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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평행우주 독식-29화 (29/200)

29화 10장. 나 이런 사람이야

1.

파랑 무리에게 참교육을 시전하던 창수는 자신의 이름이 튀어나오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더부룩한 턱수염으로 산타클로스를 연상하게 하는 남자를 보게 됐다.

“당신이 무기상 라프틴이요?”

창수가 허름한 술집에 찾아온 이유는 양아치 파랑이 무리와 드잡이하는 것이 아니라, 쁘리슥과 연결된 무기상을 만나기 위함이다.

창수는 자신의 이름을 부른 자가 만나고자 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래. 내가 라프틴이다.”

“러시아인이라고 하던데 그렇게 안 보이는군. 체첸인인가?”

창수는 체첸 지역을 방문한 경험이 있다. 4일에 불과한 짧은 시간이지만, 체첸인의 독특한 외모가 인상에 남아 있다.

통뼈 스타일의 강건한 몸, 두꺼운 목, 덥수룩한 수염,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는 듯한 오만한 눈빛.

창수는 라프틴을 보자마자 체첸인이라는 걸 바로 알아봤다.

“오호. 주먹만 센 게 아니고 눈썰미도 좋구만. 맞아. 나는 체첸 사람이다.”

“체첸인은 러시아인을 증오하는데 당신은 특이하군. 러시아인 행세를 하다니 말이야.”

역사적으로 체첸과 러시아는 악연이 깊다.

흑해로 진출하려는 러시아의 남하정책 이후 체첸과의 무력 충돌이 본격화됐고, 러시아가 체첸을 복속한 뒤에도 끊임없는 독립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1942년 스탈린에 의해 자행된 강제 이주를 체첸은 최악의 사건이라고 말한다.

37만 명에 달하는 체첸인들이 아무런 대비 없이 카자흐스탄으로 추방된 후 절반 이상이 첫 겨울을 버티지 못하고 동사하거나 굶어 죽었다.

체첸인은 러시아인에게 증오심을 가지고 있다. 러시아인을 상대로 물건을 빼앗고 사기를 치는 것을 범죄가 아니라 통쾌한 응징이라 여긴다.

창수는 러시아인 흉내 내는 라프틴이 체첸인답지 않은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건 비즈니스 때문이다. 돈 벌어서 좋은 데 쓰면 되는 거지.”

“테러단체 지원이 좋은 일?”

“테러단체가 아니라 독립운동을 하는 단체다. 그런데 생각보다 체첸에 대해 아는 게 많구만.”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 들은 이야기가 있지.”

“좋아, 아주 좋군. 여기서 서 있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체첸인이 부득이 러시아인을 상대로 장사해 돈을 번 경우, 상당 부분 민족을 위해 기부하는 것이 불문율이다.

창수는 라프틴이 러시아인 행세하며 번 돈을 체첸 독립운동 자금으로 쓴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라프틴은 자신의 비밀 일부가 드러났음에도 개의치 않고 창수를 사무실로 초대했다.

* * *

“먼저 묻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한 나를 왜 배신한 거지?”

“한국인답게 성격이 급하군. 누가 배반한 것인지 묻는 게 순서 아닐까?”

“그렇군. 누구인지 알려 주겠나?”

“너를 습격하려 한 자는 로스토프 민병대 제3조장 예고르다.”

“예고르라는 놈이 주동한 거고, 그 윗선은 모르는 건가?”

“그렇다. 로스토프 민병대 지휘부도 지금 어이없어하고 있지.”

“예고르가 날 노린 이유가 뭐지?”

“돈이지 뭐. 그 자식이 도박 빚이 상당했거든. 돈푼깨나 있어 보이는 동양인을 보니 눈깔이 뒤집힌 거다.”

“민병대가 도박에 빠질 만큼 한가한 직업이라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정신력이 나약한 놈들이 도박에 빠지는 건 흔한 일이다. 그놈은 조장감이 아니었던 거야.”

의외로 정보를 손쉽게 얻었다.

물론, 라프틴의 말이 사실이라는 보장이 없다. 하지만 창수는 최소한 자신을 노린 자의 윤곽을 알 수 있게 됐다.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때.

“예고르라는 놈의 정보를 줘. 그러면 당신과 문제는 없는 일로 하지.”

“정보를 굳이 알 필요 없을 거다.”

“왜지?”

“네가 죽였으니까. 똘마니 세 놈하고 함께.”

“흐흠……. 설마 꼬리를 자르는 건 아니겠지?”

“꼬리를 잘라서 누가 이득을 볼까?”

응징할 대상을 잃었다.

창수는 자신이 처단한 추적자 4명이 하수인일 거라 생각했다. 배신을 주도한 누군가가 아직 살아남아 있다고 판단한 것.

만약 라프틴의 말대로 예고르가 배신 주동자고 이미 죽었다면, 추가 보복 대상을 무엇으로 삼아야 할까?

“주동자가 죽었으니, 그걸로 끝내자는 건가?”

“대금을 지불하고 물건을 챙기지 않았나? 뭐를 더 원하는 거지?”

“조직원을 단속하지 못한 로스토프 민병대가 책임을 져야 할 것 아니야?”

“로스토프 민병대는 가난한 놈들이다. 보상금을 달라고 해도 지불할 능력이 없어. 아니면 물건으로 달라는 건가?”

“할인을 원한다. 추가로 구매할 것이 있거든.”

“할인이라면 가능하지. 얼마를 원하나?”

“50%.”

“50%는 너무 과하다. 30%가 한계야.”

“40%까지 양보하지. 그 이하는 안 돼.”

“흠……. 내 몫을 포기할 수밖에 없군. 좋아 40% 할인으로 하지. 하지만 이번뿐이다.”

창수가 세운 최우선 목표는 배신자 처단이다. 그리고 다음 순위는 무기 밀매 조직과 관계 정리.

배신이 예고르 주동으로 이루어졌다는 라프틴의 말이 사실이라면, 창수의 목표는 모두 달성된 것이다.

그러나 라프틴의 말이 진실이라는 걸 현재 확인할 방법이 없다.

대안으로 창수는 다소 무리한 할인을 요구했다. 만약 할인이 이루어지고, 무기 매매가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라프틴의 말을 어느 정도 신용해도 될 터.

“알았다. 한 번이면 족하지. 그럼 카탈로그 좀 볼까.”

“카탈로그라니? 여기가 백화점인 줄 아나?”

“무기 백화점이지. 그리고 손님이 물건을 사는데 물건 소개서 정도는 봐야 할 것 아니야? 소비자의 권리 모르나?”

“커험……. 진상 손님일세…….”

라프틴은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구매할 수 있는 무기 목록을 건네줬다.

평소 같으면 창수의 요구를 거절했을 거지만, 지금은 자신도 지은 죄가 있어서 외면하기 어려웠다.

‘오! 러시아 놈들이 이런 것도 파네!’

무기 목록은 무기상이 가진 중요한 자산이다.

창수는 큰 기대 안 하고 라프틴이 거래에 임하는 자세를 알아보려 말한 것인데, 의외로 쉽게 무기 목록을 보게 됐다.

그리고 거기서 생각하지 못한 것을 발견했다.

- 척!

“이 정도 구매하겠다. 언제까지 준비할 수 있지?”

“시간은 문제가 아니야. 그런데 물량이 너무 많잖아! 300만 달러가 말이 돼? 이거 다 할인받겠다는 거야?”

“당연히 40% 할인이지. 그리고 물량은 이미 로스토프 민병대와 합의한 거야.”

“무슨 말이야? 그게?”

“내가 두 번째 거래 물량이 10배 이상 될 거라고 말하니, 알렉산더라는 자가 좋아 죽을 표정을 지으면서, 얼마든지 더 주문해도 된다고 했어. 내 말이 믿기지 않으면, 로스토프 민병대에 확인해 보든가.”

“젠장! 빌어먹을…….”

이렇게 까다로운 ‘손놈’은 정말 오랜만이다.

라프틴은 사전 합의를 들먹이는 창수의 논리에 밀려, 눈앞에서 30만 달러를 놓치게 됐다.

‘조금 비싸도 신상이니 써 봐야지. 돈은 이렇게 쓰라고 버는 것 아닌가?’

창수는 본래 10만 달러 정도 구매하려 했다. 하지만 무기 목록에 나와 있는 신상품의 가격이 15만 달러에 달하기에 구매 예산을 대폭 늘렸다.

일반인이라면 해서는 안 되는 충동구매. 하지만 천문학적인 재산을 가진 창수에게는 부담 없는 쇼핑일 뿐이다.

* * *

3월 22일, 창수는 무기와 장비를 구매하기 위해 러시아 크라스노다르로 날아갔다. 이곳은 인구 77만의 중규모 도시로 로스토프 온 돈에서 남쪽으로 240km 떨어져 있다.

창수가 매매 지역으로 크라스노다르를 택한 것은 로스토프 민병대를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세력권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는 것.

다른 이유는 로스토프 온 돈 사법 당국이 아직도 정체 모를 아시아인을 추적하고 있다는 점이다.

크라스노다르의 인구가 34만 명 적지만, 경쟁 관계에 있는 도시로, 로스토프 온 돈 사법 당국의 영향력이 제한적이다.

“저번 불상사는 로스토프 민병대를 대표해 사과합니다.”

“지난 일보다 앞날이 중요합니다. 오늘 거래가 무탈하게 이루어지면, 과거는 잊힐 겁니다.”

“그 점 걱정 마십시오. 로스토프 민병대장 다닐 지르코프의 이름을 걸고, 안전한 거래를 보장하겠습니다.”

이번 거래가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긍정적인 사인이 여러 번 감지 됐다.

거래 지역을 크라스노다르로 지정한 창수의 요구가 선선히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그가 지정한 창고로 무기와 장비를 입고하기로 합의했다.

게다가 창수의 협상 파트너가 로스토프 민병대를 지휘하는 다닐 지르코프다.

어느 정도 거래의 안정성이 확보된 상황.

그러나 창수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창고에서 물건을 확인하고 90만 달러를 입금하겠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크라스노다르를 떠난 뒤 입금하겠습니다. 단, 이 조건은 이번뿐입니다. 다음번 거래는 정상적으로 대금이 입금될 겁니다.”

“좋습니다. 서로 믿음이 필요하니, 한 번 정도는 불편을 감수해야죠.”

‘나와 거래를 지속할 의지가 확실하군. 이걸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하나?’

사실 이번 거래는 만만치 않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무기상 라프틴과 로스토프 민병대가 또다시 배신하지 않는다는 확실한 보장이 없으니까.

만약 창수가 마법방어구를 챙기지 못했다면, 엄두를 내지 못했을 거다. 그런데도 창수가 거래를 시도하는 것은, 장기적인 무기 공급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창수는 로스토프 민병대장 다닐 지르코프의 우호적인 자세를 보고, 자신의 구상이 맞아 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됐다.

* * *

크라스노다르에서 성공적으로 거래를 마친 창수는 한국으로 귀국한 뒤 평행우주 조선 거점으로 넘어가, 구매한 무기와 장비를 마법금고에 보관했다.

그리고 한양 청계천 판자촌 주민에게 쌀과 소고기를 지원한 것이 한 달이 넘었기에, 다시 같은 양을 구매해 지원했다.

그 외에 몇 가지 잡다한 일을 처리한 창수는, 다시 한국을 떠나 3월 28일 월요일, 미국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월래스’사를 방문했다.

“볼트22의 성능을 알아보러 왔습니다.”

“구매하려는 겁니까? 아니면 시험하려는 겁니까?”

“성능을 봐야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할 수 있겠죠.”

“아……. 미안합니다. 제가 손님 대하는 게 서툴러서요.”

월래스사는 예상한 것보다 규모가 작았다. 상주 직원도 2명에 불과한 영세업체.

창수를 상대한 대표 앤드류도 무언가 나사가 빠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첫인상이 엉망이야. 장사할 생각은 있는 건가?’

인터넷과 SNS에 올라온 정보가 잘못된 것일까?

기대했던 것과 큰 차이를 보이는 월래스의 실상과 앤드류를 보고 실망한 창수.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소문에 따르면, 볼트22가 지구 역사상 최강의 냉병기라고 하더군요. 제작자로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볼트22를 사랑하는 고객들의 과대평가라 생각합니다. 최강이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21번의 실패를 자양분 삼아 만든 거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성능이 있다고 하던데요. 이것도 과장인가요?”

“21번 실패했다는 말은 맞습니다. 하지만 볼트22 못지않은 제품도 많습니다.”

‘헐! 뭐야 이 사람? 설마! 나에게 축객령 내리는 건 아니겠지?’

손님이 제품을 칭찬하는 낌새를 보이면, 판매하는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 당연한 일.

하지만 앤드류는 창수의 말에 추임새를 넣기는커녕 볼트22를 과대평가된 제품이라 말하고 있다.

이건 창수에게 물건 안 판다는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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