였다.
시체를 수습한 중국 국경 경비대는 일본 정부가 발급한 ‘마이넘버카드’를 통해 오노자와 소스케의 신분을 확인했다.
이 소식이 조사에 함께 참여한 홍콩 입경사무처 직원을 통해 홍콩 당국에 보고됐고, 다시 일본 정부에 전달됐다.
문제는 ‘폭발 사고에 휘말려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어떻게 홍콩 접경에서 시체로 발견됐는가?’였다.
“오노자와 소장의 몸에서 미사일 관련 기밀 문건이 나왔다고 합니다.”
“뭐요!? 기밀 문건!? 그자가 우리를 배신했다는 거요!?”
“지금으로서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기록을 남기지 않고 연구소를 빠져나온 것. 매뉴얼을 어기고 기밀문서를 외부에 빼돌린 것. 그리고 비밀리에 홍콩으로 간 것. 이 모든 것이 오노자와 소장의 배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이가 없구만! 흠……. 혹시 연구소 폭파도 그자의 소행이오?”
“어떤 식으로든 연관됐을 거라 생각합니다. 연구소에 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요.”
“칙쇼! 믿을 만한 자라고 해서 기용했더니! 중국에 나라를 팔아먹는 배신자일 줄이야!”
일본 국가안전보장국장 호소야 유키치카의 추론은 완전히 틀린 것이다. 하지만 창수의 노림수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제법 그럴듯하게 보였다.
보고를 들은 일본 총리 후지다 카즈아키는 중국에 포섭된 오노자와 소스케가 기밀을 빼돌리면서, 비밀 연구소를 폭파한 것이라 생각하게 됐다.
오노자와 소스케를 천거한 세력에게 이가 갈리는 상황.
“총리님, 미국에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우리가 비밀리에 공격용 미사일을 개발한 것이 드러날 것인데, 미국을 끌어들이자는 거요?”
“연구소 폭파에 중점을 두면 됩니다. 중국에 넘어간 기밀은 우리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합니다.”
“막강한 정보력을 가진 미국이 그걸 모르겠소?”
“모른 척할 겁니다. 중국을 테러의 근원으로 몰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 없습니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 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게다가 중국이 강하게 저항하면서, 무역 분쟁이 군사 충돌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호소야 유키치카는 일본 단독으로 중국을 당해 내지 못하다고 판단한 뒤, 미국의 손을 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 미사일 개발이 미국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지만, 중국이라는 대형 사냥감을 공략하기 위해, 미국이 기꺼이 눈감아 줄 거라 생각한 것.
“일리가 있군. 미국에 도움을 청하겠소. 그런데 누가 오노자와를 처단한 거요? 우리 요원이 한 일이오?”
“아직 그건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정황을 보면, 중국에 적대적이고, 우리에게 우호적인 세력이 오노자와 소장을 체포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본다. 호소야 유키치카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근거 없이 자신에게 유리한 해석을 내놨다.
이건 호소야 유키치카의 입지가 그만큼 어렵다는 걸 나타낸다.
실책을 은폐하려는 일본 국가안전보장국장의 잔머리가, 창수의 존재를 더 짙은 안개 속으로 밀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