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20장. 음습한 위협
1.
“크뤼거 소장, 암브로시아 성분 분석 끝났소?”
“분석 결과는 나왔습니다. 다만…….”
“다만? 뭐요?”
“오백세건강에서 주장하는 성분이 그대로 담겨 있었습니다.”
9월 19일, 세계 최대 제당 회사 덩커의 본사에서 회장 바우만이 주재하는 특별 대책 회의가 열렸다.
바우만은 연구소장이 과대 포장된 암브로시아의 진면목을 밝혀 줄 거라 믿었다. 이를 바탕으로 오백세건강을 제당업계에서 축출하려 했으나, 돌아온 답은 기대와 달랐다.
“암브로시아와 같은 성분을 만들려면, 제조 비용이 얼마나 드는 거요?”
“kg당 1,000달러를 들여도 만들기 어려워 보입니다. 1만 달러 정도를 사용해 성분 자체를 전면적으로 바꾸는 방법이 있지만, 그렇게 하면 대규모 적자가 날 겁니다.”
“그러면 그자들이 눈속임으로 원당에 약물을 주입했다는 거요?”
“약물을 주입하면 쉽게 폴리코사놀 수치를 올릴 수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건 칼로리 수치와 혈당 지수입니다.”
“그거야 글루코만난(곤약)을 집어넣으면 될 것 아니오?”
곤약은 구약감자를 갈아 묵 형태로 만든 것이다. 열량이 100g당 7칼로리에 불과해 ‘칼로리 제로 식품’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바우만은 암브로시아에 곤약을 넣어 칼로리와 혈당 지수를 낮췄다고 생각했다.
“10회 실험에 글루코만난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글루코만난은 혈당 지수가 24입니다. 그것으로 혈당 지수 21을 만들기 어렵습니다.”
“조작이 없다고? 그러면 어떻게 최적의 성분만 골라냈다는 거요?”
“아직까지 생산 구조를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이보시오, 크뤼거 소장! 연구소장이 그딴 소리를 하면 어쩌자는 거야!?”
“면목 없습니다, 회장님.”
암브로시아에 곤약이 들어 있지 않을뿐더러, 일반 원당에 곤약을 섞어 혈당 지수 21을 만드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덩커 연구소는 설탕뿐만 아니라 관련 분야의 다양한 신제품을 개발해 능력을 인정받은 곳이다. 회장이 원한다 하여 엉터리 분석 결과를 보고할 수 없는 일.
크뤼거는 객관적인 근거를 가지고 암브로시아 분석 결과를 보고했다. 그러나 불같은 성질을 가진 바우만은 암브로시아의 비밀을 캐내지 못한 연구소장을 심하게 몰아붙였다.
“회장님, 연구소에 시간을 줘야 한다고 봅니다. 암브로시아가 쉽게 분석될 거라면, 오백세건강이 저렇게 공격적으로 나오지는 못했을 겁니다.”
크뤼거가 고양이 앞의 쥐 신세가 되자, 보다 못한 재무 이사가 나섰다.
“랑에 이사, 암브로시아가 지금까지 얼마나 판매됐소?”
“지난주 금요일까지, 예약된 것이 4,500톤입니다.”
“출시 2주 만에 4억 5,000만 달러 매출을 올린 거군.”
“그렇습니다.”
암브로시아 플러스는 출시되자마자 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그리고 그 인기는 태국에 휴양 온 해외 관광객을 통해 전 세계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가장 많은 양을 주문한 곳이 사우디아라비아로 2,000톤을 단번에 구매했다. 뒤를 이어서 UAE, 바레인, 쿠웨이트 같은 중동 왕정 국가에서 대량 주문을 냈다.
이들 왕정 국가의 특징은 암브로시아 플러스 통관절차를 극도로 간소화했다는 점이다.
선거로 지도자를 뽑는 국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암브로사 플러스가 중동 국가에 팔려 나갔다.
“아무것도 없던 신생 기업이 2주 만에 우리 연간 매출액의 5%까지 따라왔는데, 회사의 임원이라는 사람 입에서 태평하게 그딴 소리가 나오는 거요?”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암브로시아는 제당업계의 판도를 바꿀 슈퍼 아이템입니다. 아니 어쩌면 식품업계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존재를 부정할 것이 아니라 협력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뭐요!? 지금 나를 훈계하는 거요!?”
“훈계가 아니라, 덩커의 등기 이사로서 의견을 드리는 겁니다. 경쟁사의 성공을 시기하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바우만이 목소리를 높였으나 랑에는 꿈적하지 않고 자기가 할 말을 다 했다. 이건 랑에가 배짱이 있는 인물이라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동시에 랑에의 신분이 보장됐다는 걸 나타낸다.
랑에는 주주총회 의결을 거쳐 법인 등기부 등본에 이름이 올라간 등기 이사다. 바우만이 회장이라도 임의로 해고할 수 없는 인물.
게다가 랑에는 합리적인 성품으로 바우만의 독선에 신물이 난 임직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실질적으로 덩커의 2인자이며, 회장 바우만의 경쟁자이기도 하다.
“암브로시아 등장을 강 건너 불구경이라 생각하지 마시오. 회사 재정이 악화하면, 당신도 자리 지키기 어려울 거요.”
“충고 감사합니다, 회장님. 하지만 자리 지키기의 난이도는 저보다 회장님이 더 어려울 거라 생각합니다. 잘 대처하시기 바랍니다.”
“…….”
한 마디를 지지 않는다. 랑에는 암브로시아의 약진이 자신보다 바우만에게 더 위협이 될 거라 말했다.
그리고 회장은 재무 이사의 도발적인 말에 대꾸를 하지 못했다.
랑에의 말이 사실이니까.
* * *
독일 제당 회사에서 격론이 오갈 무렵, 태국에서도 날카로운 신경전이 있었다.
“창수야, 캄보디아 공장 때문에 난리 났다.”
“누가 난리 치는데요?”
“태국 정부지 누구겠어? 결정을 번복해 달라고 통사정하고 있어.”
“참 웃기는 사람들이군요. 사기업 경제 행위에 관여할 수 없다고 배짱 튕기던 것이 이틀 전입니다. 이제 와서 캄보디아 공장 인수를 중단하라니요? 들을 가치도 없는 억지입니다.”
예상을 뛰어넘는 주문 폭주에 공장 하나로 암브로시아 플러스 생산량을 맞출 수 없게 됐다.
부족한 공급을 늘리는 최상의 방법은 제당 공장을 추가로 인수하는 것.
창수는 연간 10만 톤 이상 생산할 수 있는 제당 공장들과 접촉해 인수 협상에 들어갔다.
시장가격보다 30% 높은 가격을 제시했기에 협상이 순조로웠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태국 제당 회사들이 견제하면서 난관에 빠졌다.
태국에는 세계 5위의 제당 회사와 세계 9위의 제당 회사가 있다. 이들이 창수의 공장 인수를 번번이 방해한 것.
김근홍이 태국 정부 고위급 인사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협조를 얻을 수 없었다.
태국 제당 회사들의 로비가 강한 것이 원인. 그리고 암브로시아 론칭 기념행사에서 보인 창수의 행동에 부유층이 반감을 품은 것도 한몫했다.
그러나 창수는 실망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상대방이 떡밥을 물었다 여기고, 캄보디아 제당 공장을 인수해 버렸다.
태국 정부와 태국 제당 회사에 완벽한 카운터펀치를 날린 거다.
“미련한 놈들이기는 하지. 내가 그렇게 경고했건만, 듣지 않고 허세만 부리더니, 이제 와서 바짓가랑이 잡는 꼬라지 하고는.”
“선배님은 그 사람들에게 할 도리를 다했습니다. 어떤 결과가 나와도 원망하지 못할 겁니다.”
“당연하지. 나에게 징징거리면 싸대기 갈길 거야. 그런데 정말 생산 거점을 캄보디아로 옮길 거냐?”
“태국 정부가 어떻게 하는지 보고 결정할 겁니다.”
“음……. 기회를 한 번 더 준다는 거야?”
“이번 건은 잽 정도 날린 겁니다. 일종의 경고죠. 태국 정부가 정신 차리고 우리에게 협조하면, 태국이 생산 거점으로 남을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생산 거점을 다른 국가로 옮길 겁니다.”
“하하하!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멍청이들에게 네 의사를 확실히 전달하마.”
창수가 칼자루를 잡고 휘둘렀다. 이유 없이 타인을 먼저 공격하지 않지만, 걸어온 싸움을 피하지 않는 성정이 이번에도 나타난 것.
유일하게 암브로시아를 생산할 수 있는 독보적인 능력을 바탕으로, 생산지를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줬다.
태국 정부는 창수가 갑 중의 갑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될 거다.
그렇다고 창수가 상대방을 죽일 정도로 칼을 휘두른 건 아니다.
길고 아프게 얕은 상처를 냈다.
이제 공은 태국 정부에 넘어갔다. 계속해서 삐딱하게 나오면, 창수는 미련 없이 관계를 절단하고 타국으로 생산 거점을 옮길 계획이다.
2.
“회장님, 오백세건강이 10월 1일 마라톤 호텔에서 암브로시아 론칭 행사를 연다고 합니다.”
“드디어 한국에 들어오는 건가?”
“그렇습니다. 제품은 암브로시아와 암브로시아 플러스 두 종류라 합니다.”
“일반 암브로시아를 판다고? 가격을 얼마로 한다는 거지?”
“kg당 2만 원이라고 합니다.”
“흠……. 우리에게 타격이 있겠군.”
9월 28일, 한국에 암브로시아 출시가 임박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한국 제당업계 1위 회사, 대유제당 회장 이지훈은 암브로시아의 등장에 심한 압박감을 느꼈다.
대유제당은 현재 연 매출액 25조 원을 달성한 대기업이다. 그중 설탕 매출액은 1,500억 원으로 전체 매출액의 0.6%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암브로시아의 등장에 긴장하는 건 설탕이 대유제당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본진이 털릴 위기감을 느낀 것.
“오백세건강과 제휴하는 건 어떨까요? 암브로시아의 품질과 우리가 가진 판매 네트워크가 결합하면, 최상의 실적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근본을 알 수 없는 회사와 협력이 될 것 같나? 우리 판매망만 빼먹고 배 째라고 나오면 어쩌려고?”
“그거야…….”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놈) 영세 업체가 두려워 손을 잡아야 한다면, 그룹에서 내 입지가 어떻게 될 것 같아?”
“원로들의 반발을 염두에 두시는 거군요.”
“그래. 그 영감탱이들 눈치를 봐야 해. 더럽지만 창업 공신이고, 우리 대유제당의 뿌리인 걸 어떻게 하겠어? 비용이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어. 암브로시아를 꺼꾸러트릴 방법을 찾아.”
“알겠습니다, 회장님.”
‘오백세건강’이라는 이름부터가 촌스럽다. 어떤 회사인지 알아보니, 러시아에서 건강식품을 수입하는 영세 업체라고 한다.
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암브로시아 제조 회사와 같은 이름을 사용하고 있으나, 어떤 관계 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조세 피난처에 설립한 페이퍼 컴퍼니의 한국 법인과 제휴했다가, 망신당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위신을 생각해야 한다.
기업 이윤을 따지자면, 오백세건강과 협력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일 수 있다. 그러나 선대로부터 이어받은 제당 사업에서 영세 업체에 밀린다면, 대유제당 내에서 이지훈의 입지가 흔들릴 수 있다.
아직도 창업주 조부와 선친이 중용한 인물들이 그룹 곳곳에 포진해 있다. 그들에게 얕보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제당 사업 1등 자리를 지켜야 한다.
이지훈은 협력이 아니라 전쟁을 선택했다.
* * *
“대표님, 선주문이 벌써 1,500톤입니다.”
“비율이 어떻게 돼?”
“암브로시아가 1,000톤이고 플러스가 500톤입니다.”
“예상보다 플러스 비율이 높군,”
“입소문 효과가 큽니다. 그리고 외국에서 플러스 맛을 본 사람도 적지 않고요.”
창수도 론칭 행사를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생각지 못한 실적에 살짝 놀라게 됐다.
암브로시아 1,000톤은 매출액 200억 원, 암브로시아 플러스 500톤은 매출액 5,000만 달러(550억 원)를 의미한다.
시작도 하기 전에 한국 점유율 1위 회사의 연간 설탕 매출액 50%를 달성한 것이다.
“뱌프야, 선주문 온 거 모두 항공기로 운송해.”
“예? 요새 항공 운임이 얼마나 올랐는데 화물기를 사용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