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평행우주 독식-18화 (18/200)

18화 6장.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3.

2월 21일 월요일 대광금은방 찾은 창수는 장두호로부터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듣게 됐다.

[당분간 금-은 거래를 할 수 없다. 최소 6개월은 잠수해야 한다.]

이유를 묻는 창수에게 장두호는 월랑부대가 궤멸한 것에 놀란 일본 핵심조직이, 매수한 고위급 조선 관리들을 압박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 그들이 창수의 존재를 모르지만, 거래를 계속하면 조만간 정체가 발각될 거라는 것이 장두호의 판단이다.

은 그래뉼 판매가 막힌 창수는 돌파구를 찾기 위해 은퇴한 체탐인 기철민을 만났으나, 그도 장두호와 같은 말을 했다.

‘생각보다 일본 세력이 조선에 뿌리를 깊숙이 내린 거야. 그러면 꼼짝없이 6개월간 손 빨고 있어야 하는 건가?’

창수는 당연히 해야 할 응징을 한 것이다. 하지만 월랑부대의 배후는 예상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반년간 금-은 거래를 중단하는 건 너무도 뼈아프다.

장두호와 기철민이 충고한 것처럼 반년 간 숨죽이며 산다면, 추정되는 경제적 손실이 최소 4,000억 원이다.

‘조선에서 거래가 불가하다면, 다른 나라로 갈 수밖에 없지.’

천문학적인 돈벌이를 포기할 수 없다.

생각해 보면 금 매각을 태국에서 했다. 은 그래뉼도 다를 바 없다. 조선이 우선이지만, 판로가 막힌다면 타국으로 가는 것도 선택의 하나.

‘어디를 가든 먼저 호패를 만들어야겠군. 호패 없이는 장거리 이동이 힘들어.’

호패는 조선에서 사용하는 신분증이다. 원나라에서 개발돼 고려 말기에 도입된 뒤, 조선 세조 5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됐다.

호패는 군역, 부역, 세금 부과를 원활하게 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만 16세가 되면 의무적으로 등록한 후 항상 지니고 다녀야 한다.

호패를 지니지 않고 외출하다가 적발되면 중형을 받을 수 있다. 한양 내부에서 포졸의 검문검색이 적지만, 한양을 벗어나면 수시로 호패 검사를 받는다.

투명망토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호패 없이 장거리 이동이 어렵다.

- 덜컹! 덜컹!

“호패를 보여 주시오.”

2022년 2월 23일 오후 3시 50분, 한양에서 출발한 기차에 타고 있던 창수는 의주역 도착을 10분 앞에 두고 검문을 받았다.

의주 북쪽에 흐르는 압록강을 넘으면 금나라다. 2인 1조 무장병력이 의주역에 도착하기 전에 불순분자를 색출하려고 검문에 나선 것이다.

- 척!

“여기 있소.”

“반가 분이시군요.”

“뭐. 보는 대로요.”

“의주에는 어떤 용무로 가시나요?”

“일가 혼인이 있어 가는 길이오.”

“아. 그러시군요. 좋은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오! 호패를 좋은 거 구하니, 확실히 대접이 융숭하구만.’

호패도 등급이 있다. 당상관 이상은 상아와 뿔 같은 고가 재료로 호패를 만든다. 일반백성들은 평범한 잡목으로 만든 호패를 가진다.

창수가 마련한 호패는 고급 회양목을 사용해 만든 것으로, 신분이 양반임을 나타낸다.

암시장에서 일반 호패 제작단가가 1,000환(100만 원)이다. 반면, 양반 호패는 비용이 50만 환(5억 원)으로 급격하게 상승한다.

웬만큼 부유하지 않으면 손에 넣을 수 없는 사치품.

그런데도 창수가 양반 호패를 구매한 이유는, 조선에서 양반과 양인이 가지는 사회적 지위가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한국과 다르게 조선은 공식적으로 계급이 인정되는 세상이다.

물론, 한국도 실질적으로 계급 사회라고 말할 부분이 있다. 그러나 적어도 한국은 공개적으로 인간을 차별하지 못한다. 그 짓 하다가 사회에서 매장당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호패 검사를 하는 무장 병력은 처음에 거만하게 행동하다가, 창수의 호패를 보고 공손하게 대했다.

만약 창수가 양인 호패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들은 간단한 질문이 아니라 짐 검사는 물론이고 몸수색도 했을 거다.

‘의주에 도착했군. 이제 관건은 무사히 압록강을 넘는 건데…….’

조선은 금나라와 압록강 인근에서 빈번하게 전투를 벌였다.

양국 왕래를 전면적으로 막는 건 아니지만, 금나라로 출국하려는 대상을 철저하게 조사했다.

마법자루도 예외는 아니다. 강제로 열개해 수출 금지 물품과 무기가 있는지 조사한다.

창수는 마법자루 안에 총기와 고순도 은을 담아두고 있다. 조사가 시작되면 발각될 것이 뻔한 일.

투명망토도 마찬가지. 출국장소에 투명망토를 탐지하는 장치가 설치돼 있다.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금나라로 진입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강가에 나가 보면 길이 있겠지. 일단 배부터 채우자.’

북한산 바위를 통해 평행우주로 진입한 뒤, 창수가 달라진 점은 여유가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웬만한 난관에 당황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설령 압록강을 넘다가 문제가 생긴다 해도 한국으로 도피하면 그만이다.

4.

‘왕만두 집에서 들은 이야기가 맞군. 여기는 사람이 걸어서 갈 만큼 얼음이 두꺼워. 의주 토박이 말이 정확한 거야.’

의주에 도착한 창수는 시장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했다. 그중에서 가장 정확한 정보를 준 것이 왕만두집이다.

의주를 대표하는 전통음식 왕만두를 3인분 먹으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자, 기분이 좋아진 주인이 이것저것 여러 가지 이야기를 술술 알려 줬다.

왕만두집 주인의 말에 따르면, 의주 중심부에서 동북쪽으로 8km 떨어진 지점에 압록강 폭이 좁아지고 얼음이 두껍게 어는 지역이 있다고 했다.

강폭이 좁아지면 유속이 빨라 얼음이 잘 얼지 않는 경향이 있다. 창수는 왕만두집 주인이 잘못된 정보를 알려 줄 가능성을 생각했다.

하지만 현장에 와보니 강폭이 좁고 얼음이 단단하다는 말이 사실이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바로 눈앞에서 20여 명이 압록강을 걸어서 넘어가는 장면을 봤으니까.

‘저 사람들 쫓아가면, 길을 잃지는 않겠군.’

창수의 목적지는 압록강 근처가 아니라, 금나라의 수도 선양이다.

스마트폰에 깔려 있는 오프라인 지도를 살펴보니, 압록강을 건넌 후, 해발 200-300m로 보이는 산속을 밤새도록 걸어야, 선양으로 연결된 도로와 만날 수 있다.

지도가 있다고 하지만, 생소한 길을 야밤에 걸어가다가 길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오프라인 지도가 평행우주 너머 이곳 지리와 동일하다는 보장도 없다.

한 무리의 상단이 앞에서 가고 있는 건 행운이다. 뒤만 졸졸 따라가면 되기에.

“이보시오. 노형. 등짐에 들은 게 뭐요?”

“6년근 홍삼입니다.”

“제대로 된 품목을 골랐구려. 후시꾼에게 홍삼만 한 게 없지.”

상단의 뒤를 쫓아 30분 정도 이동할 무렵,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상인이 무리에서 떨어져 다가와 창수에게 말을 걸었다.

창수는 배낭을 마법자루에 넣고, 평범한 상인처럼 등짐을 맨 상태였다.

상인은 홍삼을 운반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 밀무역 꾼으로 여긴 것.

“그렇죠. 홍삼 덕분에 근근이 먹고 삽니다. 다른 거 해 봐야 발품도 안 나오더군요.”

“맞는 말이오. 예전에 나도 한지 가지고 갔다가 본전도 못 건지고 골병든 적이 있소. 그런데 혹시 우리가 강 건너는 시간을 알고 맞춰서 온 거요?”

“아니요. 저는 그냥 이 길이 좋다는 말을 듣고 온 겁니다.”

“아하. 초행이구려.”

“예. 그렇습니다.”

“우리 상단 뒤에 바짝 따라붙으시오. 산이 낮아 보여도 복잡해서, 초행이면 애먹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해주신다면, 정말 감사하죠.”

“하하하. 조선 상인들끼리 서로 돕는 일이니 괘념치 마시오.”

상인 천진우는 걸걸한 목소리와 다부진 인상과 달리, 창수에게 매우 친절했다.

조카뻘로 보이는 창수에게서 친밀감을 느낀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어쨌든, 창수에게는 좋은 일이다.

* * *

“모두 정지! 여기서 한 식경 쉬고 간다! 건량하고 육포 꺼내도록! 모닥불도 피우고!”

산길에 접어든 지 6시간이 지날 무렵. 제법 넓은 공터가 나오자, 천진우가 상단 이동을 멈추고 휴식을 지시했다.

한 식경은 밥 먹는 시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대략 30-60분이다.

이전에 2번 휴식이 있었으나, 10분 정도였다. 이번에는 장시간 머물면서 요기를 할 모양이다.

저녁을 든든하게 먹었어도 등짐을 진 상태에서 산행을 6시간 하면 에너지가 고갈된다. 이쯤에서 음식물을 섭취하는 건 노련하고 현명한 선택이다.

“노형. 이쪽으로 와서 모닥불 쬐시오. 산이라 땀이 식으면 무척 춥다오.”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영하 7도는 될 듯한 추운 날씨다.

10분 휴식이면, 걸으면서 뜨거워졌던 몸이 적당히 식는 시간이 된다. 그러나 10분이 넘어가면, 몸이 급속히 식어 저체온증에 걸릴 수 있다.

상단 사람들은 천진우의 지시에 따라 모닥불 네 군데를 만들고, 옹기종기 모여 건량과 육포를 먹었다.

겉옷 안쪽에 발열조끼를 착용한 창수는 모닥불이 필요 없다. 하지만 천진우의 호의가 고마워 조끼 스위치를 끄고 모닥불로 다가갔다.

“체력이 대단한가 보오. 초행길에도 쌩쌩하니 말이오. 여기서 낙오한 사람이 수두룩하오. 평지 안주에서 펄펄 날아도 산길에 맥을 못 추는 사람이 상당수요.”

“제가 평소 산길을 많이 오가서 적응이 돼 있습니다. 초행길이라 어렵기는 하지만, 뒤처질 정도는 아닙니다.”

사전준비가 큰 도움이 됐다.

창수는 무게 28kg에 달하는 배낭을 메고 북한산 산책로를 올랐다. 현재 창수는 은 그래뉼 무게를 대폭 줄여, 전체 짐 무게를 20kg으로 낮춰 놨다.

반면, 상단 사람들은 40kg에 달하는 짐을 나르고 있다. 창수가 상단의 이동을 따라가지 못할 리 없다.

“어쩐지 산을 잘 타더라니. 우리 안주상단에 자리가 비는데, 들어올 생각 있으면 말하시오.”

‘큼! 스카우트구만. 어쩐지 잘해주더라니. 하지만 이 양반아! 나는 부자라고! 찜꾼 같은 거 할 것 같아? 잠깐……. 내가 하는 일이 짐꾼하고 다른 게 뭐지……. 아니야! 달라! 나는 고소득자야!’

안주상단 행수 천진우가 창수에게 친절한 이유가 드러났다. 그는 어두운 산길을 거침없이 이동하는 창수의 능력을 보고 영입을 생각한 것이다.

능력을 인정해주는 건 좋지만, 저 임금 짐꾼은 사양이다.

“제안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미 약조한 곳이 있습니다.”

“흠……. 좀 아쉽구려. 하긴, 노형 같은 사람을 원하는 곳이 많겠지.”

창수가 속으로 마음을 다스리며 완곡하게 거절하자, 천진우는 미련을 접고 영입 권유를 중단했다. 그리고 인근 지형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알려 줬다.

이건 천진우가 창수를 영입 대상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걸 나타낸다.

여러 가지 정보 중에서 특히 도움이 된 건, 3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는 펑청에, 금나라 수도 선양으로 가는 기차가 있다는 것이다.

스마트폰 오프라인 지도에는 21세기 중국의 철로와 도로가 표시돼 있다. 반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평행우주 금나라의 교통수단은 나와 있지 않다.

천지우의 정보는 창수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

“모두 식사 마쳤나?”

“예. 행수님.”

“그러면 모닥불을 정리하도록. 불씨가 남으면 산불이 날 수 있으니 신경 쓰고.”

“알겠습니다.”

- 척! 척! 척!

“안녕하십니까! 손님들! 톄쟈방의 영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안주상단 사람들이 에너지 보충을 마치고 이동하려는 순간 불청객이 나타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