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평행우주 독식-11화 (11/200)

11화 4장. 위기는 기회다

2.

2022년 1월 31일 밤 10시 30분, 창수는 태국 수완나품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수도 방콕 인근에 위치한 이 공항은 해외 방문객이 태국으로 진입하는 중심 관문이다. 한국 인천 국제공항과 유사한 역할.

“사장님! 여깁니다!”

“티란! 오랜만이야!”

출국장을 나오자, 반가운 얼굴이 창수를 맞이했다. 티란은 창수가 경영했던 여행사의 직원으로 성실하고 믿음직한 인물이다.

코로나 창궐로 여행사를 접은 뒤, 삶이 나락으로 떨어졌던 창수처럼, 티란도 태국에서 힘든 시간을 보냈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일거리를 찾았으나, 관광의존도 높은 태국 경제가 깊은 불황에 빠지면서, 생계가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다.

티란에게 기적 같은 희망이 생긴 것이 바로 2일 전이다. 창수가 전화를 걸어 재고용하겠다고 말한 것.

“캐리어. 주십시오.”

“아니야. 이거 보기보다 무거워. 캐리어는 내가 챙길 거니까. 걱정 말고 운전해.”

“알겠습니다. 사장님. 그런데 방콕은 안 들르실 건가요?”

“촌부리 쪽이 먼저야. 거기 일이 잘 해결돼야. 방콕 쪽으로 갈 수 있어. 숙소는 준비했지?”

“예. 지시하신 대로 마리나 콘도에 예약했습니다. 조용하게 휴식하기 좋을 겁니다.”

수완나품 국제공항은 방콕에서 동쪽으로 40km 떨어져 있다. 창수는 태국에 입국한 뒤 방콕을 들르지 않고, 동남쪽으로 60km 떨어진 촌부리로 이동했다.

티란이 운전하는 자동차 속도를 볼 때, 촌부리에 도착하면 밤 11시 30분이 될 터. 여행에 지친 창수가 마리나 콘도에 도착하자마자 잠이 들 것이 분명해 보였다.

“사장님. 도착했습니다.”

“고생했어. 티란 덕분에 편하게 왔군.”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그러면 편히 쉬십시오.”

“잠깐만. 할 이야기가 있으니, 콘도 안으로 들어가지.”

창수는 자신을 마리나 콘도까지 픽업해주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티란을 만류하고 숙소로 가자고 했다.

이상한 건, 주차장에서 체크인 로비를 거쳐 예약실로 들어가는 동안 무거운 캐리어를 창수가 직접 운반했다는 거다. 매우 소중한 것이 담겨 있는 것일까?

티란은 창수가 왜 자신을 숙소까지 데려가는지 이유를 알 수 없어,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 슥!

“사……. 사장님 이게 무슨…….”

숙소는 침실, 응접실, 화장실, 수영장이 구비된 풀빌라 형태였다.

캐리어를 들고 침실로 들어갔던 창수는 5만 원 권을 무더기로 들고나와 티란이 앉아있는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뜬금없는 돈다발에 놀라 말을 더듬는 티란.

“한국 돈 2억 원이야. 환전할 수 있지.”

“그럼요. 한국 돈은 환전소에서 대환영입니다.”

과거 한국 돈을 들고 외국에 나가면 사용할 수 없었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한국이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 되고, 한국 관광객의 수가 늘어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이제 한국 돈은 태국과 베트남 같은 동남아시아 국가 환전소에서 현지 화폐로 바꿀 수 있다.

일부 점포는 한국 돈을 받고 물건을 팔기도 한다.

여행사에 근무한 티란에게 2억 원 환전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거 다 바꾸면 550만 바트 정도 될 거야. 흔적 남기지 말고 조금씩 바꿔, 그리고 여기 촌부리 근처에 사무실 알아봐.”

“여행사를 이곳에서 여실 생각인가요?”

“아직은 미정이야. 일단 사무실 열고 우리 멤버들 수소문해 봐. 연락 안 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사장님!”

태국 최저임금은 한 달 기준으로 35만 원이다. 편의점 알바 수입이 여기에 해당한다.

식당에서 일하면 40만 원 정도 받고, 대졸 초임은 중소기업이 50만 원, 로칼 대기업이 60만 원이다.

창수는 직원들에게 월 최소 70만 원을 챙겨줬다. 한국 기준으로 박봉이지만, 태국 기준으로 수준급 임금이다.

티란은 창수가 촌부리에서 어떤 사업을 하려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자신을 비롯해 여행사 전 직원들에게 안정적인 소득원이 생겼다는 것.

창수의 지시를 접수한 티란의 목소리에 희망이 가득 찼다.

3.

2월 1일 오후 1시, 창수는 티란이 구해온 랜트카를 몰고 방센비치로 이동했다. 이곳은 창수가 머무는 마리나 콘도에서 남서쪽으로 15km 정도 떨어져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방센비치 인근에는 고급주택이 많다. 그중에서 창수가 도착한 곳은 대지 면적만 1,000㎡(303평)에 달하는 저택이었다.

정문에 다가가자 경비원이 창수에게 용건을 물었다.

“김근홍 대표님과 면담하러 왔습니다. 미리 약속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 지잉!

창수가 신분과 용건을 밝히자, 10초 만에 문이 열렸다.

‘여기는 여전하구만.’

별천지가 따로 없다. 내부에는 200㎡ 넓이 4층 건물이 있고, 널찍한 수영장과 정원이 있었다.

주요 포인트에 경호원이 배치돼 있으며. 비키니 차림의 미녀들이 여럿 보였다.

“선배님. 신수가 훤~ 하십니다.”

“그러냐? 너도 얼굴이 훤하구나. 파산한 여행사 대표 얼굴이 아닌데.”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창수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저택의 소유자 김근홍도 맞장구치며 창수에게 뼈 있는 말을 던졌다.

“저야 죽다 살아났으니 얼굴이 핀 거구요. 선배님은 쭉 잘 먹고 잘살았는데도 여전히 얼굴이 좋으시네요.”

“커커커. 그거야 다 내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지.”

“옳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뭔데?”

“가운데 다리 잘리지 않고, 어떻게 유지하고 계세요?”

“커험! 너! 말이 거칠다!”

“사실이 그렇잖아요. 고작 1년 반 지났는데, 선배님 여친 중에 아는 얼굴이 한 명도 없어요. 너무한 거 아닙니까?”

김근홍의 나이 49세, 창수보다 14살이 많다. 그러나 창수와 동년배로 보일 정도로 피부 관리를 잘하고 있다.

호남형 얼굴에 젊어 보이고, 돈까지 많으니 여자가 몰리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김근홍의 화려한 여성편력이다.

1년 반전 김근홍에게는 미모의 여친 4명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 여친 4명을 모두 갈아치우고 새로운 여친 5명을 집 안에 들여놨다.

태국 여자는 남자를 존중하고 잘 따르는 편이지만, 질투가 강해 바람난 남친과 남편에게 물리적 테러를 가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TV와 신문에 성기 절단과 접합 수술에 관한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오는 나라가 태국이다.

창수는 비난과 걱정을 섞어 김근홍을 타박했다.

“나는 너처럼 한 우물 파는 성격이 아니야. 오는 여자 막지 않고 가는 여자 말리지 않아.”

“그것도 착한 여자들 만나니 통하는 거예요. 언제까지 행운이 있을 거라 생각하시나요?”

“행운일 수도 있지. 하지만 동시에 노하우도 포함돼 있는 거야.”

“노하우요? 돈 말씀하시는 건가요?”

“돈이 핵심이긴 하지. 하지만 더 중요한 게 완급 조절이야. 현지 남자들보다 딱 한 뼘만 잘해 주는 거야. 그러면 여자들에게 원망받을 이유가 없고, 호구 소리 들을 이유도 없어.”

“…….”

김근홍을 비판하던 창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김근홍이 단점이 많은 인간이기는 하지만, 그가 방금한 말은 거짓이 아니다.

여친에게 흥청망청 돈을 쓰지 않으면서도, 여친과 가족이 자립해서 먹고살 기반을 마련해 줬다. 그래서 헤어진 여친이 김근홍에게 극단적인 악감정을 가지는 경우가 없다.

반면, 창수는 한 여자에게 올인해 모든 것을 쏟아부었으나, 돌아온 건 처참한 뒤통수였다.

“에혀. 제가 선배님을 말로 이기겠습니까.”

“커커커. 그래도 오늘은 조금 시껍했다. 너 말발 많이 늘었더라. 그래서 말인데…….”

“예. 그래서요?”

“너에게 줄 투자금 절반으로 삭감이다.”

“예!? 무슨 투자금이요?”

“네가 여행사 다시 시작하면, 내가 10억 정도 투자하려고 했어. 그런데 오늘 너 강짜 부리는 거 보니 열불나서 투자금 5억으로 줄일 거야.”

‘헐! 투자금 5억? 이 양반이 나를 이렇게 생각해 준 건가?’

감동이 밀려온다.

한정식 전문점 가마골에서 떡갈비 서비스 한 접시 받은 것과 비교가 안 되는 큰 감동이다.

창수가 알고 있는 김근홍은 냉정하면서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인물이다.

고향 후배도 아니고, 학교후배도 아닌, 그저 사회생활 중에 만난 창수에게 거금 5억 원을 투자한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

“야! 그 초롱초롱한 눈빛 뭐야! 징그럽게!”

“아니, 뭐. 감사해서요. 5억이 어딥니까?”

“야! 당장 눈빛 공격 그만둬! 안 그러면 2억 5천으로 깎아 버린다!”

김근홍은 소름이 돋았다.

여친에게 큰 선물을 해주고 받던 사랑스러운 눈빛을 남자에게서 받을 줄이야.

속으로 괜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며 자책하게 됐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10억으로 환원……. 아니! 투자 안 받겠다고?”

“예. 오늘 선배님을 찾아온 건, 투자가 아니라 위탁판매 때문입니다.”

“흠……. 나에게 위탁 판매할 게 뭐가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금융 쪽인데.”

김근홍은 유럽 최고 대학교 중 하나인 영국 LSE(런던 정경대)에서 금융공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국제투자은행에서 근무했고 개인투자로 부를 일군 금융전문가다.

김근홍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는 투자다. 그런데 창수가 뜬금없이 위탁판매를 이야기하니, 실없다는 생각마저 가지게 됐다.

- 슥!

“선배님. 일단 이거 감정해 보세요.”

“어? 이거 금원보 아니야?”

“예. 10냥짜리 금원보입니다.”

“여기서 5분만 기다리고 있어. 성분 분석하고 올 테니까.”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저 시간 많으니까요?”

금덩어리를 본 김근홍의 자세가 달라졌다.

금융의 기본의 금이다. 현대적 의미의 지폐는 중세시대 귀금속 세공업자에게 금과 은을 맡기고 보관증을 발행한 것에서 시작됐다.

처음 세공업자는 자신의 금고에 보관증과 일치하는 금과 은을 비치했으나, 고객이 인출하는 양이 10% 미만이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나머지 90%를 가지고 영리사업을 시작했다.

이것이 현대의 ‘지급준비율’의 원형이 되는 것으로, 금과 금융은 떼래야 땔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김근홍이 금원보를 보고 자세를 바꾸는 건 당연한 일이다.

“중량 357g, 순도 96%야.”

“이거 얼마에 팔 수 있을까요?”

“순도 99.9% 금 1g 국제가격이 70달러야. 96%는 67달러에 팔 수 있어. 357g이니, 23,919달러군.”

“수수료를 제하면 얼마인가요?”

“금원보 수량이 얼마나 되니?”

“280개입니다.”

“280개면……. 105kg이군. 그 정도 물량이면 수수료는 없어도 된다.”

“예? 수수료가 필요 없다고요?”

“필요 없는 게 아니고, 너에게 안 받는다는 거야.”

“그러면 누구에게 받을 건가요? 자세히 알려 주세요.”

창수는 김근홍의 말에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평소에 소수점 단위까지 꼼꼼하게 계산하는 김근홍이 적지 않은 수수료를 마다한다는 것이 이상하다.

과도한 친절에 함정이 있을 수 있다.

창수는 김근홍에게 수수료를 받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설명하라고 요구했다.

“당연히 금원보를 사려는 사람에게서 수수료를 받아야지.”

“예? 시세보다 더 주고 금을 사려는 사람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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