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평행우주 독식-1화 (1/200)

프롤로그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오늘 무엇을 할 건가요?”

“1등 당첨됐던 로또 번호를 외우겠습니다.”

“예!? 로또요?”

“갑자기 멸망이 온다면, 회귀도 가능할 것 같아서요.”

“…….”

1화 1장. 여행자에게 필요한 건 머니머니해도

1.

‘에혀. 내가 정신 나간 놈이지. 면접에서 로또가 왜 튀어나와?’

유머의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확실한 구분은 상대방의 반응이다. 창수는 로또라는 말에 급정색하던 면접관의 얼굴을 떠올리며 자신의 무모함을 자책했다.

1년 6개월 동안 코로나 창궐로 인해 제대로 된 수입을 얻지 못했다.

연봉 4,000만 원을 받을 수 있는 정규직. 이 소중한 기회를 날려 버릴 상황이니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 띵~ 띠리리딩~ 띵~

<예, 이사님.>

<김창수 씨, 미안해서 어떻게 하죠. 이번에 입사는 어려울 것 같아요.>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면접 만 하루가 지나지 않아 확인 사살이 들어왔다. 창수에게 입사를 권유한 당사자가 탈락을 통보한 것.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죄송하죠. 이사님께서 주신 기회를 살리지 못했으니까요. 로켓택배가 개방적인 분위기를 가진 회사라 생각하고, 너무 튀는 말을 한 것 같습니다.>

<풋!>

<…….>

<어머! 미안해요. 갑자기 인사팀 박 부장 얼굴이 떠올라서요.>

창수가 입사 지원했던 회사는 ‘번개배송’으로 급성장한 물류업체 ‘로켓택배’다. 이 회사는 한국에서 업계 1위를 차지하고 있고, 뉴욕증권시장에 상장돼 있다.

게다가 대표이사도 한국계 미국인이다.

외국물 먹은 회사라 유머가 통할 거라 생각했지만, 결과는 그냥 한국 회사였다.

버터향이 적당히 스며든 곳이라고 생각한 창수가 착각한 거다.

로켓택배에서 고객센터를 총괄하는 송 이사는 창수의 돌발 행동과 면접장에서 당황하던 박부장의 모습을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그분이 인사 부장님이군요.>

‘젠장! 어쩐지 꼬장꼬장한 질문만 해대더니! 재수 없는 놈!’

창수는 송이사의 말을 듣고 짜증과 난감함을 느꼈다. 면접관 3명 중 2명은 날카로우면서도 상식적인 질문을 했다.

유독 황당하고 까탈스러운 질문을 남발하던 한 명. 그자가 채용 업무를 관장하는 인사팀 실력자였을 줄이야.

<박 부장이 평소에는 서글서글한데, 업무적으로 벽창호 같은 면이 있어요. 좋게 말하면 직업 의식이 투철한 거죠. 그런 데다가 인사실장 대신 최종 면접에 들어온 거거든요. 어제 내내 선 넘는 질문으로 아슬아슬했어요.>

<아……. 저에게만 심한 게 아니었네요.>

<맞아요. 다른 면접자들에게 더 집요했어요. 그러다가 한 방 당한 거죠.>

박 부장의 물음은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라는 격언을 응용한 것이다.

그자가 유도한 대답은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고객이 위탁한 물품 배송을 끝까지 책임진다] 라는 것이리라.

창수가 이걸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삐딱한 대답을 한 가장 큰 이유는, 박 부장이 폭언에 가까운 물음을 지속했기 때문이다.

[35살에 입사해서 한참 나이 어린 직장 상사들에게 존댓말하며 고개 숙여야 하는데 창피하지 않나? 인생 막산 건가? 아니면 자존심이 없는 건가?]

이 말을 듣고 피가 거꾸로 솟는 감정을 느낀 창수는 면접장에서 벌떡 일어나 박 부장의 주둥이를 후려갈기고 싶은 충동을 가졌었다. 이성과 절박함으로 간신히 참은 것.

하지만 창수만 박 부장에게 당한 건 아니다. 이사급 면접관 2명과 다르게 홀로 직급이 낮은 박 부장이, 입사 지원자들에게 무리한 질문을 남발했다.

무리수로 상관인 인사실장의 공백을 메우려 한 짓이다.

송 이사는 박 부장의 추태에 짜증이 나면서도 직접 제재하지 못했다. 직급이 낫더라도 인사실 2인자와 정면대결해서 좋을 일 없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창수의 ‘로또’ 발언에 말문이 막혀 당황하던 박 부장의 얼굴을 보고 통쾌한 사이다를 느꼈다.

<제가 인사실에 블랙리스트로 올라갔겠군요.>

<그 정도는 아니지만, 우호적이지는 않겠죠.>

<그렇군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이사님.>

<너무 실망하지 말아요. 다음번에 기회가 있을 거예요. 내가 보증할 테니 2개월만 기다려 봐요.>

<아닙니다. 저 때문에 무리하실 필요 없습니다.>

송 이사는 로켓택배에서 권력 서열 10위안에 드는 실력자다. 그녀가 보증한다고 말할 정도면 조만간 입사가 가능할 터.

그러나 창수는 그녀의 제안을 정중하면서도 단호하게 거부했다. 로켓택배 내부 파워게임에 뛰어들지 않기 위해서.

이번 면접에서 송 이사가 추천한 창수를 인사실에서 파토 낸 것이 분명하다. 인사실 파워도 만만치 않다는 걸 의미한다.

송 이사는 그녀의 의중을 무시한 인사팀에 보복하는 차원에서 로켓택배 수뇌부에 정치력을 발휘해 창수를 낙하산 방식으로 입사시킬 가능성이 크다.

입사하면 송이사를 위해 돌격대 노릇을 해야 한다. 창수는 그것이 싫었다.

<음……. 무리할 정도는 아닌데…….>

<코로나로 어려운 시기에 면접 기회를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이사님의 도움을 더 받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하니 권유하기 어렵네요. 만약에 생각이 바뀌면 연락 줘요.>

<알겠습니다. 이사님.>

무리하게 푸시 하는 것보다 여운을 두고 한 발 뒤로 물러나는 것이 현명하다.

사회 경험이 많은 송 이사는 창수가 로켓택배에 정나미가 떨어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리고, 훗날을 기약했다.

2.

‘내가 돈이 없지 자존심이 없냐?’

송이사와 통화를 마친 창수는 흔해빠진 어구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단칼에 로켓택배 입사기회를 잘라 버리기는 했지만, 그가 처한 현실이 녹록치 않다.

장기간 무직 상태로 보내면서 저축해 놓은 돈이 6개월 전에 바닥났고 대출도 막힌 상태다.

3개월째 밀린 월세를 어떻게 해야 할지 눈앞이 깜깜하다.

‘정 안 되면 상하차 알바라도 해야지.’

코로나 창궐 이후 창수가 몸담았던 여행업계는 핵폭탄을 맞은 것처럼 붕괴했다. 반면 언택트 바람이 불면서 택배업계는 부스터 엔진을 달고 고공행진하고 있다.

급격히 늘어나는 물류로 택배업계가 인력난에 빠질 정도.

택배 상하차는 택배업계에서도 가장 인력이 모라라는 분야다. 노동 강도가 공사판은 물론이고, 선원보다 어렵다고 알려졌는데, 대우와 임금이 열악해 사람들이 기피한다.

택배회사는 인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일당을 지급하는 상하차 알바를 고용하고 있다.

‘하……. 상하차 알바는 약값도 안 나오는데…….’

갑자기 현타가 왔다. 상하차 알바는 보통 저녁부터 새벽까지 이어진다. 꼬박 밤새워서 받는 돈이 10만 원 내외. 노동 강도에 비해 너무 적은 금액이다.

창수도 사라져 가는 은행 잔고의 압박을 받고 상하차 알바를 해 본 경험이 있다. 결론은 ‘사람 할 짓이 못 된다’였다.

그는 183cm 키에 슬림하지만 탄탄한 근력을 가지고 있어 힘쓰는 일에 자신이 있었다. 상하차 알바의 악평을 경고하는 무수한 이야기도 ‘약골’들의 일이라 여겼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 상하차 알바 3일을 한 뒤 1주일을 앓아 누어야 했다.

상하차 알바의 가장 큰 문제는 휴식시간이 제대로 주어지지 않고 끊임없이 무거운 화물을 날라야 한다는 것.

법적으로 8시간 일하면 1시간 이상의 휴식시간이 주어져야 하나, 이걸 제대로 지키는 작업장은 많지 않다.

‘지게차 자격증이라도 따야 하나?’

웃기는 건 상하차 작업이 이루어지는 물류 작업장에 계급이 나뉘어 있다는 거다.

알바들은 가장 힘든 작업을 담당하고 정직원이 그들을 감독한다. 그리고 그 중간에 지게차 운전자 같은 약간의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위치해 있다.

창수가 3일째 상하차 알바를 하던 날, 작업을 감독하던 정직원이 넌지시 창수에게 지게차운전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라고 권유했다.

골병 안 들고 상하차 하려면 그 정도 기술은 가져야 한다는 충고.

창수는 정직원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다시 상하차 알바를 할 생각을 안 했기에 지게차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지금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미리 자격증을 따지 못한 것이 아쉽다.

‘어휴……. 잘나가는 로켓택배 정규직도 걷어찬 내가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또다시 엄습하는 자괴감. 상하차 알바니 지게차 운전이니 하는 생각을 할 바에, 차라리 눈 딱 감고 송 이사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나은 선택 아닐까?

‘빌어먹을 코로나! 빌어먹을 세상! 머리가 터지는 것 같아!’

코로나가 창궐하기 전에 창수는 태국에서 직원 20명을 거느린 여행사의 대표였다.

자신이 전문 가이드였던 창수는, 합리적인 가격과 질 좋은 서비스로 고객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으며 적지 않은 돈도 벌었다.

지금처럼 궁지에 몰리며 서글픈 처지에 빠진 건 그의 잘못이 아니다. 사특한 운명에 휘말린 것일 뿐.

‘소주나 마시자.’

창수는 술에 의존하는 알콜중독자가 아니다. 그러나 맨정신으로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처지에서, 그가 가진 유일한 도피처가 술이었다.

- 척.

가까운 편의점에 들른 창수는 소주 한 병과 과자 한 봉지를 사들고 외부에 설치된 테이블에 앉았다.

오늘은 2022년 1월 15일 토요일. 비록 청명한 오후 3시라도 영하의 차가운 날씨에 건물 밖에서 술을 마신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포장마차 따뜻한 국물이 당긴다. 그러나 지갑이 비어 가는 창수에게 포장마차도 사치다.

‘간단히 마시고 집으로 가자. 집안에서 술판을 벌일 수 없는 거고.’

생활고에 시달리지만, 한 가지 확실한 원칙은 가지고 있다.

집에서 술을 먹지 않는 것.

창수는 자신이 곤궁한 상태에서 수시로 술을 입에 댄다면 폐인이 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지금 느끼는 쌀쌀함은 소주 몇 잔 마시면 사라지리라.

그는 쓸쓸하고 외롭게 술잔을 비우기 시작했다.

* * *

- 끄으윽!

‘아휴! 머리 아파! 내가 언제 집에 들어온 거지?’

필름이 끊겼다. 평소 주량이 소주 한 병인데 다섯 병을 마셨으니 당연한 결과.

창수는 외출복을 입을 채로 잠들었다가 깨어난 것에 놀라면서도 안심했다. 자신이 누운 곳이 집 안이니까.

‘흠……. 아무리 생각해도 이사님의 제안을 받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설마 인사실 박부장이 쫓아다니며 나를 괴롭히겠어? 쪼들리며 사는 것보다 귀머거리 행세 하는 게 나을 거야.’

컵라면으로 해장 겸 점심을 마친 창수는 곰곰이 자신의 처지를 되돌아봤다. 그리고 내린 이성적인 결론은 비굴하더라도 로켓택배에 정직원으로 입사하는 것.

돈이 없으면 자존심을 내세우기 어렵다. 이게 현실이라는 걸 창수는 절감하게 됐다.

‘내일 이사님에게 전화해야겠어. 일단은 술독 좀 빼야겠고.’

자존심을 팔기로 결심한 창수는 자신의 거처 인근에 위치한 북한산으로 산책을 나갔다.

서울 북부에 위치한 북한산은 가장 높은 백운대가 835m로 만만한 산이 아니지만, 300m 내외의 작은 봉우리들이 넓게 퍼져 있어 간편한 산책에 제격이다.

- 헉! 헉!

산책로를 따라 1시간 정도 올라가자 숨이 가빠지고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과음에 의한 후유증이리라.

체력적으로 부담감을 느낀 창수는 산책로 한편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 부스럭.

‘엉? 이게 뭐지? 웬 로또가?’

땀을 닦기 위해 주머니에서 휴지를 찾던 창수의 손끝에 이질적인 종이가 잡혔다. 그것을 꺼내 보니 번호 30개가 빼곡히 적혀 있는 로또 용지.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 맞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산 거야!’

로또의 출처를 생각하던 창수의 뇌리에 어제 만취한 상태에서 로또판매점으로 들어가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갑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5,000원을 모두 투자한 건데 몇 개나 맞았으려나?’

현재 물가로 5,000원은 큰돈이 아니다. 그런데도 올인하는 심정으로 산 로또에 은근히 기대를 걸었다.

당첨 번호 3개를 맞추면 본전이 되는 거고, 4개를 맞추면 10배인 5만 원을 받게 된다.

창수는 조심스럽게 스마트폰을 열어 로또 번호를 검색했다.

‘헐! 대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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