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16장. 보라색 크리스털의 정체
2.
창수가 눈여겨본 건 열쇠였다. 황금으로 만들어져 제법 값이 나갈 것으로 보이지만, 보물로 가득한 금고의 한 자리를 차지하기에 턱없이 모자란 평범한 물품.
“저건 미궁 열쇠입니다.”
“미궁이라면 크레타 미궁처럼 빠져나갈 수 없는 곳을 말하는 건가요?”
마법사 고사누는 황금 열쇠가 미궁 문을 여는 열쇠라고 말했다. 망설임 없이 말하는 건 확신한다는 의미일 터.
창수는 미궁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뇌리에 크레타 미궁을 떠올렸다.
크레타왕 미노스가 왕궁 지하에 미궁을 만들고 소머리에 인간의 몸을 가진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집어넣었다는 전설이 생각난 것.
“반반입니다. 한번 들어가면 나오기 어려운 미궁도 있고, 길 찾기가 어렵지 않은 미궁도 있습니다.”
“안전한 곳은 아니군요.”
“그렇습니다. 게다가 미궁은 모두 함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치 난이도가 높은 곳은 마물도 나옵니다.”
“마물이요? 호랑이와 사자 같은 맹수가 아니라 괴물이 있다는 건가요?”
“맹수도 간혹 있지만, 고블린, 오크, 스켈레톤 같은 마물이 주로 나옵니다.”
‘헐! 이거 완전히 판타지 세계군!’
불길한 예감이 그대로 맞아 들어갔다. 평행우주 너머 이곳에 몬스터가 존재했다.
하긴 마법이 있고 마법물품이 일상 곳곳에 사용되는 세계에 몬스터가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지 모른다.
“위험한 곳에 들어가는 열쇠가 보물 취급 받는 건가요? 이해가 안 가는군요.”
“모험을 즐기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미궁 탐험을 마치면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보상을 받을 수 있죠?”
“다양합니다. 금은보화, 골동품, 마법물품, 마나석을 얻을 수 있습니다.”
‘흠……. 미끼가 만만치 않군. 불나방이 꼬일 만해.’
창수는 미궁 열쇠 가치가 높은 이유를 알게 됐다. 위험을 감수할 만큼 탐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은 것이다.
그러나 창수는 미궁 탐험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이미 충분한 재물과 마법물품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미궁에서 사용하는 징표가 있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징표는 미궁 탐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핵심이요? 무슨 역할을 하기에 중요한 건가요?”
“징표 속에는 마법스킬과 마법지식이 봉인돼 있습니다. 목차 정도는 그냥 볼 수 있지만, 자세한 내용은 미궁에서 봉인을 풀어야 알 수 있습니다.”
- 척!
“여기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 건가요?”
창수가 꺼낸 건 송본귀금속에서 빼앗은 보라색 크리스털. 그는 황금 열쇠가 미궁의 문을 여는 도구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부터 크리스털도 미궁과 관련돼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징표’를 거론한 건, 휼기아귀금속 천옥금이 준 정보가 맞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그리고 예상을 뛰어넘는 고급 정보를 얻게 됐다. 크리스털은 마법 정보를 담은 귀물이었다.
창수는 자신이 금나라로 온 중요한 목적 중 하나를 예상보다 쉽게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며, 고사누에게 크리스털을 보여줬다.
“이……. 이건……!”
“이상한 점이라도 있는 건가요?”
“아닙니다. 신기해서 그랬습니다. 보라색 크리스털은 매우 희귀합니다. 저도 실제로 본 건 지금이 처음입니다.”
색 자체만으로도 압권이다. 4서클 마법사 고사누는 크리스털을 보자마자 귀물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봤다.
‘송본귀금속 놈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이유가 있었군.’
크리스털을 탈취당한 노리오카 히가시에는 5억 환이라는 어마어마한 현상금을 걸었다.
창수는 과도한 현상금이 무리수라고 생각했으나, 고사누의 설명과 반응을 보고 마음이 바뀌게 됐다.
“목차가 어떻게 되나요?”
“제 능력으로는 보라색 크리스털에서 작은 정보도 빼내기 어렵습니다. 미궁에 가서 봉인을 풀어야 목차도 알 수 있을 겁니다.”
“미궁 아무 곳이나 가면 되는 건가요?”
“아니요. 지정된 미궁이 있습니다. 혹시 열쇠도 가지고 계신가요?”
“예. 여기 있습니다.”
고사누는 봉인을 풀지 않더라도 일반 크리스털에 담은 내용을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보라색 크리스털의 보안은 고사누가 뚫을 수 없을 만큼 강력했다.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 오기가 생긴 창수는 고사누에게 보라색 크리스털과 황금 열쇠를 건네주고, 미궁 위치 파악에 나섰다.
* * *
와르카의 개인금고를 깨끗하게 턴 창수는 확보한 물품을 모두 챙기고 선양으로 이동했다.
구아이는 제 갈 길을 갔다. 츠네가 창수에게 그녀를 제거해야 한다고 조언했으나, 고사누에게 맡긴 목숨이기에 떠나는 걸 막지 않았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자칫하면 이번에 큰 인명 손실이 날 뻔했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겁니다. 저를 포함해서 승객 모두가 위험했으니까요.”
“하하. 여전히 겸손하시군요. 여기 전리품과 현상금입니다.”
- 척!
마적단에서 탈취한 증기자동차로 선양에 도착한 창수는 열차 경비책임자와 만났다.
애쿠렌은 창수와 츠네의 활약을 비교적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마적의 시체에 나타난 총상과 마법화살을 보고 추산한 것.
금나라에서 통하는 규칙에 따라, 애쿠렌은 마적단 조장 11명이 보유했던 모든 장비를 창수에게 넘겨줬다, 그리고 처단한 마적 수에 합당한 현상금도 지급했다.
부가 수입이 쏠쏠하다.
“꼼꼼히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슨 말씀을! 예산만 허락한다면, 10배를 드려도 과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경비대에 예산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번 승리로 기부금이 많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장비 확충은 어렵지만, 대원들에게 포상금을 지급하기에 충분합니다.”
“당분간은 마적단 습격을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저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와르카 마적단이 보통 끈질긴 놈들이 아닙니다.”
애쿠렌은 와르카 마적단이 큰 피해를 봤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예전에도 그랬듯, 조만간 인원을 보충하고 바퀴벌레처럼 살아남을 거라 생각했다.
“마적단에 내분이 일어나서 공격대장이 두목을 처단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와르카 마적단이 재기하기 어려울 겁니다!”
“아직은 소문입니다. 정보를 더 모아 보세요.”
“예.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적단 단속을 강화하겠습니다!”
창수가 와르카 마적단을 와해시킨 것을 알리지 않은 이유는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다.
금나라의 규칙에 따라 승자인 창수가 와르카 마적단의 모든 것을 독식할 수 있으나, 마적단에 쌓인 재물이 워낙 많기에, 다른 범죄 조직의 표적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르카 마적단의 공중분해 소식을 흘린 것은 빈틈을 다른 범죄 조직이 치고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열차 경비대가 와르카 마적단의 와해를 까맣게 모르고 있다면, 방어적인 자세를 보이면서, 제2의 와르카 마적단이 발생하는 걸 방치할 수 있다.
애쿠렌이 조사를 시작하면,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거다.
3.
마적단 관련 문제를 일소한 창수는 선양에 법인을 설립하고, 츠네와 고사누를 이사로 고용했다.
대형 마법금고를 확보했고 재물도 충분하다. 게다가 선양에 아오툰산업 대표 언치엉을 비롯해 창수에게 우호적인 유력 인사가 많기에, 근거지를 만든 것이다.
“대표님, 미궁의 위치를 알아냈습니다.”
“오! 그래요? 어딥니까?”
2022년 5월 24일 화요일, 크리스털 연구에 돌입했던 고사누가 창수를 찾아왔다.
황금 열쇠와 보라색 크리스털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결과를 가져온 것.
“천산산맥입니다.”
“타클라마칸 사막 위쪽을 말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으슥쾰 호수 인근에 미궁이 있습니다.”
천산산맥은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그리고 신장 위구르에 걸친 길이 2,000km에 달하는 험준한 산지다.
으슥쾰은 키르기스스탄에 있는 호수로 해발 1,600m에 위치해 있다. 면적 6,200km²로 서울보다 10배 이상 넓고, 수량에서 세계 10위에 이름을 올린 대형 호수.
“미궁 위치로는 최상이군요. 하지만 거리가 만만치 않네요.”
“만 리 길입니다. 그리고 길도 험하죠. 쉽지 않은 여정이 될 겁니다, 대표님.”
“준비를 단단히 해야겠죠. 그러면 경로는 어떻게 잡는 것이 좋을까요?”
“명나라에 들어가 실크로드를 타는 것이 가장 편안한 길입니다.”
“실크로드는 이목이 많은 곳이라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다른 길은 없나요?”
“원나라로 진입해 알타이산맥을 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동차를 사용하지 못하는 구간이 있어, 이동 시간이 절반은 늘어날 겁니다.”
“그 길로 가죠. 시간을 절약하는 것보다 이목을 피하는 것이 우선이니까요.”
선양에서 으슥쾰 호수까지 직선거리로 3,700km. 지형 때문에 길을 돌아가는 부분을 생각하면, 4,000km가 훌쩍 넘는 장거리다.
고사누는 시안과 둔황을 거치는 교역로를 이용하자고 제안했으나, 창수의 생각은 달랐다.
수많은 상단이 오가는 실크로드에 일본의 간자가 섞여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험하고 먼 길로 돌아가더라도 보안 유지가 가능한 길을 가는 것이 현명하다.
* * *
2022년 5월 30일 월요일, 이동 경로를 정한 창수는 마무리 준비를 마치고 미궁 탐사를 위해 길을 떠났다.
“츠네, 차를 멈춰라. 20km 전방에 수상한 자들이 있다.”
6월 3일, 창수 일행은 개조된 화물차를 타고 원나라의 남동부 교통 요충지 사인샨드 인근에 도착했다.
그리고 불청객과 만나게 됐다. 창수가 날려 보낸 정찰 드론 4대 중 한 대가 9명으로 구성된 무리를 발견한 것.
“흑룡회 복장은 아닙니다. 하지만 일본인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사사키 재단 놈들이 병력을 파견한 건가?”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저자들은 흑룡회 못지않게 고도로 훈련된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저 수준의 병력을 양성할 곳은 많지 않습니다.”
사인샨드는 베이징에서 직선으로 730km 떨어져 있고, 명나라에서 원나라로 진입하는 이동로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 진을 치고 있으면, 명나라는 물론이고, 금나라에서 국경을 넘는 인원을 효과적으로 염탐할 수 있다.
창수와 츠네는 사인샨드에 배치된 인원이 사사키 재단과 관련됐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금 사사키 재단이 간절히 원하는 건 보라색 크리스털이다. 결국, 저자들은 창수를 노리는 거다. 창수의 실체를 모르고 있지만.
“마법사님, 이 자동차로 우회할 수 있을까요?”
“길 없는 평원과 사막을 달릴 수 있도록 개조된 차량입니다. 충분히 우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평범해 보이는 화물차가 험지를 이동하면, 눈에 뜨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러면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려야겠군요.”
“그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앞으로 3시간 후면 해가 집니다. 넉넉잡고 5시간 뒤에 우회하면, 무난히 사인샨드를 지나갈 수 있을 겁니다.”
창수 혼자서 9명을 처리할 수 있다, 여기에 흑룡회 부조장 출신 츠네와 4서클 마법사 고사누가 합류하면, 단시간에 매복 병력을 말살할 수 있다.
그런데도 시간을 소비하며 우회하려는 이유는, 창수 일행이 미궁 탐험에 나섰다는 것을 알리지 않기 위해서다.
어쨌든, 5시간만 버티면 된다. 창수는 화물차를 길옆에 세운 뒤, 휴식에 들어갔다. 장시간 이동해 피곤한 상태에서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며.
“츠네! 준비해! 놈들이 우리 쪽으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