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9장. 비싸게 더 비싸게
1.
김근홍의 예측이 맞았다. 3월 7일 월요일, 에릭 찬의 배후 인물이 면담을 요청했다.
면담 장소는 김근홍의 자택 지하에 마련된 회의실. 창수는 이번에도 긴 로브와 황금마스크를 착용했고, 상대방은 유사한 차림에 석고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수행원 2명을 대동하셨군요. 합의 사항이 아니라고 보는데요.”
초반부터 신경전이 벌어졌다.
면담 테이블에는 창수와 석고마스크만 앉아 있고, 면담 주선자인 김근홍은 테이블 중간에서 두 발짝 떨어진 위치에 서 있었다. 이건 사전에 협의한 배치로 문제가 없다.
창수가 언짢게 여긴 것은 석고마스크 뒤에 2명이 배석하고 있다는 점.
“감정사들입니다. 워낙 큰 물건이라 확실한 검증이 필요합니다. 추가 감정을 허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검증은 필요하죠. 하지만 반복해서 감정하면 지난번 감정사가 섭섭함을 느끼지 않을까요.”
오늘 석고마스크가 동원한 수행원은 모두 7명. 5명이 회의실 밖에서 대기 중이다. 그러나 어디에도 에릭 찬은 보이지 않았다.
이건 석고마스크와 에릭 찬 사이에 이상기류가 있음을 암시한다.
“정확성이 우선이라고 봅니다. 그 사람도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알겠습니다. 감정하시죠. 충분히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석고마스크가 에릭 찬을 믿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창수는 귀중한 정보를 알아내고 추가 감정을 허락했다.
“2,255캐럿 천연 다이아몬드 원석이 맞군요.”
“그렇습니다. 크기, 색상, 투명도 뭐 하나 빠지지 않은 최상급 다이아몬드 원석입니다.”
“최상급이 될지는 아직은 모르는 이야기죠. 좋습니다. 원석을 구매하고 싶은데 얼마에 파실 건가요?”
“원석으로 팔 생각은 없습니다.”
“예? 그러면 세공 후 나석으로 판매한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계산해 보니 1,011캐럿, 550캐럿, 그리고 280캐럿 다이아몬드 나석을 만들 수 있더군요.”
“흠…….”
벌써 정밀 감정을 3번 거쳤는데 이상이 있을 리 없다. 석고마스크가 동원한 감정사들도 다이아몬드 원석이 진품이라는 걸 확인했다.
석고마스크는 담담한 어조로 원석 구매 의사를 밝혔으나, 예상하지 못한 창수의 말에 당황하게 됐다.
“아시다시피 530.30캐럿 컬리넌I의 가치가 4억 달러입니다. 273.85캐럿 센테너리의 가격이 1억 달러지요. 550캐럿과 280캐럿 나석을 만들면 그 정도 가치는 있을 거라 봅니다. 1,011캐럿은 적어도 12억 달러 가치가 나갈 거고요.”
“가치 평가가 황당하게 과하군요. 컬리넌I은 영국을 대표한다는 상징성 때문에 가격에 거품이 있는 겁니다. 그리고 센테너리는 D컬러 등급을 받은 최상급 다이아몬드 나석입니다.”
“아니요. 절대로 과한 가격이 아닙니다. 이 원석은 D컬러는 물론이고, 최상의 투명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10캐럿이 넘는 대형 다이아몬드에 이런 원석이 있다는 건 기적이죠. 컬리넌I이 영국을 대표한다고 하지만, 앞으로 태어날 나석은 세계를 대표하는 걸작이 될 겁니다.”
“어허……. 이것 참…….”
석고마스크는 창수의 논리적인 말에 마땅한 대거리를 찾지 못했다.
석고마스크가 당혹감을 느끼는 것은 에릭 찬의 말과 달리 창수가 2,255캐럿 다이아몬드 원석 가치를 정확히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옆에 에릭 찬이 있었다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져 물었을 터. 수행단에서 배제한 것이 뼈아프다.
- 슥!
하는 수 없이 석고마스크는 고개를 뒤로 돌려 감정사들에게 자문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회장님, 나석에 대한 평가는 일리가 있습니다. 원석 출처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감정사 한 명이 석고마스크에게 다가와 손으로 입을 가리며 귓속말로 조언했다.
“다이아몬드 원석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시군요. 그런데 어디서 채굴한 건가요? 킴벌리 프로세스 증명서는 있는 건가요?”
킴벌리 프로세스는 분쟁 지역에서 생산하는 블러드 다이아몬드(폭력에 의한 강제 노동으로 생산된 다이아몬드) 유통을 막기 위해 만든 인증 시스템이다.
유엔 총회를 통해 의결됐으며, 한국을 포함해 53개국이 가입해 있다.
이 다이아몬드 원석은 블러드 다이아몬드가 아니다. 하지만 출처를 알릴 수 없는 창수에게 곤혹스러운 질문일 수 있다.
“지금 단계에서 공개할 이유가 없지요. 그리고 원산지 증명이 문제인가요? 그 정도 능력도 없다면, 이 보물을 가까이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험. 말이 그렇다는 거죠. 누가 능력이 없다고 합니까?”
“국가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이 다이아몬드가 필요한 것 아닌가요? 쓸데없는 이야기는 서로 안 했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출처 이야기는 그만하죠. 대신 가격을 좀 조정하죠.”
‘휴……. 간신히 고비를 넘겼네. 선배님 조언을 들은 것이 천만다행이야.’
면담을 시작하기 전에, 김근홍은 상대방이 치고 들어올 수 있는 포인트를 나열하면서 대응책을 알려 줬다.
만약, 김근홍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 창수가 수세에 몰릴 수 있다.
위기를 넘긴 창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다음 수순을 생각했다.
“3가지 나석 중 어떤 걸 원하십니까? 그걸 정해야 얘기가 되지 않을까요?”
“제대로 된 나석이 완성되려면 최소 2년은 걸릴 겁니다. 원석을 파시죠. 10억 달러면 될 거라 봅니다.”
“세공 비용이 아무리 많이 들어도 1,000만 달러 수준입니다. 7억 달러를 할인해 달라는 건 말이 안 되죠.”
“욕심이 과하군요. 원석과 나석의 가격은 일반적으로 2배 차이가 납니다. 10억 달러도 후한 가격입니다.”
“그건 작은 다이아몬드에나 통하는 말입니다. 이 다이아몬드 원석으로 세계 최고 다이아몬드 나석을 만들 수 있습니다. 독보적인 보물에 과도한 할인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음……. 잠시만 논의할 시간을 주십시오.”
“좋습니다, 하지만 너무 오래는 안 됩니다.”
석고마스크는 가격을 깎아 보려고 노력했으나, 탄탄한 논리를 가진 창수의 대응에 막히고 말았다.
석고마스크는 자리에서 일어나 감정사들과 함께 회의장 구석으로 이동해 논의를 시작했다.
<에릭 찬 그놈의 말과 너무 다르잖아. 3억 달러면 팔 거라고 하더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자가 판단 착오 한 겁니다. 최고 등급이 가능한 2,255캐럿 다이아몬드 원석을 헐값에 팔 리 없습니다.>
<젠장할! 그러면 어쩌자는 거야? 달라는 대로 17억 달러를 줘야 하는 거야?>
<최대한 저렴하게 구매하도록 노력을 해야 하지만, 저 원석을 반드시 확보해야 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격이 오를 겁니다. 그리고 시쩌뚱 일파의 눈을 피해 자금관리 하기에도 최적입니다.>
10캐럿 수준의 어중간한 다이아몬드의 경우 투자 효과가 떨어지지만, 세계에서 2번째로 큰 대형 다이아몬드 원석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다이아몬드 가격은 꾸준히 상승했다. 금 보유보다 더 높은 투자 가치가 있다.
게다가 17억 달러를 금으로 환산하면 24톤에 달한다. 이 물량을 비밀리에 보관하고 관리하기 어렵다.
반면 눈앞에 보이는 다이아몬드 원석은 451g에 불과하다. 중국 정부의 이목을 피해 은닉하는데 안성맞춤.
“13억 달러로 하죠. 2년이라는 시간의 가치를 생각해야 합니다.”
“15억 달러. 그 이하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최종 협상안입니다.”
“휴……. 어쩔 수 없군요. 15억 달러로 하죠.”
“좋은 선택입니다.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절실한 사람이 을이 될 수밖에 없다. 석고마스크는 결국, 한화 1조6,500억 원에 해당하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지불하고, 무게 451g에 불과한 광물을 손에 넣었다.
‘하하하! 말도 안 되는 돈이 들어왔군! 바로 이게 비즈니스지!’
씁쓸함을 보이는 석고마스크의 눈을 보며, 창수는 속으로 광소를 터트렸다.
이건 승자만이 느끼는 쾌감.
2.
“감사합니다, 선배님. 덕분에 좋은 가격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석고마스크 일행이 떠나자 창수는 김근홍에게 진심을 담아 감사 인사를 전했다.
창수가 애초 기대한 다이아몬드 원석 가격은 1,800억 원. 그보다 9배 이상을 받게 된 것은 김근홍의 조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감사는 내가 해야지. 나도 단번에 1억 5,000만 달러를 벌었으니까. 정말 생각하지 못한 대박이야.”
“그건 당연히 받아야 할 노력의 대가죠.”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다. 그리고 담력이 보통이 아니더구나. 아까 흥정하는 거 옆에서 보고 있는데, 내가 다 떨리더라.”
“가면을 쓰니 자신감이 는 것 같아요. 그리고 선배님이 저 사람의 정체를 알려 줘서 수월하게 상대한 겁니다.”
김근홍은 창수로부터 이번 거래 금액의 5%인 7,500만 달러를 수수료로 받았다. 그리고 석고마스크에게도 같은 금액을 받았다.
한화 1,650억 원에 해당하는 놀랄 만한 거액.
그러나 이 돈은 공짜가 아니다. 김근홍은 창수에게 2,255캐럿 다이아몬드 원석이 가지는 진정한 가치를 자세히 설명하며, 협상 논리의 기틀을 세워 줬다.
그리고 석고마스크가 상하이방의 자금 관리자 아윈이라는 것을 알려 줘, 협상을 수월하게 만들었다.
현재 상하이방은 시쩌뚱의 공세에 밀려 세력이 급속히 약화하고 있다. 당장 시쩌뚱에게 반격하고 싶으나, 여론이 좋지 않다.
대안으로 상하이방은 장기전을 계획하고 있다.
장기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막대한 군자금과 보급이 필수적. 그들은 전성기에 축적한 돈으로 금과 보석을 집중적으로 매입하고 있다.
오늘 아윈이 구매한 대형 다이아몬드 원석은 상하이방의 미래를 위한 든든한 군자금이 될 보물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아윈이 가진 취약점이기도 하다.
정체를 간파당한 아윈이 협상에서 창수에게 일방적으로 끌려다닌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크크크. 뺀질거리던 아윈이 마스크 뒤에서 부들거리던 게 다 보이더군. 정말 통쾌했어.”
“선배님 고객에게 너무 감정적인 거 아닙니까?”
“고객은 무슨. 저놈에게 시달린 거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그래도 오늘 시원하게 복수해서 다행이지. 이제 속 시원하게 빠이빠이 하면 되는 거야.”
최근 비즈니스로 김근홍과 가장 많이 접촉한 사람이 아윈이다. 창수가 위탁한 금도 상당 부분 아윈의 수중에 들어갔다.
상하이방 자금 운영자 아윈이 최대 고객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그런데도 김근홍이 악감정을 가지는 것은 아윈이 타인을 아랫사람처럼 다루는 괴팍한 성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아마도 대기업을 창업하고 운영한 우월감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비록 상하이방을 등에 업은 땅 짚고 헤엄치기라 해도.
평생 쓰고도 남을 돈을 벌어들인 김근홍은 아윈을 고객에서 ‘손놈’으로 격하했다.
“이제 상하이방하고 거래 안 하려고 생각하는 겁니까?”
“응. 그래. 큰 거 하나 했으니 손 털어야지. 계속 상하이방하고 엮이면, 정말 시쩌뚱에게 저격당할지도 몰라.”
“음……. 그러면 다음 거래는 누구하고 하나…….”
“금 거래는 걱정하지 마. 내가 먹는 마진 줄이면, 팔 데 얼마든지 있어.”
수수료를 절반으로 낮추면, 상하이방과 거래할 필요 없다.
김근홍은 상하이방과 거래를 중단한다는 말을 듣고 시큰둥한 창수에게 대안이 있음을 말했다.
“금이 아닙니다.”
“금이 아니야? 그러면 뭔데?”
“오늘 판매한 것보다 더 큰 다이아몬드 원석이 있습니다.”
“헐!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