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1장. 여행자에게 필요한 건 머니머니해도
5.
“이건 뭔가요? 조청은 아닌 것 같은데, 색이 진하네요.”
“손님.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이거 우리 삼춘이 연해주에서 직접 따온 석청이에요.”
“석청이면, 야생벌이 바위틈에 집을 만들고 모은 꿀인가요?”
“맞어요. 꿀벌들이 야생의 좋은 기운을 모아 바위틈에 저장한 거죠. 그리구 미네랄하구 비타민이 많이 들어 있어요.”
“가격은 얼마나 하나요?”
책방을 나온 창수는 다시 시장으로 돌아가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역사서를 통해 이곳이 평행우주의 또 다른 지구라는 것을 확인하게 됐다. 이제 중요한 건 평행우주를 통해 무엇을 얻을 것인가? 라는 점.
가장 단순하면서 효과적인 건 한국과 조선의 가격 차이를 이용해 소득을 올리는 거다.
동일한 물품이나 유사한 효능을 가진 물품을 싼 곳에서 사서 비싼 곳에 팔면, 지속적인 이득을 얻을 수 있다.
달리 말하면, 마르지 않는 ‘화수분’을 만들 수 있다는 거다.
문제는 한국과 조선의 기술적 격차. 조선이 한국 면적의 8배를 가진 대국이지만, 과학기술은 100년 이상 뒤처져 있다.
이건 거래할 수 있는 물품이 매우 한정돼 있다는 걸 의미한다.
창수는 차익거래가 될 만한 물건을 찾아다니다가 석청을 발견하고 가격을 물었다.
“1근에 100환이에요.”
“가격이 만만치 않군요.”
100환은 한국 돈 10만 원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한국산 석청 가격은 1kg에 40만 원이다. 600g 1근으로 계산하면 24만 원.
한국에서 석청이 조선보다 2.4배 비싸니, 가격 경쟁력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이 석청은 연해주산. 엄밀히 따지면 한국산이 아니다.
연해주에서 생산한 러시아 목청 가격이 600g에 6만 원 수준이라는 걸 생각하면, 결코 저렴한 가격이 아니다. 석청 가격이 목청보다 20-30% 높다는 걸 고려해도.
“석청은 천식, 피부병, 성인병, 암에도 효꽈가 좋아서 만병통치약이라고 해요. 약효에 비해서 비싼 게 아니죠.”
“효능은 잘 알죠. 그래도 조금 싸게 안 될까요?”
“임금님도 즐겨 드시는 영약이구요. 지체 높은 가문에서 많이 찾는 거라 에누리가 어려워요.”
단호박.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순한 인상을 가진 상인은 사근사근한 설명을 하다가, 할인하자는 소리가 나오자 냉정한 목소리를 냈다.
석청의 고귀한 가치를 모르는 창수에게 실망했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석청이 왕실에도 진상되나요?”
“당연하죠. 임금님이 매일 드시는 걸요.”
“단걸 매일 먹으면 소갈병 걸리는 거 아닌가요?”
“아니거든요! 광종대왕께서 하루에 석청 반근을 드시고 115세까지 무병장수하셨어요!”
한국 역사에서 조선왕조 15대 국왕 광해군은, 1623년 능양군과 서인이 일으킨 쿠데타로 왕위를 잃어버리고 유배된 뒤, 1641년 초라한 모습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이곳 조선 역사는 다르다.
광해군의 출생과 임진왜란에서 활약 그리고 즉위 시기는 동일하지만, 반란군에 당하지 않았다.
쿠데타를 제압한 뒤, 능양군과 서인 일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절대왕권을 구축했다.
더구나 1690년까지 82년 제위 기간 동안 군사력을 증강하고 영토를 확장해, 80만㎢에 달하는 국토를 확보했다.
이곳에서 광해군은 ‘광종’이라는 시호를 가지며 ‘대왕’이라는 존칭을 받는 존재다.
‘광해군이 즐겨 먹고 장수해? 여기 석청은 성분이 다른 건가?’
조선시대 왕들의 평균 수명은 46세. 광해군은 평균보다 무려 69세를 더 산 것이다.
83세에 사망했던 영조보다 32년을 더 생존한 것은, 광해군이 가진 유전자의 힘이 아니라 특별한 시술이나 섭취물 덕분이라고 봐야 한다.
창수는 신념을 가진 젊은 상인의 말에 관심을 가지며, 연해주산 석청을 거래리스트에 올렸다.
* * *
- 띠링!
“어서 오시오. 젊은 손님. 무엇을 찾으시오?”
“살려고 온 것이 아니고 팔려고 온 겁니다.”
금은방으로 들어간 창수는 주인의 환대(?)를 받았다.
현재 한국 기준으로 보면 매우 무례한 대응일 수 있지만, 여기 조선에서는 ‘손님은 왕이다’라는 생각보다 ‘장유유서’가 통하는 세상이다.
60대로 보이는 노인이 30대 창수에게 이 정도 대응한 건 매우 친절한 거다.
“그래요? 금이요? 은이요?”
“금반지를 팔려고요.”
조선에서 한국 돈이 통용될 리 없다. 창수는 석청을 구매하기 위해 끼고 있던 금반지를 매각하려 했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금은 어디든 통하니, 여기서도 값어치가 나갈 거라 여긴 것.
그는 시장 상인들에게 믿을 만한 금은방을 알아봤다. 지역 정보가 오가는 주요 길목이 시장이니까.
시장 인근 금은방은 모두 11곳. 상인들은 이구동성 ‘대광금은방’이 최고라고 말했다.
창수는 ‘대광’이라는 명칭에서 고리타분한 느낌을 받았지만, 이곳 분위기에 걸맞은 상호라 생각하며 이 점포에 들어왔다.
- 슥!
“순도가 높은 금이구려.”
“그런가요?”
“응? 척 봐도 순도 92%가 넘어 보이는데. 아니요?”
“92%야 넘죠. 96%짜리니까요.”
반지는 태국에서 구입한 것으로 23K 금이다. 한국에서 거래되는 24k 99.9% 금보다 순도가 낮다.
순도가 떨어져 가격 후려치기를 당할 가능성을 염두에 뒀던 창수는, 순도가 높다는 금은방 주인의 말에 의외라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흠……. 96%라? 감정해야 하니, 저기 앉아서 잠시만 기다리시오.”
“아……. 예.”
노인은 금반지를 둔탁하게 보이는 철제 상자에 집어넣었다.
한국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허름한 금은방 내부. 게다가 한술 더 떠 이상한 상자에 금반지를 넣으니, 떨떠름한 기분이 드는 창수.
괜히 상인들 말 믿고 이상한 곳에 온 것 아닌가?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 지이잉!
- 스르륵!
‘와! 저거 감정기구나! 성능 끝내주는 데!’
철제상자는 X레이의 일종이었다. 장치를 가동하자 상자 옆에 놓인 은색판에 금반지의 내부가 선명하게 드러나면서, 자동으로 금의 순도가 표시됐다.
가이드를 하다 보면 기념품으로 귀금속을 사려는 손님들이 종종 있다.
태국 금은방을 수차례 방문한 창수는 노인이 사용하는 감정 장치가 태국에서 사용하는 것보다 월등히 뛰어나다는 걸 알아차렸다.
“정확하게 순금 96.5%요. 무게는 3.8g이고.”
“얼마를 받을 수 있을까요?”
“그램당 70환으로 쳐서, 266환까지 줄 수 있소.”
“그 가격이면 좋습니다.”
1환의 가치는 1,000원에 해당한다. 즉, 23K 금을 g당 7만 원에 판 것.
한국에서 24K 금 1g 가격이 7만 7천 원이고, 판매 수수료가 차감된다는 걸 감안하면, 괜찮은 가격이라 할 수 있다.
창수는 대광금은방 주인이 소문대로 양심적이라 생각하고, 단번에 거래를 마쳤다.
- 띠링!
“어서 오시오. 무엇을 찾으시오?”
“한 돈짜리 은반지 사려구요. 가격이 을마나 하나요?”
창수가 266환을 챙기고 막 대광금은방을 나가려는 순간,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인이 들어왔다.
그녀가 원하는 건 3.75g 중량을 가진 은반지였다.
“상등급 은을 사용하면 32환이오.”
“어머. 그르캐나 비싸요?”
“요새 은이 품귀 현상이라 그렇소. 그램당 7환 50전이고, 공임을 더하면 한 돈에 32환이 최저가요.”
‘헐! 무슨 헛소리야? 은값이 왜 이리 비싸? 이 영감 사기꾼 아니야? 나를 호구로 보고 금반지도 장난친 건가? 멱살잡이 한번 해! 이거!’
2022년 1월 기준 한국 은 가격은 g당 930원에 불과하다. 금과 비교해 1/82 수준.
그러나 양심적(?)인 장인으로 소문난 대광금은방 주인은 은 1g 가격을 7,500원이라 말하고 있다.
무려 8배를 부풀린 가격이다.
창수가 정확한 현재 시세를 파악한 것은 아니지만, 은 1g이 1,000원을 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순간적으로 두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하나는 조선의 은 1g 가격이 정말 7,500원 수준일 가능성. 다른 하나는 저 노인이 손님을 상대로 사기 칠 가능성.
전자가 맞더라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만약 노인이 부른 은 가격이 정상가라면, 창수가 건네받은 금반지 대금은 1/8 수준으로 후려치기 당한 것이 될 가능성이 있다.
창수는 납득할 수 없는 은 가격을 책정한 대광금은방 주인에게 강한 의심을 가지며, 실력행사를 생각했다.
‘아니야. 섣불리 나서지 말고 정보를 더 알아보자. 영수증이 있으니 발뺌은 못 할 거야.’
조선은 낯선 세계다. 감정적으로 행동하다가 사달이 벌어지면 좋을 게 하나도 없다.
71개국을 여행하며 여러 가지 돌발 상황을 경험한 창수는 감정을 짜게 식히고, 대광금은방을 빠져나왔다.
* * *
“은반지 한 돈에 얼마인가요?”
“34환입니다.”
“너무 비싼 것 아닌가요?”
“아휴. 아니에요. 공임 생각하면 남는 게 없는 최저가예요.”
창수는 인근 금은방들을 돌아다니며 은반지 시세를 알아봤다. 3.75g 한 돈에 가장 비싼 가격을 부른 곳이 37환이고, 가장 적게 부른 이곳 수정귀금속이 34환이다.
대광금은방 주인이 부른 32환이 최저가였다던 것.
“금반지는 한 돈에 얼마인가요?”
“상급으로 300환입니다.”
‘세상에! 금하고 은 가격 차이가 10배도 나지 않는 거야!?’
창수가 드잡이를 하려던 노인은 양심적인 상인이었다. 순간적인 분노를 누르고 정보를 알아본 것이 현명한 선택.
“제가 귀금속 시세를 잘 몰라서 그런데요. 금값이 너무 싸고 은값이 너무 비싼 것 아닌가요?”
“작년에 신형 자동차가 나오면서 은값이 많이 올랐어요.”
“은이 많이 들어가나 보죠?”
“그럼요. 엔진이 은 먹는 돼지예요. 다른 자동차보다 3배 이상 들어가요.”
“신형 자동차가 많이 팔리면 은값이 더 오를 수도 있겠네요.”
“그렇죠. 올해 들어서도 계속 오르고 있어요.”
창수가 9번째로 방문한 수정귀금속은 시장 상인들이 꼽은 2번째로 믿을 만한 금은방이었다.
다른 금은방과 결이 다른 건 세련된 넓은 매장에 친절한 판매원이 있다는 점이다.
한국 귀금속 전문점과 비교하면 손색이 있으나, 여기 금은방들과 비교하면 단연 군계일학이다.
게다가 가격도 비교적 착하다. 시장 상인들이 추천한 이유가 있다.
창수는 판매원과 대화를 통해 이곳의 은 수요가 매우 높다는 걸 알아냈다.
“수정귀금속은 은을 얼마에 매입하나요?”
“공장도 가격은 공개하기 어려워요.”
“아니요. 제가 판매하려고요.”
“아……. 개인 손님 은 매입은 상급이 1g에 7환입니다.”
‘확실해! 대박이야! 여기서 돈 복사 방법을 알아낼 줄이야!? 하하하!’
한국에서 은을 가져와 조선에 팔면 7.5배 이상 고가에 넘길 수 있다. 이건 땅 집고 헤엄치기로 돈 버는 거다.
역사적으로 창수가 구상하는 거래는 실존했다.
16세기 중국은 유럽보다 은의 가치가 2배 높았다. 유럽 상인들은 중국으로 은을 가지고 와서 금으로 바꿔 2배 차익을 올렸다.
이것은 제정거래(arbitrage transaction)의 한 종류로, 위험 없이 막대한 이익을 얻는 대표적인 방법이다.
창수는 2배도 아니고 무려 7.5배에 달하는 차익 만드는 길을 찾은 것이다.
일회성 행운인 로또 당첨과 비교가 안 되는 돈벌이에 창수는 속으로 광소를 터트렸다.
- 슥!
‘5년간 존버가 빛을 본 건가? 시원섭섭하군.’
수정귀금속을 나온 창수는 왼손 약지에 뚜렷이 남아 있는 반지 자국을 바라봤다. 오랫동안 햇볕을 받지 못해 창백한 색.
뜨거운 사랑, 가슴 아픈 이별, 그리고 집착이 남긴 흔적이다.
‘여기서 석청을 살 필요 없잖아. 영감님에게 가서 물러달라고 할까?’
오늘 대광금은방에 팔아 버린 금반지는 5년 전 선물 받은 약혼반지다.
평행우주 조선에서 물품을 구매하기 위해 금반지를 팔았다. 이제 금-은 재정거래로 떼돈을 벌 방법을 알았으니, 석청은 잊어버려도 된다.
창수는 필요가 없어진 266환을 반납하고 추억이 담긴 약혼반지를 되찾아야 할지 생각에 잠겼다.
‘아니야. 흘러간 인연을 억지로 엮어봐야 남는 건 고통뿐이야.’
돈 떨어진 창수를 헌신짝 버리고 가버린 약혼녀와의 추억은 여기서 끝내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창수에게 더 밝은 미래와 더 좋은 인연이 있을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