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최적의 타이밍
왕이범 이사는 정민우 팀장이 체크해 준 기사들을 확인한 다음 태블릿을 한쪽에 밀어 두었다.
“전략기획실 차원의 일이니까 지원은 계속해 줘.”
“저도 그러고 싶지만…… <당잠사>는 아예 바람처럼 쪽으로 제작이 넘어가서요. 저희가 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쓸쓸하게 웃는 것은 정민우나 왕이범이나 마찬가지.
“권 팀장은 좀 어때?”
“기사 확인은 했을 텐데 별말은 없습니다. 이미 다 털어내고 새 기획 준비 중입니다.”
“그래. 틀 잡히면 나한테 올리라고 해. 책임지고 밀어 줄 테니까.”
왕이범이 든든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것을 보면서 정민우는 이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다소 고민하다 결국 입을 열었다.
“보고는 전략기획실 쪽으로 들어갈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많은 뜻을 함축한 말이다.
정민우도 그 위치상 회사 내의 파워게임은 이미 다 파악하고 있다.
전략기획실이 회사 내 기획의 권한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 예능 총괄 이사라고 한들 어느 정도 힘을 쓸 수 있겠냐는 걱정이었다.
“건방진 말이었다면 죄송합니다.”
“아니, 아냐. 맞는 말이지.”
왕이범도 뒷방 늙은이가 된 듯한 기분을 딱히 부정하진 않았다.
전략기획실이 세워지고, 곽성찬 본부장 체제가 확립된 이후로 그런 기분은 줄곧 느껴왔다.
하지만.
“음……. 이제 이런 말을 편히 할 수 있는 사람은 정 팀장밖에 안 남았네.”
왕이범은 차를 한잔 입에 머금고서 정민우를 보았다.
“얼마 전에 고 사장이랑 식사 자리가 있었어.”
“두 분이서 말입니까?”
“둘이서 먹은 지는 좀 됐는데, 아무튼 그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하더군. ‘캐스트플러스’가 잘될 것 같냐고 말이야.”
정민우의 표정도 묘해졌다.
“사장님 콜이 있으니 진행된 일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주축은 곽 본이랑 신 이사고. 하지만…… 엘도라도와 라이벌 구도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데, 거기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나 보더라고.”
캐스트플러스는 여러 방송사와 외부 업체들의 투자가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선봉에 선 것이 NBS인 이상 고덕재 사장에게도 아주 중요한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불안감을 느낀다는 것은…….
“아직 모르는 일이지만, 캐스트플러스의 오픈 성적에 따라 많은 것이 좌우될지도 몰라.”
왕이범도 말을 아꼈다. 아직 정해지지 않은 미래에 대한 것이니 그럴 만했다.
다만 정민우는 그 어조에서 또 다른 것을 느꼈다.
서인하 상대였다면, 왕이범이 좀 더 속속들이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하는.
“국장님……. 서 선배님이 그리우시겠습니다.”
정민우의 말에 왕이범이 정민우를 쳐다봤다가, 쓸쓸함이 감도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 녀석이 있어 주면 좀 더 든든했겠지. 하지만 말이야, 나는 정 팀장도 믿어.”
“저를요?”
“인하가 잘 키워 놓기도 했을 거고, 또 지금 그 빈자리를 정 팀장이 잘 메워 주고 있기도 하잖나.”
직접적인 칭찬에 정민우가 살짝 표정을 관리했다.
“과찬이십니다.”
“과찬은 무슨. 이런 말은 나만 하는 게 아냐. 보고 올라오는 팀장들도, 다른 이사들도 그런 평가를 해. 모르는 건…… 그래, 곽 본이나 신 이사 정도겠지.”
왕이범은 차로 다시 목을 축이더니 정민우를 향해 슬쩍 상체를 내렸다.
“그러니까 정 팀장. 한번 버텨 보자고, 우리. NBS가 어떻게 바뀔지, 어떻게 알겠어.”
신뢰가 담긴 말을 들으면서도 정민우의 심정은 복잡해졌다.
전략기획실 체제 아래에서 현재 PD들이 얼마나 불만을 품고 있는지, 왕이범이라고 모르지 않는다.
그런 그가 하는 말이기에, 우선적으로 믿어도 될까, 다음으로는…….
‘버틴다라……. 언제까지일까.’
지금도 슬슬 예능국 내부에서 한계가 느껴지는데,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의문.
그러면서도 정민우는 왕이범을 보았다.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응답했다.
“시원해서 좋군그래. 다음에 권 팀장 끼어서 술이나 한잔 하자고. 인하 나간 뒤로 편하게 술 마실 상대가 없어서 재미가 없어, 내가.”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권 팀장에게는 제가 언질해 두겠습니다.”
그렇게 다시 평소 대화로 돌아왔는데, 지잉― 하고 정민우의 폰이 울렸다.
팀 단체톡이라 왕이범의 양해를 구하고 확인한 정민우가,
“이사님! 이 기사 좀 보십시오.”
그가 놀라서 내민 화면을 보고, 왕이범의 눈 또한 커졌다.
“서인하 이 녀석…… 이런 걸 숨기고 있었다고……?”
* * *
“……기사 여론은 뭐, 그냥저냥인 것 같습니다.”
곽성찬은 영화사 바람처럼의 사무실에 있었다.
신호현의 눈치를 살펴 직접 미팅을 나온 것이다.
신동욱 실장도 마찬가지로 기사를 확인했기 때문에 어떤 덧글이 달려 있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당잠사 웹판으로 함? 대박이네ㅎㅎㅎ
―부제 비슷한 거 달린 거 보니까 아예 다 바꿀 건가 본데
―트립메이커라니 어디서 비슷한 제목을 본 기억이.....
└무XXX커?ㅋㅋㅋㅋ
└읍비메이읍ㅋㅋㅋ
―윗분들 너무 뼈때리는 거 아니신가욯ㅎㅎㅎㅎㅎ는 바람처럼이 제작사니 킹리적갓심 확정ㅋㅋㅋ
―근데 방피디도 아니고 류준혁도 없고 최효명도 없는데 이게 어디가 당잠사임?-_-;;
└당잠사 이름 팔아서 새 사이트 좀 팔아먹을 수도 있지! 왜 우리 애 기죽이고 그래욧!』
‘이걸 그냥저냥이라고 할 순 없을 것 같은데.’
그런 소리를 속으로만 내뱉으면서, 곽성찬을 보았다.
“뭐, 어차피 방송만 잘 만들면 다 좋아질 거니까요. 대신, 어차피 웹판이니까 시청자 의식을 그렇게 할 필요는 없으니, 좀 더 자유롭게 만들 수 있겠죠?”
“그건 보장해 드리죠. 19금까지만 안 가면 될 겁니다. 방심위 쪽은 신 이사님이 처리해 줄 테니까.”
그래, 그렇다면 여론이 그다지 좋지 못하다고 해도 충분히 괜찮은 성적을 기대할 수 있다.
신동욱은 자신이 있었다. <무비 메이커>가 고꾸라진 것은 배우 탓이고, <골목대장>은 시즌1로 마무리되긴 했지만 평가가 아주 나빴던 것도 아니니.
그런 자기변명을 꾸준히 해 와서, 이제 그런 일이 있었던가 하는 수준까지 왔다.
“류준혁도, 최효명도 없다 해도 뭐, <당잠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만들 거니까 지원이나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시죠. 보도자료도 꾸준히 돌려놔서 아마 오픈 전까지 화제성을 저쪽에 뺏길 일도 없을 테고, 상황은 나쁘지 않습니다.”
곽성찬이 분석하기로, <당잠사>를 선두로 한 캐스트플러스 독점작들은, 노이즈도 포함해서 제법 화제가 되고 있었다.
엘도라도에서도 화제작을 발표하긴 했지만 보통은 해외 수입작이었고, 국내 작품은 아직 이렇다 하게 발표된 것이 없었다.
그런 상황을 노리고 일찍 독점작 발표를 한 만큼, 꾸준한 화제성을 위해서 기자들을 구워삶아 놓았다.
“아이윌 쪽 이야기는 혹시 들으신 거 없습니까?”
곽성찬이 묻자, 신동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그건 제가 물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영화계 쪽은 저보다 더 잘 아실 테니 묻는 겁니다. 그쪽 회사에 금완승 감독이 관련되어 있으니.”
“음…… 뭐, 최근 그쪽 계열 감독들이 아이윌을 들렀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저도 좀 파 보려고 했는데 보안이 꽤 대단하더군요.”
“뭔가 대단한 거라도 준비하나 보군요.”
“<V.I.P> 시즌2일 수도 있고요.”
“그건 채널T에서 허소윤 CP가 아직 기획만 진행하고 있다던데.”
둘이서 그런 대화를 나눴지만, 결국 정보가 딱히 없다는 결론만 났다.
대충 이야기는 다 끝냈다고 생각한 곽성찬이 시계를 보고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기획안대로 진행하시고 컨펌은 표 실장하고 협의하세요.”
“예. 그럼 잘…….”
이라고 인사를 하려는데, 회의실로 들어온 부하로 인해 신동욱의 말이 뚝 끊겼다.
“실장님, 방금 기사가 떴는데……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가 가져다주는 태블릿을 열어 본 신동욱이 굳은 얼굴로 곽성찬에게 넘겼다.
“왜 그러시는…….”
의아해하던 곽성찬도 말을 잃었다.
『엘도라도―아이윌 오리지널 예능 베일을 벗다! 좀비 탈출 예능 ‘이스케이프’!』
『좀비+방탈출+추격+수수께끼, 복합 예능의 새 시대를 연다! 엘도라도 독점작!』
『아이윌―강대한 PD, 세계에서도 통할 것인가? ‘이스케이프’ 100개국 동시 방영 예정』
도로 자리에 앉아, 곽성찬과 신동욱은 기사를 샅샅이 훑었다.
보도자료가 분명하지만, 그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미친…….”
그런 말이 절로 나왔다.
지금까지 겉으로나마 예의를 차려 왔던 곽성찬의 입에서 그런 거친 말이 나왔음에도, 신동욱도 거기에 반응하지 못했다.
“미친…….”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엘도라도에서 거액 투자를 했다는 기사를 봤을 때만 해도 무슨 헛짓거리인가 하는 생각만 했는데.
그들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규모의 도전을 벌이고 있었다.
‘미친 강대한……!’
두 사람의 머릿속에 같은 단어가 떠올랐다.
* * *
『―미친ㅋㅋㅋㅋㅋㅋㅋ예능에서 좀비라고?ㅋㅋㅋㅋㅋㅋㅋㅋ
―예능+좀비, 이거 전에 완전 망한 거 하나 있지 않나?
―모방송국에서 비슷한 거 했다가 말아먹은 전적이 있지
└그건 코너 중 하나 아니었음?
└말아먹은 건 맞지
└성공한 것도 있음 그것도 에피소드 중 하나로 썼지만
―기사 보니까 스케일이 보통이 아닌데?ㅋㅋㅋㅋㅋ 건물도 짓고 있다고?ㅋㅋㅋㅋ
―아니 이젠 좀비 가지고 예능이냨ㅋㅋㅋ
―암튼 모르겠고 강피디가 미친 건 확실하다ㅋㅋㅋㅋㅋㅋ』
포털에 기사가 등록되자마자 무수한 덧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예능이든 드라마든, 좀비를 소재로 삼은 적은 있어도, 이토록 본격적으로 좀비물 예능을 표방한 케이스는 처음이었다.
거기다 대다수가 괜찮은 여론이었다.
이게 다 작년 듀플릭스에서 성공한 <마지막 제국> 덕분이다.
일제강점기 시대의 좀비물이 나온다고 했을 때, 티저가 떴을 때도 많은 이가 우려를 했었다.
한국에서 제대로 된 좀비물 드라마를 만들 수 있을 리가 없다고.
그렇지만 결국 <마지막 제국>은 전 세계로 히트를 쳤다.
그 일이 우리 <이스케이프>에도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더불어, 우리보다 앞서서 캐스트플러스 독점작 관련 기사가 뜬 것이 반대급부로 좋은 효과를 보였다.
[100%]
‘최대의 화제성을 가질 수 있는 기사 보도 타이밍’에 대한 확률이 눈앞에 나타났다가 모래처럼 사그라들었다.
보도자료 공개 시간을 분 단위로 세분화해서 확률을 확인한 보람이 있었다.
완벽한 타이밍이란 이런 것을 말하리라.
“대한아.”
옆자리에서 박주영 선배가 손을 들었다.
“실검 1위 먹었다, 야.”
짜악―!
그 손에 하이파이브를 하는 소리가 사무실을 울렸지만,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모두가 뿌듯한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진짜 강 PD가 말한 대로 되었네요……. 캐스트플러스 글들은 전부 밀렸어.”
“우 PD,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요. 이 자식이 이거 진짜 촉새라니까.”
“요물이지.”
우철민 PD, 박주영 선배, 서인하 선배가 줄줄이 이야기해서 나는 씨익 웃어 주기만 했다.
“크으, 웃는 거 봐. 재수 없는 녀석.”
박주영 선배가 낄낄대고, 우철민 PD도 덩달아 웃는다.
만난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이렇게 맘이 통하는 걸 보니, 내가 참 뿌듯하네.
방수정 PD도 때마침 돌아와서 반응에 대한 축하를 해 주었고, 나는 지급된 포인트를 확인하고서 즉각 다음 확률 보기로 넘어갔다.
[‘<이스케이프> 최적의 출연진 구성’의 확률 보기를 사용 중입니다.]
[89%]
출연자 계약서를 손에 들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쉬지 않는 우리 강 PD. 그래, 빨리 가서 또 한 건 하고 와!”
“옙.”
직원들에게 엄지를 척 치켜 올려주고, 나는 마지막 출연자 계약을 위해 회사를 나섰다.
그날 곧바로 도장을 찍고,
[100%]
최적의 출연진을 구성한 3주 뒤.
“<이스케이프>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분당에서 <이스케이프>의 촬영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