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1장. 여행자에게 필요한 건 머니머니해도
3.
‘하하하! 21억 원! 하늘이 날 버리지 않는구나!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아니 누구라도 감사합니다!’
로또 번호 5개가 맞으면 일반적으로 100만 원 이상의 당첨금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이 3등.
번호 5개를 맞추고 보너스 번호를 맞추면 2등으로 수천만 원대의 당첨금을 받을 수 있다.
창수가 산 로또는 번호 6개가 모두 일치했다. 총 당첨금 210억 원, 여기에 당첨자가 10명이니, 그에게 21억 원이 떨어진다.
세금을 제외해도 14억 원이 넘는 돈이 창수의 손에 들어오게 된 거다. 단돈 5,000원에 벌벌 떨던 어제를 생각하면, 하늘에서 돈벼락이 떨어진 셈.
‘남의 돈 먹기가 쉽지 않지. 조급하게 생각 말고 코로나가 잠잠해질 때까지 천천히 기다리면 돼. 10억이면 다시 사업을 시작할 수 있어.’
돈이 들어오니 자존심도 회복됐다. 로켓택배에 입사할 생각이 완전히 사라진 것.
회사원 월급으로 14억 원을 만들려면, 한 푼도 쓰지 않고 수십 년이 걸린다. 이제 로켓택배 입사에 연연할 이유가 없다.
물론, 14억 원으로 평생 일 안 하고 잘 먹고 잘살기는 부족하다.
창수는 로또 당첨금을 기반으로 다시 여행사를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
코로나로 폭격 맞은 해외관광 경기가 되살아 날 때까지 2, 3년은 족히 걸린다고 전문가들이 예상하고 있다.
돈이 궁할 때 그 기간이 영겁처럼 긴 시간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골든타임을 충분히 기다릴 수 있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자! 여기서 시간 보낼 이유가 없어!’
한국은 세계적으로 치안이 좋은 나라다. 로또를 날치기당할 가능성은 크지 않으나, 만사 불여튼튼이라 했다.
농협은행을 방문해 당첨금을 받기 전까지 안심해서는 안 된다.
창수는 산책을 중단하고 집으로 복귀하려 했다.
- 파앙!
‘헉!? 이게 무슨 소리야!?’
창수가 소중한 로또를 지갑에 넣으려는 순간, 알 수 없는 소음이 들려왔다.
무언가 불길한 느낌이 드는 순간.
- 휘리릭!
‘뭐야! 이거!?’
세상사 새옹지마.
어제 만취가 로또 당첨이라는 뜻밖의 행운을 가져왔다면, 그 만취로 후들거리는 손이 사달을 만들고 말았다.
창수가 잠시 딴생각에 빠진 사이, 제법 강한 바람이 불며 손에서 로또가 빠져나간 것.
- 타다닥!
바람을 탄 로또가 산책로를 벗어나 산기슭으로 날아가자, 창수가 정신없이 뒤쫓기 시작했다.
산기슭이 가파르지만,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저 로또를 잃어버린다면, 상상도 하기 싫은 자책과 자학이 벌어질 거니까.
‘젠장! 쉬운 일이 없군! 하필 저기에 떨어져 있어!’
로또는 오른쪽 산기슭으로 150m가량 들어간 지점까지 날아갔다. 더 이상 바람이 불지 않아 움직이지 않는 건 불행 중 다행이다.
그러나 위치가 만만치 않다. 경사가 70도에 가까운 지점.
창수의 뇌리에 빨간 경고등이 켜졌다. 현재 그는 추위를 막을 패딩과 가벼운 운동화를 착용하고 있다. 안전시설이 잘 갖춰진 산책로로 내부에 적당한 차림.
전문 여행가이드인 그는 산행 경험도 많다. 지금 준비 상태로 접근하다가 사고가 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에 잠겼다.
‘장비 없이 더 깊이 들어가는 건 무모한 짓이지……. 하지만 로또를 눈앞에서 놓칠 수 없어! 이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야!’
- 척!
빠르게 결단을 내린 창수는 주위 나뭇가지를 잡아 의지하면서 천천히 로또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후드득!
‘위험해!’
발길에 차여 아래로 굴러가는 돌을 보고 심장이 쫄깃쫄깃해지는 느낌이 든다.
몇 번의 고비를 넘긴 창수는 간신히 로또가 떨어진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난 온 길을 되돌아가는 건 미친 짓이야. 앞으로 간 뒤에 다른 샛길을 찾아봐야겠어.’
로또를 집어 안전한 주머니 안에 갈무리한 창수는, 몸을 되돌려 산책로로 돌아가는 것보다 전진하는 걸 선택했다.
그가 건너온 급경사 구간은 약 40m. 반면, 10m 정도만 더 가면 급경사 지역을 벗어날 수 있다.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긴 창수는 급경사 구간을 지난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안전한 하산 경로를 찾는 것.
- 미끄덩!
‘헉! 제기랄!’
눈에 보이는 위기를 넘겼으나, 복병이 있었다.
급경사 지역에서 50m 이동한 지점. 눈이 내린 뒤 녹고 그 물이 낙엽 속으로 스며들어 결빙된 곳에서 창수가 넘어졌다.
오른발이 미끄러져 허공에 뜨면서 그의 몸이 경사지에 쓰러진 것.
- 뚝!
게다가 설상가상. 왼손으로 잡은 나뭇가지가 그의 체중을 이기지 못하고 끊어져 버렸다.
- 주르륵
“어! 어! 어! 너무 빨라!”
저절로 비명이 나온다.
평상시라면 그리 위험한 경사는 아니다. 그러나 중간중간 낙엽아래가 결빙된 상태에서 창수는 마치 워터슬라이딩을 하는 것처럼 빠르게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이런 미친! 바윗덩어리!”
산비탈 끝에 자동차 크기만 한 바위가 놓여 있다. 지금 속도로 충돌하면 중상을 입을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
속도를 줄이려 발버둥 쳤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빌어먹을! 로또가 사람 잡네!’
감속은커녕 최대속도로 바위에 접촉하기 직전. 창수는 양팔을 들어 머리를 보호하며 죽음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빈궁한 형편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만, 그 끝이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을 하며.
- 팟!
그의 몸이 바위에 정통으로 떨어져 부딪혔다.
* * *
‘음……. 어떻게 된 거지? 왜 아픈 곳이 없고 멀쩡해?’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창수는 땅바닥에 쓰러진 상태에서 눈을 뜬 뒤, 신속하게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런 상처를 발견할 수 없었다. 피해를 본 건 상반신을 감싸고 있는 패딩.
군데군데 찢어지고 쓸려나간 자국을 보아 산비탈에서 미끄러져 내려온 것이 분명한데, 몸이 멀쩡하고 바위와 충돌한 흔적이 전혀 없다.
‘다행이야. 로또가 멀쩡하군.’
산기슭에서 빠르게 미끄러져 내렸기에, 주머니 속 로또가 훼손될 염려가 있었다.
확인 결과 이상 무.
‘멍 때릴 때가 아니지. 빨리 병원에 가서 정확한 진단을 받아야 해.’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강한 타격을 받으면 일시적으로 통증을 못 느끼는 경우가 있다. 이때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으면 평생 후유증을 안고 살 수 있다.
지금 자신이 그런 처지일 가능성이 크다. 통증이 없을 때 움직여야 한다.
설령 스스로 병원까지 가지 못한다 하여도, 산책로까지는 이동해야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터.
‘이상하다. 길이 조금 바뀐 것 같아. 사람들 복장도 요상하고. 내가 다른 길로 빠져나온 건가? 아니면…….’
창수는 산책로에서 오른쪽 산기슭으로 210m 전진한 뒤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산책로로 복귀하려면 왼쪽으로 가야 한다.
예상대로 왼쪽 300m 지점에서 산책로에 합류했다. 하지만 그가 발견한 산책로는 안전시설이 거의 없고 자연 상태가 살아남은 날것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간혹 만나는 등산객의 복장이 매우 낯설었다. 창수는 자신의 인지 능력에 이상이 생긴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게 됐다.
‘여기는 뭐야? 한옥이 즐비하고 길바닥이 돌이라니?’
산책로를 따라 한참을 내려가자 주택가가 나타났다. 그리고 창수의 눈앞에 들어온 것은 현대식 주택이 아니라 정통 한옥 단지였다.
그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장소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수유동 인근은 고사하고 서울 내부에 이 정도 대규모 한옥마을 단지가 없으니까.
더욱이 도로 바닥이 아스팔트가 아니라 로마시대 포장도로처럼 돌로 만들어졌다.
- 치치치칙!
‘헐! 증기자동차? 박물관에 있어야 할 게 도로에서 달리고 있네!’
주택가를 살필 때 요란한 소리와 함께 증기를 뿜으며 달리는 자동차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창수의 뇌에 스턴건을 맞은 것 같은 충격이 전해졌다.
4.
‘이건 꿈이 아니야. 내가 착각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증기자동차의 존재에 경악한 창수는 정신을 가다듬고 주변을 탐색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
[이곳은 21세기 한국의 수도 서울이 아니다.]
‘사투리를 많이 사용하지만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야. 표준어에 가까워. 그러면 내가 과거로 온 건가?’
한국의 표준어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현대 서울말’이다. 따라서 과거에 사용된 서울말은 ‘서울사투리’가 된다.
서울사투리의 특징은 ‘아기’를 ‘애기’라고 발음하거나, ‘먹고 갈래’를 ‘먹구 갈래’로 발음하는 것처럼 모음을 변형하는 ‘전설모음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
여행사를 운영하면서 한국어 어학당에도 관여했던 창수는 이 지역 사람들의 말투가 오랜 서울말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아니야. 조선시대 저렇게 정교한 증기자동차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어. 더구나 여기는 증기버스까지 돌아다녀.’
병자호란 이후로 고개를 든 쇄국정책의 영향으로 조선 후기에 해외문물의 유입이 매우 적었다.
증기기관 도입이 늦은 조선시대에 승객 수십 명을 태울 수 있는 대형 증기자동차가 있을 리 없다.
창수는 과거로 온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여기는 어디인가?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게 다른 우주로 이동한 거야. 집과 도로의 모양이 다르지만, 산자락의 모습은 그대로야. 여기는 또 다른 지구의 수유동이 분명해.’
월세가 저렴한 수유동으로 이사 온 지 6개월이 됐다. 그는 1주일에 1, 2회 꾸준히 북한산 자락을 오르고 있다.
비록 주택가 모양이 다르고, 돌로 만들어진 도로가 생경해도, 이곳은 수유동이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한 창수는 자신이 평행우주를 넘어왔다는 가설을 세우게 됐다.
‘여기가 다른 우주라면, 통로는 아까 그 바위인가? 확인해 볼까?’
증기자동차가 돌아다니는 세계로 온 과정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부분이 바위와 충돌이다.
창수가 중상을 입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지금까지 아무런 상처와 통증 없다는 건 바위에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는 바위를 통해 본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아봐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본능에 따라 안전한 퇴로를 확인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복귀한 후에 다시 여기로 오지 못할 수도 있어.’
동시에 다른 가능성도 떠올랐다. 통로가 막힐 수 있다.
만약 창수가 본래 세계로 돌아간 뒤 재진입이 불가하다면, 남는 소득은 증기자동차가 움직이는 모습을 실제로 본 것 이외에 없다.
어쩌면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칠 수 있다.
다른 세계와 연결된 통로를 가진다는 건 로또와 비교할 수 없는 대박이다. 반드시 기회를 살려야 한다.
‘최대한 정보를 모아야 해. 결정은 그 후에 해도 늦지 않아.’
그는 유라시아 대륙을 왕복 횡단하고 71개국을 직접 여행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현지어를 모르는 상황에서도 알찬 여행을 경험한 창수가 한국 표준어가 통하는 이곳에 겁먹을 이유가 없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이득이 될 만한 것을 찾는 것이 현명한 행동이다.
* * *
낯선 곳에서 해당 지역 정보를 모으는 최고의 장소는 시장이다.
창수는 가까운 시장을 찾아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단기 4355년. 연도는 같군.’
시장 내부를 찬찬히 살피다가 중요한 정보를 발견했다. 곧 다가올 설날을 축하는 장식물에 연도가 쓰여 있던 것.
단기는 기원전 2,333년을 원년으로 삼는다. 단기 4355년은 서기 2022년에 해당하는 것으로, 시간 흐름상 이곳은 한국과 동일하다.
“아주머니. 이 근처에 책방 있나요?”
“저 골목으로 들어가서, 왼쪽으로 돌아가면 나오는구먼.”
“고맙습니다.”
예상대로 과거로 온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창수는 인정 많아 보이는 백발의 상인에게 길을 물어 책방을 찾아갔다.
‘흠……. 이건 왕조가 아니고 제국급인데.’
가설이 맞았다. 이곳은 한국 서울이 아니다. 평행우주 지구에서 ‘조선’이라는 국호를 가지고 있는 국가의 수도 ‘한양’이다.
책방에 들어가 역사책을 살피던 창수는 이 사실을 확실하게 알게 됐다.
그리고 충격적인 건 조선의 영토가 상상 이상으로 넓다는 것이다.
북간도와 연해주가 모두 조선의 영토로, 총면적 80만㎢, 한국의 8배, 한반도의 3.5배에 달한다.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한 건가? 아니면 발해가 망하지 않은 건가? 그럼 조선이라는 국호는 뭐지? 고조선을 의미하는 건가?’
한민족의 역사에서 북간도를 지배한 국가를 찾아보면 고조선, 고구려, 발해가 나온다.
광대한 국토를 가진 조선의 정체는 무엇인가?
창수는 해답을 찾기 위해 빠르게 책장을 넘겼다.
그리고 10분 후,
‘헉! 광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