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평행우주 독식-5화 (5/200)

5화 2장. 시련은 있어도 포기는 없다

3.

창수가 거주하는 반지하 방에 미처 풀지 못한 박스가 11개 있었다.

태국에서 여행사를 경영하고 약혼녀와 동거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짐이 제법 많은 것.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박스에서 하나씩 꺼내면서 옛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3번째 상자에서 지갑-벨트 세트 2개를 발견했다.

‘고급 가오리 가죽이니 저쪽에서도 제법 가격이 나갈 거야.’

2019년 해외관광이 절정에 이를 무렵, VIP 고객과 직원들을 위해 제작한 거다. 단가가 세트당 150달러인 고급 제품.

어제 한양의 시장을 돌아다니며 탐문해 본 결과 조선에서 거래되는 가죽 제품의 질이 좋지 않았다.

원가에 절반이라도 건지면 시드머니를 확보할 수 있다.

‘시작이 나쁘지 않군. 나머지도 돈 될 만한 게 있는지 살펴보자.’

사람의 마음이 간사하다. 호주머니가 텅 비어 가슴이 답답하고 마음이 허전하던 것이 방금 전.

호주머니를 채울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자, 마음가짐이 단번에 달라진다.

창수는 애처로운 심정으로 상자를 들춰 보다가, 급격히 태세를 변화해 적극적인 탐사모드로 들어갔다.

‘식기세트? 이거 돈이 되려나? 일단 제쳐놓자.’

상자 11개에 돈 될 만한 물건이 제법 있었다. 창수는 그중에서 5가지를 골라 배낭에 집어넣었다. 조선에서 팔릴 만하다고 판단한 것들.

나머지는 플랜B를 위해 넘겨 두었다. 만약 평행우주 조선에서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으면, 한국 인터넷 중고거래사이트에 매물로 내놓을 계획이다.

‘아침밥 든든히 먹었으니 움직이자. 오늘 할 일이 많아.’

현재 시간 오전 8시, 조선으로 상행위를 떠날 준비를 마친 창수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집을 나섰다.

* * *

“손님. 또 오셨군요. 신수가 훤하십니다.”

“옷이 날개라고, 덕분에 사람다운 모습을 하게 됐습니다.”

“허허허.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상인의 최고 행복은 손님이 만족하는 겁니다.”

조선으로 넘어온 창수가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어제 개량한복을 구매한 상점이었다.

그는 상점 주인의 덕담을 더 강한 덕담으로 응수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주인장께서 상도를 아는군요.”

“어이쿠.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무엇을 찾으시나요?”

창수의 띄워주기가 점입가경에 이르자, 무언가 싸한 느낌을 받은 상점 주인이 급히 수습하며 화재를 돌렸다.

이대로 창수의 페이스에 말려들면, 상품을 밑지고 팔아야 하는 상황에 몰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끼며.

- 슥.

“이게 뭔가요?”

“가오리 가죽으로 만든 지갑입니다.”

“장어 가죽으로 만든 지갑은 본 적이 있지만, 가오리 가죽은 처음 보네요.”

창수는 상인이 국면 전환을 시도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이 사용하는 가오리 지갑을 꺼내 보였다.

처음 보는 가죽에 당황하는 상인. 그의 점포에도 남성용 지갑을 팔고 있다. 그러지만 전문점이 아니기에, 다루는 품목에 한계가 있다.

“프랑스에서 최고급으로 통하는 가죽이죠. 강도가 엄청 강해 웬만한 칼로는 흠집도 내지 못한답니다.”

“설마요? 악어가죽도 흠집은 납니다.”

“믿기 어려우면, 실험해 봐도 좋습니다.”

“에이. 새것처럼 보이는데 그러다가 망가지면 어떻게 하실려구요?”

“이거 산 지 2년이 넘었습니다.”

“정말요?”

“예. 정말이죠.”

창수의 지갑은 150달러에 제작한 지갑-벨트 세트의 하나로 2019년 말부터 사용된 거다.

하지만 표면에 흠집 하나 없고 접합부도 멀쩡했다. 상인이 사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갑이라 여기기 충분하다.

“좋습니다. 그러면 과도로 한번 그어볼게요.”

- 슥!

- 척!

“어! 정말 멀쩡하네요! 마법이 걸린 건가요?”

“마법은 아니고요. 무두질이 특수해 강도가 강한 겁니다.”

반신반의하던 상인은 자신이 직접 칼질한 후에야 창수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됐다.

일반적으로 무두질과 약품 처리가 잘된 가오리 가죽은 매우 튼튼하다. 더구나 창수의 지갑은 일반적인 가오리 지갑의 3배가 넘는 고가 제품이다.

특수한 능력이 없는 일반인이 흠집 내기는 역부족.

“프랑스에서 얼마에 구매하셨나요?”

“그건 말하기 곤란합니다.”

창수가 준비한 밑밥을 다 던지기도 전에, 상인이 덥석 바늘을 물었다. 호기심이 일을 만든 것.

창수는 성급히 치고 들어오는 상인의 저돌적인 자세에 한발 빼는 여유를 보여 줬다.

“그래도 중고니까. 생각하시는 가격이 있지 않을까요?”

“사실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 그래요! 얼마에 파실 건가요?”

“프랑스에서도 흔히 보지 못하는 고급 제품이라, 가격을 어떻게 정해야 할지 가늠이 안 되네요. 주인장께서는 얼마가 적절하다고 보나요?”

‘님아. 선 제시 모르세요?’

일반적으로 사는 사람이 갑이지만, 공급이 달리는 귀한 물건은 반대가 된다.

그리고 귀물을 거래할 때, 을이 갑에게 가격을 제시하는 것이 국룰이며 상도다.

창수는 상인을 지그시 바라보며 선 제시 압박을 가했다.

“170환이면 적당합니다. 최상급 악어가죽 지갑이 120환입니까요.”

“에이. 그건 아니죠. 칼에 흠집이 남는 악어 가죽을 가오리 가죽에 비교할 수 없는 거죠. 250환 정도가 적당할 것 같네요.”

“아휴. 250환은 무리예요. 저기 놓인 게 강화 마법이 걸린 지갑인데 300환이거든요.”

“단순히 강도만 볼 건 아니죠. 독특하고 아름다운 모양도 중요하죠, 그리고 마감을 보세요. 가오리 지갑과 저 지갑이 하늘과 땅 차이죠.”

170환은 한국 돈으로 17만 원에 해당한다. 가오리 지갑 구매 가격이 50달러이니, 3배 비싸게 파는 셈.

그러나 창수는 170환에 만족하지 않고 마법처리 지갑의 취약점을 거론하며 흥정을 이어갔다.

“220환 드리죠. 그 이상은 불가합니다.”

한참을 이어가던 흥정 후 상인이 마지막으로 220환을 제시했고, 창수는 손해 보는 척하면서 가오리 지갑 2개를 440환에 판매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세트를 이루는 가오리 벨트를 팔지 못했다는 것. 개량한복을 주로 입는 조선에서 벨트 수요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창수는 원가보다 4배 높은 가격으로 오늘 첫 거래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예상보다 벌이가 좋군. 그러면 굳이 나머지 물건을 팔 이유가 없겠어.’

창수가 생각한 가오리 가죽-벨트 2세트 판매가는 160환이었다. 가지고 온 물건 전부를 팔면 500환을 마련할 수 있을 거라 예측했다.

거래를 잘해 440환을 확보한 지금 크리스탈 화병, 맥가이버 칼, 티타늄 합금 주방용 칼 등을 판매할 필요가 없어졌다.

제값 받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거고, 흥정 중에 창수의 정보가 흘러갈 가능성도 있다.

그는 시장에서 세일즈를 중단하고 다음 일정으로 넘어갔다.

4.

“어서 오시오. 젊은 손님. 오늘은 무엇을 도와드릴까?”

시장을 나온 창수가 방문한 곳은 정직으로 명성이 높은 대광금은방이었다.

- 척!

“이걸 팔고 금을 구입하려 합니다.”

“은화로구려. 잠시만 기다리시오. 중량하고 순도를 확인해 보겠소.”

창수가 대광금은방 주인 장두호에게 건넨 건 갈색을 띤 은화였다.

5년 전 VIP 고객 한 명이 골프장에서 홀인원에 성공한 뒤 기념으로 만든 은화다.

당시 그 고객은 은을 바탕을 금이 장식된 기념트로피를 재작했고, 창수를 비롯한 동반 플레이어와 캐디에게 기념은화를 만들어 줬다.

한동안 존재를 잊고 있던 창수는 11번째 상자에서 빛바랜 은화를 발견하고, 5년 전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조금 아쉽군. 관리를 잘했으면 제값을 받을 수 있을 건데,’

창수는 장두호가 은화를 철제상자에 넣는 것을 보며, 관리에 소홀한 것을 자책했다.

조선에서 상급은 가격은 1g을 7,000원에 팔 수 있다. 은화의 무게가 40g 정도이니, 제대로 값을 받으면 28만 원을 벌 수 있다.

그러나 변색된 하자 물품으로 제값을 받을 리 없다.

창수는 은화로 20만 원을 건지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40g

- 99.99%

“오! 엄청난 순도를 가진 은이구려! 이거 어디서 구한 거요?”

“음……. 말씀드리기 좀 곤란합니다.”

“아이쿠! 내 정신 좀 봐! 주제넘는 짓을 했네! 미안하오. 손님. 내가 나이가 들어 주책을 부리고 말았소.”

철제상자 옆에 놓인 은색판에 은반지의 무게와 순도가 표시되자, 장두호가 깜짝 놀라며 평상시와 다른 모습을 보여 줬다.

장두호의 오버액션과 급 사과에 얼떨떨한 창수.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런데 저 은화 가격 얼마나 나가나요?”

“99.99% 은은 1g에 35환이요. 40g이니 총 대금이 1,400환이요.”

‘헉! 140만 원! 뭐 이리 비싸!’

이번에는 창수가 놀랄 일이 벌어졌다.

조선의 은 시세는 한국보다 8배 높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순도 99.99% 은의 가격이 5배가 뻥튀기된단다.

이건 99.99% 은 1g의 가격이 금 0.5g과 동일한 가격이란 걸 나타낸다.

대박도 이런 대박이 없다.

“순도가 높아질수록 은 가격이 높아지는 건가요?”

“그렇소. 순도 96%가 1g에 7환이고, 99%가 10환이요. 여기까지는 크게 오르는 게 아닌데, 99.9%부터 20환으로 급등하오.”

“가파르게 오르는 이유가 있나요?”

“99%부터 순도를 높이기 위해 마법을 사용해야 하오. 그래서 단가가 뛰어오르는 거요.”

한국에서 은 99%와 99.9%의 가격 차이는 30% 수준이고, 99.9%와 99.99%의 차이는 23% 정도다.

99%와 99.99%의 차이가 61%에 불과하다. 반면 조선은 99%와 99.99%의 차이가 250%에 다다른다.

한국 은 정련 기술이 조선보다 월등히 앞서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99.99%가 이렇게 비싸면. 순도가 더 높은 건 얼마나 비싸다는 거지? 설마 금 가격을 넘는 건 아니겠지?’

장두호의 설명을 들은 창수는 조선의 은 가격 시스템이 터무니없다는 생각과 함께, 99.999% 이상 고순도 은의 가격이 얼마에 책정될지 궁금해졌다.

‘영감님에게 물어볼까? 아니야……. 99.99%도 깜짝 놀란 양반인데. 그 이상을 말하면 내 정체를 의심할지 몰라. 조심해야 해.’

정두호가 믿음직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만사 불여튼튼이다. 이제 고작 두 번 만난 사람에게 자신의 정체를 알리는 꼬투리를 내줄 수 없다.

창수는 궁금증을 해소하려는 충동을 제어하려 노력했다.

“1,400환이면 금을 얼마나 살 수 있나요?”

“금 1g 판매가가 72환이오. 계산하면……. 잠시만 기다리시오. 음. 그래. 19.4g 정도구려”

“제가 400환을 더 드리면, 금 25g을 받을 수 있는 거군요.”

“계산은 맞소. 하지만 우리 점포에서 그램으로 금을 팔지 않소. 모두 돈으로 계산한다오.”

“그러면 몇 돈을 사야 하나요?”

“5돈짜리 금돼지 하나 하고, 1돈짜리 반지면 될 거요. 다 합치면 22.5g이니까.”

장두호는 60대 노인이라 계산은 빠르지 않지만, 수십 년간 금은방을 운영한 전문가답게 창수가 원하는 최적의 해법을 내놨다.

금 1돈은 3.75g이다. 금돼지와 반지를 합해 6돈을 구매하면, 금 22.5g을 소유하게 된다.

총대금이 1,620환이니, 220환을 장두호에게 건네주면 거래가 짤끔하게 완결된다.

“금돼지와 금반지 공임은 얼마를 드려야 하나요?”

“공임은 됐소. 이 은화의 공임도 계산하지 않았으니, 서로 없는 거로 합시다.”

“고맙습니다. 어르신. 다음에 또 뵙지요.”

“고마운 건 나요. 오랜만에 영양가 있는 거래를 했소. 살펴가시오. 젊은 손님.”

장두호는 이번 거래로 차익 45환을 벌게 됐다.

한국돈 45,000원으로 큰 돈벌이라 할 수 없으나, 99.99%에 달하는 고순도 은을 손에 넣었다는 게 크다.

게다가 작은 거래가 큰 거래로 변할 수 있다.

그는 과감하게 공임을 포기하면서 창수와 인간적으로 가까워지는 길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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