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2장. 시련은 있어도 포기는 없다
5.
“안녕하세요. 무엇을 찾으시나요?”
“금돼지와 반지를 팔려고요.”
“보증서를 가지고 계신가요?”
“아니요. 이사하면서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면 감정을 먼저 받으셔야 합니다.”
“예. 그렇게 하죠.”
평행우주 조선에서 장두호와 거래를 마친 창수는 한국으로 넘어와 종로에 위치한 늘푸름주얼리를 방문했다.
이곳은 대형 매장으로 자체에 귀금속 감정소를 가지고 있다.
호주머니에 현금이 바닥난 창수가 인터넷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면 찾은 최적 판매처.
친절한 점원의 안내를 따라간 그는 금돼지외 금반지를 감정사에게 건네줬다.
“금돼지 18.75g, 순도 96%. 금반지 3.75g, 순도 96%입니다.”
“둘 다 팔면 얼마를 받을 수 있나요?”
“현재 금 시세가 g당 77,000원입니다. 순도와 가공비용 그리고 감정 비용을 계산하면, 1,559,250원 입니다.”
‘음……. 순도가 낮다고 10%를 떼가는구만. 쯥……. 어쩔 수 없지.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공제가 예상보다 커서 살짝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낮은 순도를 높이기 위한 공임과 매장을 유지하는 비용을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갈취는 아니다.
창수는 정당한 비용을 지불했다 생각하며, 웃는 얼굴로 거래를 마쳤다.
* * *
“어서 오세요. 저쪽으로 앉으세요.”
“저는 돈까스 먹으러 온 게 아닙니다.”
“아! 사장님 개인 손님이시군요.”
“하하. 그런 셈이죠.”
현금을 손에 쥔 창수가 곧바로 방문한 곳은 동대문 인근에 위치한 돈까스 전문점이었다.
현재 시간 오후 2시 30분, 점심시간이 지나 한가해진 음식점 점원이 반갑게 창수를 맞이했다. 하지만 창수가 이곳에 온 목적은 점원의 예상과 달랐다.
“빨리 오셨군요.”
“예. 저녁에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어서요.”
“그러면 바로 거래하시죠. 그래뉼 99.99% 1kg을 구매하신다고요?”
“맞습니다.”
창수는 고순도 은을 구매하기 위해 돈까스 전문점에 왔다. 이 음식점 사장 박태섭이 순도 99.99% 은 그래뉼을 보유하고 있기에.
고순도 은은 알갱이 상태의 그래뉼과 은괴 형태의 실버바로 거래된다.
실버바가 보기에는 좋지만, 공임이 들어가 구매 가격이 비싸다. 반면 매각할 경우 그래뉼과 실버바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실버바를 보유한 투자자는 앉아서 공임을 손해 보게 된다. 그래서 고수급 개인 투자자 상당수가 그래뉼을 선호한다.
문제는 그래뉼 매매 시 판매자가 구매자를 속일 여지가 많다는 점. 창수처럼 은 매매 초보자는 악의적인 판매자의 농간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도 창수가 개인투자자를 찾은 이유는, 빠르게 은을 확보하고 은 매입 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다.
공식 거래소를 이용할 경우 은 확보에 수일에서 수주가 걸릴 수 있다. 거래 회전수를 늘리려는 창수에게 치명적인 걸림돌이 되는 구매 형태.
금은방의 경우, 은을 바로 건네받을 수 있으나, 부가세를 추가로 부담해야 하고, 개인 정보가 남을 수 있다.
가능한 한 개인 정보를 숨겨야 한다.
- 스스슥!
“아주 밝은 빨강색이죠. 이것이 순도 99.5% 이상이라는 증거입니다.”
“99.5% 이상이면 좀 애매하군요. 99.9%와 99.99% 분별이 안 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둘을 제대로 판별하려면 고가의 장비가 필요합니다. 우리 같은 개인투자자가 사용하기 어렵죠. 그래서 투자커뮤니티가 중요합니다.”
은 성분을 검사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은 일부를 갈아내어 시약에 반응시키는 시금석 검사법이다.
이 방법은 검사 비용이 저렴하고 빠르게 결과를 알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99.5% 이상 순도를 가진 은에 분별력이 없다는 단점도 가지고 있다.
박태섭은 판매할 그래늄 알갱이를 검사하며, 그 한계를 명확히 알려 줬다.
“커뮤니티를 보니 정직한 거래로 칭송이 자자하시더군요. 그래서 저도 믿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허허. 제 얼굴에 금칠하는 것 같아 민망하군요. 아무튼, 저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투자커뮤니티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마십시오. 금액이 억 단위로 커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물론, 지금처럼 1kg 수준의 거래에서 파탄이 날 가능성은 거의 없죠.”
박태섭은 은 투자계의 ‘고인물’로 통하는 인물이다. 투자자 간 첫 거래가 알려진 뒤 12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의 사고도 내지 않은 정직한 사람이다.
그의 말대로 백만 원이 조금 넘는 거래에서 사기를 치다가, 투자커뮤니티에서 매장당할 사람은 많지 않다.
반면, 거래 금액이 커지면 명성을 버리는 걸 감수하고 장난칠 가능성이 있다.
“투자금이 늘어나면 금은방을 이용해야 하는데, 이것저것 귀찮은 것이 영 개운치 않습니다.”
“좀 찜찜한 면이 있죠. 그래서 저는 그래뉼 제련 공장과 직거래합니다. 관계만 잘 맺으면, 사기당할 염려가 적고 안정적으로 그래뉼을 구매할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투자자끼리 도와야죠.”
상대를 제대로 골랐다. 투자커뮤니티에서 독보적으로 명망이 높은 박태섭을 거래 상대로 정한 것이 신의 한 수가 됐다.
창수는 30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박태섭으로부터 은 투자에 유용한 정보를 다수 얻을 수 있었다.
6.
창수는 박태섭으로부터 은 그래뉼 99.99% 1kg을 115만 원에 매입한 뒤, 월요일 오후 5시, 조선으로 넘어갔다. 막대한 시세 차익을 얻기 위해.
그는 하루에 두 번 만나는 걸 피하려고 장두호의 대광금은방이 아니라 수정귀금속을 방문했다.
“은을 팔려고 합니다.”
“은은 언제든지 환영이죠. 감정해 드릴게요.”
- 슥!
“여기 있습니다. 때깔이 좋은 녀석입니다.”
창수는 수정귀금속 직원에게 은 그래뉼 한 움큼을 건네줬다.
수정귀금속이 인근에서 두 번째로 명망이 높은 곳이지만, 금 500g 가치를 가진 은 그래뉼 전부를 노출하는 건 현명한 일이 아니다.
수정귀금속이 은 가치를 제대로 셈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99.99%, 극상품 은이네요.”
“귀한 물건이죠. 시세가 얼마나 되나요?”
“1g당 34환이에요. 중량이 57g이니까, 다해서 1,938환입니다.”
‘영감님보다 1환을 더 깎는군. 뭐 이 정도는 그냥 넘어가자.’
수정귀금속은 대광금은방보다 매장이 넓고 인테리어가 잘돼 있다. 게다가 숙련된 직원까지 채용하고 있다.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만큼 수수료를 더 챙기려 하는 건 당연한 일이리라.
사업을 경험해 본 창수는 수정귀금속의 가격 책정이 무난하다 생각했다.
“57g이 아니라 1kg을 팔려고 합니다.”
“어머! 이렇게 많은 극상품 은은 처음 봐요!”
예상하지 못한 물량에 눈이 동그래진 직원이 연신 감탄사를 남발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은 순도 99.99%는 소량만 거래되고 거래 빈도도 매우 낮다.
그녀가 수정귀금속에서 7년 근무하는 동안 목격한 양보다 창수가 건네준 양이 더 많다.
“순은 99.99%, 중량 1,000g, 총대금 34,000환입니다.”
“돈 말고 금으로 받고 싶군요. 상급금 1g에 얼마인가요?”
“상급금 1g에 73환입니다. 계산하면……. 465g 을 사실 수 있고. 우수리가 남는군요. 돈으로 계산하면 124돈이 조금 넘습니다.”
“10돈짜리 금돼지로 받으면 공임을 내야 하나요?”
“원래는 받아야 하는데 깎아드릴게요. 큰 거래 하시는 데 이 정도는 해드릴 수 있어요.”
“좋습니다. 120돈을 금돼지로 하고 나머지는 현금으로 주세요.”
귀물을 가지고 있으면 어디서나 대접받는다. 수정귀금속 직원은 대광금은방 장두호처럼 과감하게 공임을 포기했다.
근래 보기 드문 큰 거래다.
수정귀금속은 이번 거래로 은에서 1,000환, 금에서 1,350환, 총 2,350환의 수익을 얻게 됐다. 한국 돈 235만 원.
게다가 은 99.99% 가격이 g당 35환이지만, 공급이 달리고 수요가 많기에 매각처를 잘 고르면 40환도 받을 수 있다.
과욕은 금물. 수정귀금속 점원은 욕심을 자제하는 현명함을 보였다.
‘금 120돈에 현금 1,150환이라. 돈 벌기 쉽구만. 커커커.’
한국으로 돌아가 금을 매각하면, 3,000만 원 이상을 받을 수 있다.
돈 5,000원을 아쉬워하며 쪼들리는 생활을 한 것이 며칠 전이다. 아니, 바로 오늘 아침까지 빈털터리나 다름없었다.
갑자기 들어온 목돈에 창수가 기뻐하는 건 당연한 일이리라.
그리고 이 돈벌이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 * *
“어머. 오랜만이세요.”
“예. 오랜만입니다. 사장님. 그동안 잘 지내셨죠?”
“아휴. 너무 힘들어요. 그놈의 코로나가 사람 잡고 있어요.”
화요일 오전 11시 30분. 창수는 단골 한정식당 가마골을 방문했다.
7개월 만에 창수를 본 가마골 주인이 반갑게 맞이하면서 신세 한탄을 하기 시작한다.
“한국 손님만으로는 어려우신가 보죠?”
“그렇죠. 우리 매상 70%가 외국 손님이에요. 관광이 살지 않으니, 직원 월급 걱정할 정도로 안 좋아요.”
“그래도 사장님은 건물주잖아요.”
“호호호. 그 덕분에 버티기는 하는 거죠.”
국내에서는 백신 접종률이 80%를 넘으면서 코로나 사태가 진정된 것처럼 보이지만, 외국은 아직도 코로나와 한창 전쟁 중이다. 게다가 델타 변이가 활개치고 있다.
여행업계 정도는 아니라도 외국 관광객을 상대하는 음식점이 코로나 사태로 막심한 타격을 받았다.
자본이 빈약한 음식점 상당수가 일찌감치 폐업했다. 가마골처럼 자기 건물을 가진 일부 음식점이 근근이 목숨 줄을 이어가는 상황.
“여름이 되면 지금보다 관광객이 늘어나 겁니다. 힘내세요.”
“말씀이라도 감사해요.”
“잘될 겁니다. 그리고 먹던 대로 주세요.”
“알겠습니다. 오랜만에 오셨으니 맛있게 드시고 가세요.”
가마골은 외국인을 주로 상대하기에 1인분 메뉴도 다양하다. 창수가 즐겨 먹는 것은 5만 원짜리 ‘군자정식’.
한 끼 식사로 만만치 않은 금액이다. 하지만 지금 창수에게 현금 3,100만 원이 있다.
방금 전 금 120돈 450g을 판매하고 빳빳한 신사임당 620장을 받았다. 그중에 한 장 쓴다고 부담이 될 리 없다.
‘오. 사장님이 서비스를 주셨네.’
상차림에 정성이 보인다. 게다가 창수가 좋아하는 떡갈비가 한 접시 추가돼 있다.
별거 아니지만, 마음 씀씀이에 감동이 밀려온다.
‘캬! 역시 이 맛이야! 한국사람 입맛에는 한식이고! 한식 중에 최고는 떡갈비지!’
세계 71개국을 직접 방문했던 창수가 각국에서 빠지지 않고 한 일이 전통음식과 특산물을 골고루 맛보는 것이었다.
먹거리에는 지역 사람들의 역사-문화-생활이 그대로 배어 있다.
프랑스 음식에는 프랑스인의 고고한 자존심이 들어 있고, 터키 음식에는 수많은 세력이 각축을 벌인 다양성이 스며 있다.
창수가 맛있다고 느낀 세계 음식은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로 많다. 그러나 창수가 가장 좋아하고 몸에 맞는 건 한국음식.
‘이제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온 거야.’
여유로운 마음으로 좋아하는 한식을 먹으니 자신감이 무럭무럭 자라난다.
창수는 부모님과 가족의 도움이 아니라, 스스로 힘으로 사업체를 운영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비록 코로나 사태로 바닥까지 떨어지는 인생의 쓴맛을 경험했으나, 모두 지난 간 일.
경제적인 여유가 생긴 지금, 창수의 앞길을 막을 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