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2장. 시련은 있어도 포기는 없다
1.
“이거 한 벌에 얼마인가요?”
“70환입니다.”
“가격이 좀 세네요. 다른 건 50환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요새 유행하는 거라 가격이 좀 나갑니다. 관원들도 사복으로 입는 고급제품입니다.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옷이에요.”
창수는 석청 대신 개량한복 구매에 나섰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유럽인들의 복장과 유사하다. 한양에 유럽인이 있기는 하지만 많은 수가 아니다. 이 복장 그대로 돌아다니면, 불필요하게 눈에 띄게 된다.
조선에서 신분증이 없는 창수에게 포졸이 검문검색이라도 하면 큰 사달이 날 수 있다.
안정적인 돈벌이를 발견한 창수가 피해야 할 중대한 위협 요소.
“60환으로 하죠. 70환은 너무 비쌉니다.”
“10환이나 깎으시면 장사 접어야 해요.”
“62환으로 하죠.”
“과하시네요. 그 가격에 팔면 손해 봐야 합니다.”
“그러면 얼마까지 해 줄 수 있나요?”
“손님. 잘 팔리는 옷이라 할인이 어렵습니다. 68환은 주셔야 해요. 이것도 특별히 해드리는 거예요.”
“68환은 제 주머니가 허락하지 못하네요. 밑지는 장사라면 어쩔 수 없죠. 다른 가계로 가봐야겠네요. 많이 파세요.”
“아이쿠! 손님! 그냥 가시면 어떻게 해요? 67환까지 해드릴게요!”
“서로 양보해서 65환으로 하죠.”
“에휴……. 손님 같은 분 한 명만 더 있으면, 울화병 걸리겠네요.”
71개국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상인과 흥정한 경험이 있는 창수는 [다른 점포로 가겠다]는 필살기를 사용하며,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개량한복을 구매할 수 있었다.
로또에 당첨된 재력가가 너무 쪼잔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으나, 창수가 한양에서 사용할 수 있는 금액이 27만 원이 안 된다는 걸 고려해야 한다.
또한, 흥정은 한양과 한양 사람들의 성향을 알아볼 수 있는 정보가 된다.
도시가 빈궁하고 사람들 성정이 강퍅한 곳은 밀고 당기는 과정에서 험악한 상황이 나올 수 있다.
원만하게 흥정을 끝난 것을 보면, 한양의 사정이 나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창수는 개량한복 이외에도 조선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남성용 신발과 배낭을 구매했다.
배낭은 한국군이 사용하는 군용 배낭과 유사한 모양을 가지고 있었다. 창수는 그중에서 한국 사람도 무난하게 여길 것을 골랐다.
조선에서 위화감 없이 활동하기 위해 사용된 돈이 190환. 그는 금반지를 잘 팔았다고 생각했다.
* * *
‘음……. 서울로 돌아갈 수 있는 걸까? 만약 가는 길이 막히면, 로또고 장사고 모두 날리게 되는 건데…….’
쇼핑을 마친 창수는 복장을 갈아입고 바위가 위치한 북한산으로 갔다.
겨울의 짧은 해가 그늘을 그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점점 어두워지는 주변, 1월 중순에 산에서 밤을 맞이하는 건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다.
가능한 한 빨리 한국으로 이동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창수는 선뜻 바위에 다가가지 못했다.
저 바위가 예상한 대로 작동을 안 한다면, 그가 얻은 많은 행운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다.
- 척!
‘헐……. 변화가 없군.’
나쁜 예감이 그대로 들어맞은 것일까?
바위에 손을 대봤지만, 차원이나 공간을 이동한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해서 바위를 빙 둘러가며 손을 집어 봐도 마찬가지.
이곳에 갇혔다는 공포가 엄습한다.
등에서 식은땀까지 흐르는 상황.
‘젠장! 여기에 새 출발 하면 그만이지! 이참에 장영실 한번 돼 봐?’
창수는 대학교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이 분야와 완전히 동떨어진 생활을 했다. 그렇지만 조선의 과학기술이 한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진다는 걸 생각하면, 가진 지식으로 충분히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을 터.
어쩌면 조선의 과학기술을 몇 단계 향상할 위인이 될 수도 있다.
흔들리는 마음을 정리한 창수는 바위를 예리하게 바라봤다.
‘내가 바위와 부딪친 건 윗부분이야. 혹시…….’
조선으로 오게 된 과정을 되짚어보니 간과한 점이 있었다. 워터슬라이드를 타듯 산기슭에서 미끄러져 오면서 바위 상단과 부딪쳤다는 것.
바위 전체가 아니라 그 부분에서 평행우주 이동이 가능하다면, 바위 옆면을 손으로 집은 건 아무런 의미 없는 헛수고였다.
창수는 산기슭과 근접한 쪽으로 이동해 바위 면에 몸을 밀착한 뒤, 까치발을 들고 오른손을 길게뻗어 바위 상단부에 붙였다.
- 팟!
‘어! 돌아온 건가?’
순간적으로 눈앞이 깜깜해지는 블랙아웃 현상이 나타났다. 하지만 창수의 위치는 변함이 없는 상태.
평행우주를 이동하면서 땅바닥에 쓰러졌던 기억이 있는 창수는, 자신이 한국 서울로 돌아온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일단 산책로로 가보자. 난간이 있다면 확인할 수 있어.’
어둠이 깊어지면서 바위 주위를 자세히 살필 수 없다.
헛되이 심력을 낭비하는 것보다, 300m 떨어진 산책로를 확인하는 것이 빠르다. 길이 잘 정비돼 있고 안전시설이 있다면, 조선의 한양이 아니라 한국의 서울일 거니까.
‘오! 제대로 돌아왔군!’
300m를 갈 필요도 없었다.
150m를 걸어가니 눈에 익은 가로등이 보였다. 산책로 급커브에 위험성이 있어 몇 달 전에 설치한 것이다.
창수는 서울로 귀환했다는 걸 확신하고, 배낭에서 패딩을 꺼내 입었다.
한양에서 구매해 입고 있는 개량한복이 사람들을 이목을 글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한 것.
그의 행동이 새가슴이라 조롱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엄청난 행운을 양손에 거머쥔 상태다. 아무리 조심해도 과하지 않다.
창수는 날카로운 눈으로 주의를 경계하며 북한산 산책로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휴……. 드디어 집에 도착했군. 다리가 후들거려 쓰러지는 줄 알았어. 크크크.’
50분을 걸어 집에 도착한 창수. 그는 방에 들어가 쓰러지듯 드러누운 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비록 반지하지만, 이곳처럼 아늑한 곳이 없다.
이제 발생 가능한 위험이 모두 제거됐으니, 창수에게 남은 건 행복뿐이다.
내일 당장 농협은행으로 가서 로또 당첨금을 수령한 뒤, 은을 구매해 한양으로 가면, 본격적인 돈벌이를 시작할 수 있다.
2.
긴장이 풀리니 허기가 몰려왔다. 창수는 냉동실에 고이 모셔 뒀던 떡갈비를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참치가 들어간 김치찌개를 만들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식사다운 식사.
‘쪼들리는 것도 오늘로 끝이다. 내일 로또 당첨금 받고 가마골에 가야겠어.’
한식을 좋아하는 창수는 태국에서 여행사를 운영할 때도 한국 식당을 자주 찾아다녔다. 1주일에 2, 3번은 보통이고, 1주일 내내 저녁을 한식으로 먹었던 적도 있다.
코로나 창궐로 여행사를 접고 한국으로 귀국한 뒤, 한정식 식당을 돌아다니며 한국 정통의 맛을 즐겼으나, 통장 잔고가 빠르게 소진되면서 멈춰야 했다.
1,000원 한 장을 사용하는 데도 신중해야 했으니까.
이제 로또에 당첨되고 돈이 마르지 않는 화수분을 발견했다. 한 끼 5만 원 정도 소비는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는다.
별거 아닌 일에 감격스럽다. 이런 생각을 하며 빙그레 웃었다.
‘샤워하고 자자. 그래야 내일 움직이지.’
육체적으로 매우 피곤하지만, 쉽사리 잠이 오지 않는다. 고양된 기쁨이 아드레날린을 만든 것.
하지만 내일 할 일이 많다. 농협은행 본점을 방문해 로또 당첨금을 수령해야 하고, 조선에 판매할 은도 구매해야 한다.
잠을 자지 않고 밤을 지새우면 내일 원치 않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 있다.
창수는 온수로 따뜻하게 몸을 덥힌 뒤, 포근한 이불 속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 * *
‘헐! 이게 뭐야!? 내가 잠이 덜 깬 건가!?’
그가 다시 눈을 뜬 건 월요일 아침 5시. 이불 속에서 뒤척이다가 어젯밤 11시쯤 잠이 들었으니, 6시간 정도 잠든 셈이다.
어중간한 시간이다. 다시 잠들다가 일정이 늦을 수 있기에, 오늘 할 일 중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로또를 확인했다.
그리고 머리를 둔기로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껴야 했다.
‘999회!? 왜 내가 다음 주 로또를 가지고 있는 거야!?’
컴퓨터를 켜고 로또 번호를 다시 확인할 때,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은 창수.
다시 찬찬히 로또 용지를 살펴보니, 2022년 1월 15일이 아니라 1월 22일에 추첨하는 로또였다.
998회에 당첨된 번호가 999회에 동일하게 나올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즉, 그가 가지고 있는 로또는 ‘꽝’이 될 가능성이 크다.
‘가만……. 언제까지 술을 마셨던 거지? 설마…….’
- 지끈!
창수는 금요일 오후 소주 5병을 마신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5병이 다일까?
기억을 더듬으니 머리가 아파오면서 잊었던 내용이 서서히 되살아난다.
‘밑에 편의점에도 갔던 거야…….’
소주 5병을 마셨지만, 실외에서 1월 밤공기의 차가움을 버티기 어려웠다.
창수는 외부 테이블이 비닐로 바람막이가 돼 있는 편의점으로 자리를 옮겨 소주 3병을 더 마셨다.
그곳에서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토요일 새벽까지 머문 것.
‘복권방 열리자마자 들어가서 당첨번호 그대로 써넣은 거군,’
로또판매점은 오전 6시에 자정까지 영업한다. 다만 토요일의 경우 추첨일이기에 오후 8시에 로또 판매를 중단한다.
창수는 토요일 오후 8시 이전에 998회차 로또를 산 것이 아니라, 일요일 오전 6시 이후에 999회차를 산 것이다
그리고 만취 상태로 집으로 돌아와 쓰러지듯 잠이 든 뒤 필름이 끊어진 거다.
‘치기 어린 장난인가? 아니면 기념품? 후……. 지금 그걸 생각해서 무슨 소용이지? 로또 당첨은 허무맹랑한 개꿈인데. 지나간 건 잊어버리고 남은 걸 지켜야 해.’
왜 지난 당첨 번호를 골랐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니 굳이 기억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끝난 일이니까.
비록 로또가 날아갔어도, 창수에게는 아직 평행우주 조선으로 이동해 금-은 차익 거래하는 돈벌이가 남아 있다.
로또 당첨과 비교가 안 되는 높은 경제적 가치를 가진 화수분.
‘문제는 은을 살 돈이 없다는 건데. 어떻게 하지?’
창수의 수중에 남아 있는 돈은 채 만 원이 되지 않는다. 카드론과 현금 서비스는 한도가 차 버린 상태.
더구나 사채도 불가능하다. 지난주 사채업자를 만나 200만 원을 융통하려 했으나, 선이자 40만 원을 떼면서, 지인 전화번호 10개를 요구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법정 이자를 까마득히 넘는 고리를 갈취하는 사채업자는 용의주도하고 악랄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창수가 원금과 이자를 변제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지인과 가족에게 협박과 망신을 줄 목적으로 전화번호를 확보하려 한 거다.
사채업자는 과한 요구라고 항변하는 창수에게 [담보도 없이 남의 돈 받는 건 과한 요구 아닌가?] 라며 비웃음을 날렸다.
‘월세 보증금을 빼야 할까? 아니야. 시간이 너무 걸려.’
창수가 거주하는 반지하는 보증금 400만 원에 월세 35만 원이다. 3개월 월세 105만 원이 밀려 있어, 보증금을 빼면 295만 원을 확보할 수 있다.
시드머니로 활용하기 충분한 금액.
걸림돌은 계약 기간이 오래 남아 있고, 세가 잘 빠지지 않는 집이라, 보증금을 받으려면 한 달 이상이 걸릴 가능성이 높다는 점.
‘일단 중고매매로 팔 수 있는 걸 찾아보자. 정 안 되면 상하차 알바를 하는 수밖에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조금만 절약하고 살았으면, 오늘 당장 조선으로 이동해 돈벌이할 수 있을 건데.
창수는 끊임없이 등장하는 문제에 심적으로 지쳐 갔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이 고비만 넘기면 찬란한 미래가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는 방 한쪽에 쌓여 있는 상자를 뒤지기 시작했다.
‘어! 이거 돈 좀 되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