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13장. 강 건너 불구경
1.
“상자는 어떻게 여는 건가?”
“등록된 자의 피를 저 틈에 흘려 넣으면 열립니다.”
“저놈의 피를 뽑아서 넣으면 되겠구만.”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제 쓸모없으니 저자를 처치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피가 충분하니까요. 살려 봐야 귀찮기만 할 뿐입니다.”
허공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아마도 투명망토를 착용한 한패일 터. 그자는 조장이라 불리는 복면인보다 더 악랄했다.
게다가 치밀했다. 그자의 말대로 상자를 여는 열쇠는 노리오카 히가시에의 피. 이미 흥건히 피를 흘리고 있기에, 찍어서 상자에 떨어트리면 뚜껑을 열 수 있다.
써먹을 대로 다 써먹은 뒤 노리오카 히가시에를 죽여서 입을 봉하면, 뒤처리도 깔끔하다.
“히이익! 살려 주십시오! 하라는 대로 다 하지 않았습니까!?”
“자발적으로 협조한 거 아니잖아. 이제 네 협조가 필요 없는데 왜 너를 살려 줘야 하지?”
“저 상자에 비밀이 있습니다! 그걸 알려 드리겠습니다!”
“오호. 비밀이 있어? 무슨 비밀인지 말해 봐.”
“먼저 저를 살려 주겠다고 약속하십시오! 흑룡회의 명예를 걸고 말입니다!”
한 편의 블랙코미디다. 노리오카 히가시에는 복면인에게 목숨을 구걸하면서 그 담보로 흑룡회의 이름을 걸었다.
그러나 복면인이 상자의 비밀을 알아낸 뒤, 약속을 어기고 노리오카 히가시에를 죽일 때 어떻게 대응할 건가?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 잡는 심정이라고 하지만, 너무 허술하다.
“커험. 바라는 것도 많은 성가신 놈이로구만. 좋아. 흑룡회의 명예를 걸고 버러지 같은 네놈의 목숨을 살려는 주마. 하지만 만약 네놈이 거짓말하거나, 시시껄렁한 비밀이라면, 각오해야 할 거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즉시 비밀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웃기는 건 복면인이 짜증을 내면서도 노리오카 히가시에의 요구를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일본인들끼리 통하는 정서가 있는 것일까?
- 척!
“조장님, 중급 마나석입니다.”
“요시! 귀물을 꽁꽁 숨겨 놨구만! 어서 챙겨라! 커커커!”
노리오카 히가시에가 상자 홈에 피를 떨어트리자, 뚜껑이 열리면서 그 안에 담긴 내용물이 드러났다.
1개에 1억 환(한화 1,000억 원)의 가치를 가진 중급 마나석 25개. 송본귀금속의 연간 순수익과 맞먹는 거액이다.
조장이라 불리는 복면인은 잔뜩 목소리를 높이며 기쁨을 표하고, 수하에게 중급 마나석을 확보하라고 지시했다.
- 지이잉!
- 철컥!
“뭐야 이거!? 열쇠 하나하고 유리 쪼가리잖아!? 장난해! 지금!?”
“거……. 겉은 평범해도 귀중한 물건입니다!”
“뭐에 쓰는 건데?”
상자의 비밀은 또 다른 공간이 있다는 것.
노리오카 히가시에는 5분간 공을 들여 간신히 비밀공간을 개방했다. 그리고 그곳에 황금색 열쇠와 보라색 크리스털이 담겨 있었다. 제법 고급스러운 외향.
하지만 복면인의 욕심을 만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의 눈에 열쇠와 크리스털이 별 볼 일 없는 잡동사니로 보인 것이다.
“용도는 저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중급 마나석 25개보다 더 가치 있는 겁니다! 믿어 주십시오!”
“퍽이나 그러겠다! 네놈이 그냥 장난친 거 아니야?”
“아닙니다! 3일 후에 재단 본부로 보낼 예정인 보물 중의 보물입니다!”
“흠……. 좋아. 일단 중급 마나석을 확보했으니, 약속을 지키마.”
“감사합…….”
- 퍽!
- 털석!
송본귀금속 대표에게 더 이상 뽑아낼 것이 없다고 판단한 복면인은 수하에게 신호를 보내 뒤통수를 후려치게 했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그대로 쓰러진 노리오카 히가시에.
그래도 복면인이 약간의 양심은 남아 있는지 죽이지는 않았다. 아마도 중급 마나석 25개를 챙긴 뒤 마음이 너그러워졌나 보다.
- 슥! 슥!
- 척! 척!
복면인과 수하는 마법자루를 열어 귀중품들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어찌나 빠르고 정확한지, 마치 기계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과 같은 상황을 대비해 훈련을 많이 한 것처럼 보였다.
- 삐삐삐!
“똥개들이 몰려온다. 귀찮아지기 전에 이동하자.”
“알겠습니다!”
비밀금고에 있던 물품들을 완전히 쓸어 담은 복면인과 부하. 그들은 만족하지 않고, 노리오카 히가시에의 저택을 돌아다니며, 돈이 될 만한 걸 닥치는 대로 챙겼다.
노략질을 중단한 건, 복면인의 귀에 어떤 신호가 들린 이후.
- 사사삭!
- 사사삭!
복면인은 수하처럼 투명망토를 가동하고 은밀하게 이동했다.
- 대표님이 쓰러지셨다! 빨리 의사 불러!
- 흉수가 있는지 주위를 살펴!
- 전 조직에 연락해! 비상 걸어!
노리오카 히가시에의 저택에 진입한 건 송본귀금속의 잔여 경비병이었다. 그들은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저택과 연락이 끊어지자, 변고가 생겼다 여기고 달려온 것이다.
그러나 대응이 너무 느렸다.
복면인과 수하는 송본귀금속 병력의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뒤로한 채 유유히 저택을 빠져나갔다.
2.
“영감, 늦은 밤 죄송합니다.”
“무슨 일인가? 어서 말해 보게.”
“송본귀금속에서 또다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26명이 죽고 1명이 부상당했습니다.”
29일 밤 11시 30분, 좌포도종사관 박시우가 좌포도대장 최상민의 자택을 찾아갔다.
깊은 밤에 직장 상사의 집을 방문하는 건 한국이나 조선이나 똑같이 금기시되는 일. 하지만 대형 사건이 터진 상황에서 박시우에게 불가항력이었다.
“뭐야!? 또 살인 사건이 벌어져? 이번에도 김의방의 소행인가?”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면 누구 짓이야?”
“현장에서 종이탄피와 수리검, 그리고 표창이 발견됐습니다. 흑룡회의 짓일 가능성이 큽니다.”
“왜인들 사이에 알력이 있다고 하더니 그것이 터진 건가?”
“정밀 조사를 해 봐야 하겠으나, 일단은 그렇게 보입니다. 흑룡회와 송본귀금속이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습니다.”
“쯔쯔쯔. 한심한 것들. 조선에서 건방지게 설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저희끼리 피 흘리며 싸우고 있군. 하긴 사소한 이권에 목숨을 거는 것이 왜인의 특징이기는 하지.”
일단은 안심이다. 담당 구역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이지만, 조선인이 관여된 일이 아니기에, 사건 처리가 한결 편하다.
사건의 여파가 커지는 것을 막는다면, 일본인들끼리 알아서 수습할 가능성이 크다.
“사소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귀중품이라도 도난당했나? 패싸움이 아니라 노략질이었어?”
“송본귀금속 대표 노리오카 히가시에의 말에 따르면, 귀중품을 보관하던 마법금고 전체가 약탈당했다고 합니다.”
“마법금고가 약탈당해?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흑룡회 병력이 송본귀금속 경비병과 비서를 잔인하게 죽이고, 노리오카 히가시에를 고문해 강제로 마법금고를 열게 한 것 같습니다.”
“어허……. 마법금고가 털렸다면, 피해가 만만치 않을 걸세. 이거 좌시할 수 없구만. 사대문 출입을 통제하고 우포도청에 통보하게. 상부에 보고는 내가 함세.”
“알겠습니다, 영감.”
최상민은 송본귀금속이 조선에서 10위 안에 드는 거대 경제 집단의 정점에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마법금고에 무엇이 보관돼 있었는지 알지 못하지만, 송본귀금속의 연간 매출액이 120억 환(한화 12조 원)에 달한다는 걸 고려하면, 천문학적인 재물이 탈취됐을 것이 분명하다.
최상민은 이 사건이 단순한 일본 조직 간 다툼이 아니라, 대형 경제 사건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가 납득할 만한 조치를 하지 않으면, 송본귀금속과 연관된 조선 고위 관리들에게 공격당할 수 있다.
좌포도대장 최상민은 긴급 상황에서만 발동할 수 있는 사대문 통제를 지시했다.
* * *
“카리베 대장, 송본귀금속 대표의 저택이 기습 공격 받았다고 하오.”
“예? 노리오카의 자택 말입니까?”
“그렇소. 혹시 그대가 지시한 일 이오?”
최상민이 박시우에게 명령을 내리던 시간, 흑룡회 지부장이 타격대장을 호출했다.
영문을 모르고 달려온 카리베 테루스미에게 이바라키 아키오가 던진 말은 송금귀금속 사건에 개입했는지의 여부였다.
흑룡회에서 대외 무력을 담당하는 부서가 타격대다. 그 책임자에게 개입 여부를 묻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
“아닙니다. 모든 타격조에 물리력을 사용하지 말라고 명령 내렸습니다. 본부에서 내린 훈령을 어기면, 엄한 처벌을 받을 거라는 경고도 함께 했습니다.”
“흠……. 그러면 누구 짓이지?”
“지부장님, 송본귀금속이 벌여 놓은 일이 많습니다. 습격한 자들을 우리 흑룡회라고 단정 지을 이유가 있을까요?”
“나도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는데, 걸리는 것이 여러 가지요.”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우선 사용한 무기가 우리 것이었소. 송본귀금속 병력을 처치한 방법도 우리 방식이오. 게다가 범인이 스스로 흑룡회 소속이라고 밝혔다 하오.”
“그건 모두 날조할 수 있는 겁니다. 증거로 삼기에 한참 부족합니다.”
명령만 내려지면, 송본귀금속 정도는 단번에 박살 낼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없는 일.
카리베 테루스미는 지부장의 말에 조금 언짢은 기분이었다. 흑룡회 병력이 송본귀금속 사건에 개입했다는 뉘앙스를 깔고 있기에.
“동감하오. 그거로는 부족하지. 하지만 범인은 송본귀금속이 마법금고에 보관한 모든 것을 털어 갔소.”
“헉! 전부라고요!?”
“최소 10억 환이 걸린 사건이오. 어쩌면 그보다 금액이 더 클 수 있소.”
“잘못하면 우리 지부가 범인의 누명을 뒤집어쓸 수도 있는 거군요.”
“그렇소. 자칫 본부에게 의심받으면, 나와 그대도 무사하지 못할 거요.”
예상보다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간다.
만약 송본귀금속이 털린 재물의 가치가 1억 환 미만이라면, 어떤 이간계가 발동돼도 흑룡회 본부가 조선 지부를 의심하지 않을 거다.
그러나 금액이 10억 환 이상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정도 재물이면, 조선 지부가 독립해 새로운 조직을 만들 수 있으니까.
본부의 의심을 피할 수 있는 조치를 가능한 한 빨리 실행해야 한다.
“타격조 전원을 소집해 전수 조사에 들어가겠습니다.”
“좋소. 나도 감찰반과 정찰대를 소집해 관련자가 있는지 알아보겠소.”
감찰반은 지부장의 친위대로, 타격대를 비롯한 흑룡회 지부 관련자의 행동을 감시하고, 비위를 찾아내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바라키 아키오는 자신의 직속부대도 믿을 수 없다 판단했다. 워낙 큰 재물이 달린 일이기에.
“지부장님, 내부 단속 이외에 송본귀금속에 대한 감시와 사건 조사도 병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송본귀금속이 고육지책을 썼을 거라 보는 거요?”
“그렇습니다. 비열한 노리오카의 행태를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봅니다.”
“좋은 지적이오. 노리오카는 제 살을 내주는 일을 강행할 놈이지.”
송본귀금속의 자작극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지부장 이바라키 아키오는 타격대장의 조언을 전격적으로 수용했다.
그것이 흑룡회 본부의 의심을 누그러뜨리는 수단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 * *
- 끼이익!
- 쾅!
“우리가 제때 빠져나온 것 같군.”
“그렇습니다. 조금만 지체했어도 서대문에서 발이 묶일 뻔했습니다.”
“생각보다 좌포도청 능력이 뛰어나.”
“수사와 탐문에 일가견이 있습니다. 흑룡회도 경시하지 못하는 조직입니다.”
좌포도대장 최상민이 발 빠르게 대응했으나, 복면인과 부하를 사대문 안에 잡아 둘 수 없었다.
한양 도심을 빠져나온 그들은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며, 밤길 속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