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14장. 또 덤비냐?
5.
“후히어누, 조장들이 왜 쓰러진 건지 확인하고 보고해.”
“대장, 무리한 명령이요. 중간에 적의 공격을 막을 만한 엄폐물이 없소.”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두목의 엄명이야. 최대한 병력을 분산시킨 뒤 접근하도록 해.”
마적들은 바보가 아니다. 마적단 본대와 쓰러진 조장들과의 거리는 100m 이상. 이 거리를 무방비 상태로 달려가다가 아무것도 못 해 보고 죽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경험이 많은 최고참 마적 후히어누는 공격대장 판누에게 병력 투입이 불가하다고 말했다. 개죽음당하기 싫으니까.
그러나 이미 와르카의 명령이 내려진 사안이기에 번복은 있을 수 없다.
“흠……. 부두목 때문에 두목이 이성을 잃은 거요?”
“네 말대로다. 장난 아니야. 여기서 두목의 명령을 어기면, 너만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아. 가족들 목숨도 끝장이라는 걸 명심해야 할 거야.”
금나라 수도 선양 인근에서 가장 강력한 마적단을 이끄는 두목 와르카. 이자가 악명을 떨친 것은 잔혹한 성품과 함께 냉철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약점을 철저히 파고들어 끈질기게 공략하고, 강한 적이 출현하면 재빨리 후퇴하는 교활한 전법이 주특기.
하지만 창수가 친동생 크루카를 처단한 뒤 냉철한 판단력이 사라졌다. 복수를 위해 물불을 안 가리는 것이 현재의 모습.
“그때 앞뒤 가리지 말고 반격을 했어야 하는 거요?”
“이미 지난 일이다. 지금 그걸 따져 봐야 누구에게도 득 될 것이 없어.”
2월에 벌어진 전투에서 와르카 마적단은 부두목 크루카를 포함해서 모두 112명이 사망하는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부상자까지 포함하면 140명에 달하는 인명 피해였으나, 마적단에는 여전히 160명이 남아 있었다.
즉시 반격이 가능했던 상황.
두목 와르카는 창수가 펑창으로 돌아가는 열차에 탑승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복수에 나서려 했다.
그러나 창수가 단독으로 마적단 82명을 처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마적단 전체가 얼어붙었다.
창수가 어떤 전력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하기 전까지 충돌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 마적단 전체의 중론이었다.
뜻을 이루지 못한 와르카는 분노했고, 그때부터 부하들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
“후……. 알겠소. 두목 덕분에 호의호식했으니, 이참에 갚아야겠군.”
“후히어누, 죽지 말고 돌아와라. 네가 마지막 남은 동기 아니냐?”
“그게 가능할 것 같소?”
“…….”
“아무튼, 신경 써 줘서 고맙소. 옛사람이야 이렇게 가는 거지만, 대장은 꿋꿋이 살아남아서 우리를 기억해 주시오.”
와르카는 축적한 자금을 동원해 대포를 구매하고, 신입 단원을 대거 영입해, 400명 규모로 마적단을 확장했다.
이건 과거를 뛰어넘는 세력 증강인 동시에 숙청의 시작이었다.
새로 영입한 마적 240명과 조장을 비롯한 일부가 와르카의 미래 구상에 남아 있고, 기존 마적들은 버려지는 패가 된 것이다.
후히어누는 자살과 다름없는 작전에서 생존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깨닫고, 입단 동기인 판누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판누는 가슴이 저려 왔으나, 후히어누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 * *
조장들이 사라진 상황에서 임시 지휘권을 가진 후히어누는 병력 116명을 2개로 나누어 동시 진격을 시도했다.
창수 쪽으로 배치된 마적은 모두 60명. 베테랑의 감각으로 창수가 츠네보다 강하다고 여겨, 자신을 포함해서 4명을 더 투입했다.
- 사사삭!
‘조직적으로 움직이네. 머리를 쓰는 놈이 있는 건가?’
6명이 1조가 돼서 10개 조가 일사불란하게 이동하자, 예상치 못한 압박이 전해졌다.
얼룩말이 줄무늬를 가지도록 진화한 이유 중 하나가 교란이다.
무리가 동시에 달리면, 얼룩무늬가 포식자의 눈을 어지럽게 만들어 점찍은 사냥감의 크기와 속도, 그리고 움직이는 방향을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다.
지금도 유사하다. 마적들이 조직적으로 이동하자, 공격할 대상을 지정하기 어려워졌다. 자칫 마적들의 접근을 허용할 수 있는 상황.
‘흠. 잔머리를 굴렸지만, 나에게 통할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지. 어디 총탄 맛을 봐라.’
- 타타타탕!
- 팅팅팅! 팍!
“큭!”
창수가 사용한 대책은 물량 공세. AK-201을 단발 모드에서 연사 모드로 바꾸고, 우측에서 좌측으로 난사를 시작했다.
순식간에 탄창 2개를 비웠다. 1개 조에 5~6발의 총탄을 발사한 셈.
명중률은 당연히 떨어진다. 하지만 조직적이던 마적들의 움직임을 막는 데 충분했다.
총격받은 마적들의 행동은 3가지로 나뉘었다. 어쩔 줄을 모르고 엉거주춤한 부류, 땅바닥에 엎드려 최대한 총탄을 피해 보려는 부류, 그리고 용감하게 전진하는 부류.
그중에서 후히어누가 인솔하는 조가 가장 앞에 섰다.
- 탕! 탕! 탕!
- 팍! 팍! 팍!
“크아악!”
“우아악!”
창수는 후히어누의 용기가 통할 대상이 아니다.
창수는 겁 없이 선두에서 달려오는 마적들을 단발 조준 사격으로 하나씩 처단했다. 시선을 분산해 줄 동료들의 수가 급감한 상태에서, 그들은 표적용 허수아비 신세에 불과했다.
이렇게 후히어누는 25년간 이어진 마적 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됐다.
* * *
“두목! 조장이 아니면 저자를 상대할 수 없습니다! 병력을 물려야 합니다!”
“안 된다는 소리 말고! 대포라도 발사해! 멍청한 놈아!”
죽음을 강요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무모한 명령에 순식간에 병력 수십 명을 잃었다. 게다가 입단 동기 후히어누도 사망했다.
위기감을 느낀 공격대장 판누가 목소리를 높여 작전 변경을 건의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와르카는 자신의 판단 실수를 수습하기는커녕 강공으로 만회하려 했다. 창수를 증오하는 마음과 기존 부하들에 대한 분노가 이성을 마비시킨 것.
“우리는 좌우 쪽 중 누가 김창수인지도 모릅니다!”
“번갈아 가면서 쏴! 그것도 내가 알려 주랴!?”
마적단이 보유한 대포는 1문에 불과하다. 게다가 발사 속도는 2분에 1발. 그걸 창수와 츠네에게 번갈아 가면서 사용하라고 한다.
판누는 효과에 회의감을 가졌으나 거부하지 못했다. 두목의 명령이니 하라면 할 수밖에.
- 쾅!
- 투드득!
- 화르륵!
- 탕! 탕! 탕!
창수는 투명망토를 작동한 상태에서 수시로 자리를 옮겼다. 둔중한 움직임을 보이는 포신으로 창수의 움직임을 잡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
창수는 와르카의 어설픈 대응을 비웃듯이 가볍게 포격을 피하면서 마적단을 계속해서 공격했다.
6.
“고사누를 불러와! 어서!”
“고사누요? 그자가 안 보인 지 3일이 넘었습니다.”
쓰러진 조장들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투입된 마적들이 모두 사살당하자, 두목 와르카가 뜬금없는 명령을 내렸다.
오늘 작전에 투입하지 않은 외부인을 데려오라고 한 것.
판누는 와르카의 정신 상태가 이상해졌을 가능성을 떠올리게 됐다. 만약 두목이 헛소리를 계속한다면, 제압하고 전투를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마저 가지게 됐다.
“그놈은 우리 근처에 있어. 구아이 곁을 떠날 수 없으니까.”
“우리를 몰래 미행했다는 겁니까?”
“멍청한 놈아! 말을 그렇게 못 알아먹어!? 우리가 아니라 구아이 그 계집을 따라온 거라고!”
“아……. 그럴 수도 있겠군요.”
“당장 후방으로 달려가서 그놈 찾아와! 구아이 이름을 외치면 똥줄 빠지게 달려올 거야!”
“알겠습니다!”
구아이는 최근에 흡수한 소규모 마적단 소속 간부다. 무력은 별 볼 일 없지만, 빼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어 와르카 마적단에서도 인기가 높은 여자.
고사누는 구아이에게 반해 스토커처럼 따라다니는 인물이다. 그리고 단독으로 와르카 마적단 본거지에 들어올 정도로 무력이 뛰어나다.
와르카는 구아이를 연모하는 고사누가 전투가 벌어지는 이곳까지 쫓아왔을 거라 생각했다.
연속되는 두목의 비합리적인 명령에 실망감을 가지게 된 판누. 그는 처음 고사누를 데려오라는 말을 ‘헛소리’로 여겼으나, 대화를 이어 가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가능성이 높은 일이라 판단한 것.
* * *
와르카의 예상대로 고사누는 마적단을 은밀히 따라왔고, 판누는 단번에 그를 불러낼 수 있었다.
“와르카 님, 저를 무슨 일로 찾으시나요?”
“우리처럼 막역한 사이에 꼭 이유가 있어서 봐야 하오?”
“막역한 사이라고요? 3일 전 저에게 ‘색골’이라고 부른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고사누의 반응이 싸늘하다. 와르카의 달라진 자세에 황당함을 느낀 것.
와르카는 구아이를 멀리서라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애걸하는 고사누에게 쌍욕을 퍼부었다. 허물없이 지낼 정도로 친한 사이라는 말은 어처구니없는 개소리.
“영웅호색이라는 말도 있지 않소? 색골이라는 말에는 칭찬하는 의미도 있으니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궤변이 심하군요. 객쩍은 소리 그만하고, 저를 부른 이유를 말해 주십시오.”
고사누는 엉성한 사탕발림에 넘어갈 바보가 아니다. 악명 높은 마적단 두목이 자신을 구슬리는 목적이 있을 거라 보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화끈한 성격이군. 아주 좋소. 시간 낭비 할 것 없이 바로 말하리다. 우리를 귀찮게 하는 쥐새끼를 잡아 주시오.”
“거절합니다. 저는 인간을 해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고사누는 마적단이 벌이는 전투 상황을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여차하면 구아이를 위험에서 구출하기 위해서.
그리고 와르카가 자신에게 바라는 것도 예측하고 있었다. 창수와 츠네의 활약으로 마적단이 궁지에 몰린 것을 목격했으니까.
고사누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으나, 범죄와 연관된 악인이 아니다. 그는 미리 마음을 정하고 아르카의 요구를 단번에 잘라 버렸다.
이대로 와르카 마적단이 붕괴하면, 구아이를 빼내 갈 수 있다는 계산도 염두에 둔 것.
“우리 단원 3명을 통구이로 만들려고 한 것이 누구요?”
“그건 먼저 공격을 받아서 어쩔 수 없이 대응한 겁니다!”
“어쨌든, 당신은 사람을 해친 거요! 그리고 우리 단원들은 무단 침입자를 몰아내기 위해, 해야 할 직무를 하다가 불벼락을 맞은 거고! 내 말이 틀린 거요!?”
“그거야…….”
와르카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시시비비를 가리기 어려운 사건을 들먹인 것이다.
고사누가 와르카 마적단 본거지에 처음 진입했을 때, 그의 실력을 알지 못한 마적들이 겁 없이 선제공격을 감행했다가 반격을 받고 중상을 당했다.
와르카는 고사누가 충돌의 원인 제공자라는 것을 강조하며, 일방적인 피해자 행세를 했다. 마적들이 고사누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은 쏙 빼놓은 채.
고사누는 와르카의 교활한 언변에 대응 못 하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지나간 일 탓하자는 것이 아니오. 구아이 때문에 당신이 나섰듯이, 지금도 같은 이유로 전투에 참여하라는 거요.”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지금 날뛰고 있는 쥐새끼를 잡아 주면, 구아이를 당신 품 안으로 밀어 넣어 주겠다는 거지.”
“예? 탈퇴를 허가한다는 건가요?”
“그렇소. 제명할 거니까. 구아이와 평생 살든지? 아니면 좀 데리고 놀다가 버리든지?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
거부하기 어려운 제안이다.
고사누가 악명 높은 와르카 마적단 주위를 맴도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 연모하는 구아이를 마적단에서 빼내기 위해서다.
눈 딱 감고 와르카의 말에 따르면, 간절히 원하던 소원을 이룰 수 있다.
고사누의 머릿속에 갑자기 여러 생각이 오간다.
와르카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외부인의 표정을 보면서,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