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평행우주 독식-7화 (7/200)

7화 3장. 꿀물에 꼬이는 벌레

1.

가마골에서 오랜만에 포식한 창수는 박태섭을 찾아가 은 그래뉼 25kg을 구매했다.

박태섭은 창수가 현금으로 28,750,000원을 지급하자, 놀랍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소액투자자라 여겼던 창수를 만만치 않은 큰손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

- 헉! 헉!

‘아이구! 힘들어! 골병드는 거 아니야! 이거?’

1월 18일 화요일 오후 2시 창수는 은 그래뉼 25kg을 담은 배낭을 메고 북한산 산책로를 올랐다.

배낭의 자체 무게와 갈아입을 옷을 더하면 전체 무게가 28kg에 달한다.

육군 기동군장의 무게가 23kg, 완전군장 무게가 39kg 수준이라는 걸 생각하면, 결코 가벼운 무게가 아니다.

‘아니야! 아직 30대 나이에 이 정도도 버티지 못하면 어떻게 해! 체력 단련한다는 생각하고 열심히 해야 해!’

돈이 무섭다. 창수는 가능한 한 많은 은을 운반해 수익을 극대화하겠다며 욕심부리고 있다. 이걸 건강을 위해서라는 미사여구를 가져다 붙이며 스스로 세뇌하고 있는 상황.

‘커험……. 그나저나 영감님이 어떤 얼굴을 할지 기대되는군.’

어제 장두호는 은화 40g을 보고,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보다 625배 더 많은 고순도 은을 보여 주면 장두호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창수는 근엄한 모습을 보이는 정두호가 당황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조금 유치하지만, 북한산 산책로를 오르며 겪는 고통을 경감해 줄 여흥 거리라 여겼다.

“은 99.99%, 중량 25kg이고 총대금은 875,000환이오.”

‘엉? 영감님이 전혀 놀라지 않는데?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창수의 예감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한국 돈으로 8억 7,500만 원에 해당하는 대형 물건임에도 장두호의 목소리와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살짝 기분이 상한 창수는 한 번 더 찔러 보기로 작정했다.

“모두 금으로 교환하고 싶습니다. 가능할까요?”

“당연히 가능하오. 모두 3,240돈이고 우수리가 2.78g 정도 남소. 우리 점포에 1돈부터 10냥까지 종류별로 있으니, 200환 빼고 다 바꿀 수 있소.”

“10냥 자리는 금괴인가요?”

“금원보하고 금송아지, 그리고 금두꺼비가 있소.”

“그러면 금송아지하고 금두꺼비 섞어서 3,200돈으로 교환해 주십시오. 나머지는 현금으로 주시고요.”

10냥은 100돈이고 375g이다.

원보는 명나라 만력제 이후 사용한 말굽 모양의 화폐다. 금의 경우 5냥과 10냥짜리가 있고, 은은 50냥짜리가 있다.

중국과 중국인이 다수 거주하는 태국에서 금원보 거래가 비교적 활발하지만, 한국에서는 생경하다.

창수는 금 매각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금원보를 배제하고 금송아지와 금두꺼비를 선택했다.

- 척!

“여기 있소. 금송아지 16개, 금두꺼비 16개, 그리고 11,000환이오.”

‘헐! 영감님 재산이 빵빵하구만! 금고에 황금이 가득이네!’

금 3,200돈은 한국 돈으로 8억 2,000만 원이 넘는 거금이다.

창수는 허름한 대광금은방의 주인 장두호가 이 금액을 소화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장두호가 거리낌 없이 금교환이 가능하다고 말할 때도, 미심쩍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금고 속을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 그 안에 오늘 거래 대금보다 몇 배나 많은 금이 보관돼 있던 것.

“간이 금고에 금을 많이 놔두면 위험하지 않나요?”

“위험해도 별수 있소? 금은방을 하려면 감수해야지.”

창수의 물음은 과도한 오지랖일 수 있다. 수십 년간 금은방을 운영하면서 높은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장두호의 금은방 운영에 참견할 ‘짬’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낡고 허름한 금고에 수십억 원 가치가 있는 귀금속을 보관한다는 것에 의구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위험을 줄이기 위해 안전한 곳에 맡기는 방법은 없나요?”

“허허허. 우리 금고가 한양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안전한 금고라오. 다른 곳에 맡겼다가 옮기는 도중에 사고 나는 게 훨씬 위험하오.”

‘엉? 영감님 허풍도 만만치 않네. 저 금고 안전도가 최상급이라고?’

창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평소 과묵하고 진중한 것으로 보이던 장두호의 다른 모습을 봤다고 여긴 것.

“허험! 젊은 손님. 못 믿겠다는 얼굴인데, 이 금고는 마법장치가 돼 있어서, 주인 아니면 열지도 못하고, 열려 있어도 다른 사람은 안에 든 물건을 빼가지 못하오.”

“신기한 마법이군요.”

“그렇소. 한양에도 이런 기능을 가진 금고는 많이 없지. 그리고 이 점포도 허술해 보이지만, 투명망토를 입은 자들도 감지할 수 있는 장치가 있다오.”

“투명망토요?”

창수가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하는 기색을 보이자, 장두호가 정색하면서 대광금은방의 뛰어난 보안장치를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나 마법에 대해서 식견이 없는 창수는 장두호가 점점 더 심한 허풍을 친다고 여겼다.

“투명망토를 착용한 강도들이 요즘 출몰하고 있소. 젊은 손님도 귀중품을 맡기고 싶으면 말하시오. 특별히 공짜로 해주리라.”

“하하. 그럴 상황은 아니고요. 아무튼,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워~ 워~ 이 양반 사짠가? 귀중품을 맡기라고? 씨알도 안 먹힐 소리!’

기분 좋은 거래의 끝마무리가 이상하게 돌아갔다.

장두호가 말을 하면 할수록 신뢰도가 급속도로 떨어진 것.

창수는 무언가 억울한 표정을 짓는 장두호에게 정중히 인사한 뒤, 대광금은방을 서둘러 빠져나왔다.

- 두리번! 두리번!

위험을 느낀 창수는 빠른 걸음으로 북한산 산책로 입구에 도달했다.

그리고 주위를 세밀히 살폈다. 혹시 장두호가 사람을 시켜 미행할 수 있으니까.

‘다행히 꼬리가 안 잡혔군. 그래도 조심하자. 사람이 죄가 아니라 재물이 죄니까.’

지킬 능력이 없으면, 재물은 복이 아니라 화가 될 수 있다.

창수는 자신의 힘이 미약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다고 재물을 포기할 수 없는 일.

현재로써는 최대한 조심하는 것이 유일한 대책이다.

2.

‘아무리 생각해도 위험해. 금은방을 옮겨야겠어.’

무사히 서울 반지하 집으로 돌아온 창수는 대광금은방과 거래를 중단하기로 결심했다.

평행우주를 오간 지 3일째. 그동안 장두호와 3번 거래했다. 너무 빈번한 만남이다.

장두호가 상인들 평판처럼 선량한 사람이라도, 거래 금액이 커지면 욕심이 날 가능성이 있다.

‘한양도 종로에 금은방이 몰려 있을 거야. 조금 멀더라도 중심지로 가는 게 여러모로 좋아.’

한국에서 영업하는 귀금속-금은방 수가 총 15,000개에 달한다. 서울에 5,800개가 있고, 종로 일대에 2,900개 몰려 있다.

한양의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금은방이 유동인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걸 고려하면, 종로 일대에 금은방이 다수 모여 있을 가능성이 높다.

‘수익에만 정신 팔려 정보 수집을 소홀히 했어. 거래를 늦추더라도 종로 금은방 평판을 파악해야 해. 그리고 분산해서 팔아야 해.’

창수가 한 번에 운반할 수 있는 은 그래뉼 중량은 25kg. 이걸 금은방 한 곳에 파는 건 위험하다.

수정귀금속 점원은 1kg에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렇다고 모든 금인방에 은 그래뉼 1kg만 팔아야 한다는 결론은 성급하다. 변두리 수유동에 위치한 금은방의 한계일 가능성이 있으니까.

종로 일대에 있는 금은방의 숫자와 규모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래야 한 금은방에 몇kg을 팔지 계산이 나온다.

‘흠……. 분산 판매는 서울도 마찬가지야. 늘푸름주얼리에 더 가서는 안 돼.’

한양에서 은 매각하는 것만 조심할 게 아니다. 서울에서 금 매각도 행적이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늘푸름주얼리와 이미 두 번 거래를 마쳤다. 더 방문하다 출처를 의심받을 수 있다.

‘투자커뮤니티에서 정보를 얻어야 해. 필요하면 인터넷을 뒤져야 하고. 여유 부릴 상황이 아니야.’

창수는 지난 3일간 성공적인 금-은 재정거래를 위해 온 정신을 집중했다.

이제 8억 원 이상 수익이 예상되는 상태에서, 휴식을 가지며 긴장을 풀려고 했으나, 아직 때가 이르다.

창수는 풀어졌던 마음들 다잡고 정보수집을 시작했다.

* * *

“은 그래뉼 순도 99.99%를 구매하려 합니다.”

“얼마나 필요하신가요?”

“100kg입니다.”

수요일 오후 5시, 창수는 은 그래뉼을 생산하는 무영금속에 직접 방문해 대표 이진수와 만났다.

이 업체는 투자 커뮤니티에서 평판이 좋은 곳은 아니다. 가격이 다른 공장에 비해 2% 높은 것이 단점.

그런데도 창수가 무영금속을 고른 것은 거래 내역을 애초에 남기지 않아, 비밀 엄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음……. 물량 공급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현금이 필요합니다. 아시다시피 이런 거래는 계좌이체와 수표사용이 어렵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현금으로 결제해야죠.”

“시원시원하시군요. 가격은 1g당 1,173원입니다. 100kg이면 1억 1,730만 원이 되는군요.”

“언제 구매가 가능한 가요?”

“결제하면 바로 내드릴 수 있습니다. 재고가 넉넉하게 있으니까요. 현금 조달이 부담되면 나눠서 구매해도 됩니다.”

이진수는 직거래를 원하는 투자자를 숱하게 만났다. 거래 비밀을 지키기 위해 무영금속에 왔음에도, 그들 중 상당수가 현금 지급에 난색을 표하는 이중성을 보였다.

현금 결제를 당연하게 여기는 창수는 수월한 상대.

약간 걸리는 건 큰손이라도 1억이 넘는 현금을 마련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진수는 창수에게 넌지시 분할 구매를 제안했다.

- 척! 척! 척!

“어…….”

창수는 이진수의 제안에 말로 대답 하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 줬다.

배낭에서 5만 원 다발을 꺼내 쌓아놓기 시작한 것.

5만 원 한 묶음은 500만 원이다. 이진수는 묶음이 10개를 넘어가자 창수가 대금을 현금으로 단번에 결제하려 한다는 걸 알게 됐다.

대단한 배포다. 협상을 시작하기도 전에 1억 원이 넘는 돈을 들고 온다는 건 재력이 충분하다는 조건 이외에 대담함이 필수적으로 깔려 있어야 한다.

“1억 1,730만 원입니다. 세보시죠.”

“카운터를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 스르륵!

창수는 5만 원 다발 23개와 낱장 46개를 탁자 위에 올려놓은 뒤, 담담한 어조로 확인하라고 말했다.

이진수는 돈다발을 들어 위폐 여부를 살피더니, 현금계수기에 집어넣고 계산을 시작했다.

“정확합니다. 1억 1,730만 원이군요. 물건은 어떻게 전해 드릴까요?”

“자동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트렁크까지만 운반해 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분석실로 가시죠. 출고하기 전에 무게와 성분 검사를 해야 합니다.”

“검사 시간이 얼마나 걸리나요?”

“X-선 분석기가 있어서 5분이면 됩니다.”

이진수는 거래 전 과정을 꼼꼼하게 처리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계약서도 없는 현금 거래에 작은 이상이라도 발생하면, 거래 자체가 파탄 날 수 있으니까.

‘비싼 값을 하는군. 마음에 들어.’

창수는 오늘 오전부터 종로와 장안평 인근 귀금속-금은방 점포 14곳을 돌아다니며, 한양에서 구매한 금을 분산 매각했다.

그중에서 거래를 한 곳은 10개. 나머지 점포 4곳은 고의로 시간을 지체하거나, 금의 출처를 캐내려는 낌새를 보여 바로 나와 버렸다.

투자커뮤니티에서 평판이 좋더라도 창수에게 맞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예다.

반면, 무영금속 대표 이진수는 창수에게 딱 맞는 인물이다.

시간이 조금 지체되더라도 두 번 일하는 일이 없도록 일처리가 확실하고, 창수의 개인 정보와 현금 출처에 대해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은 구매는 여기서 하면 되고, 금 판매는 조금 더 조심하면 될 거야. 문제는 한양이군.’

무영금속에서 안정적으로 은을 구매할 수 있다는 게 큰 성과다. 금 매각의 경우 창수의 신경을 건드리는 점포를 과감하게 배제하면 된다.

이제 남은 관건은 고순도 은을 매각하고 금을 매입하는 평행우주 한양의 금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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