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기다리던 신호
<이스케이프>는 좀비 예능을 표방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좀비에게 쫓기기만 하는 추격 예능을 찍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추격만으로 한 시즌의 내용을 끌고 나가기는 힘들 거라 판단했다.
그래서 거기에, 방탈출 요소를 집어넣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기본 구도는 이렇습니다.”
스크린에 PPT 화면을 띄워 놓고 나는 설명했다.
“세상에 좀비 바이러스가 퍼지고 약 한 달 뒤. 지구가 멸망을 향해 갈 때, 여기 빌딩에서 눈을 뜬 사람이 있습니다. 천장이 무너지면서 정신을 잃은 건데, 깨어나니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일단 폐쇄된 사무실의 격폐문을 열고 빠져나와서, 다른 사무실과 층에 있던 사람과 만나서 빌딩을 탈출합니다.”
그때 만나는 사람들이 확정된 출연진들.
현재 8명을 예정하고 있지만, 스토리텔링과 기획에 따라서는 좀 더 추가될 가능성도 있다.
“빌딩을 탈출해서 이곳 다리를 건너고, 중간에 만나는 좀비를 지도를 참조하면서 피하고, 그러다가 연구소 등의 존재를 알게 되고, 바이러스 항체를 찾으러 가는 구도가 10화까지의 스토리텔링이 될 예정입니다.”
전체 배경은 분당……인 척하지만 서울과 그 외곽 지역이 주다. 현재 판교역 근처의 빌딩을 섭외 중이고, 공사가 시작되지 않은 공사터를 통째로 미로로 만들 예정이다.
거기에 더해, 성남 외곽 쪽의 부지를 빌려서 연구소 세트가 건설에 들어갔다.
정말로, 엘도라도의 무식한 자금 투자가 없었다면, 예능 한 시즌 만들겠다고 밀어붙일 스케일이 아니었다.
설명을 하면서도, 나도 참 잘도 이 일을 계획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토리텔링 자체는 별게 아니네.”
이야기를 툭 꺼내는 사람은 금완승 감독이었다.
<라이벌>의 천만 관객 흥행과 함께 후속작을 준비하는 중에, 나의 도움 요청에 응하여 온 것이다.
금완승 감독만이 아니라 아이윌 내의 감독들, 우이독경의 감독들, 외주사 감독들까지.
십 수 명의 감독들이 회의실에 모여 있었다.
나는 오늘, 이들에게 로케이션 플랜에 대한 PPT를 진행하고 있었다.
“스토리는 최대한 단순하게 엮었습니다. 뭐, 방탈출 카페 쪽과 협력해서 수수께끼나 복잡한 반전 요소, 미스터리 요소도 대본상에 올라 있긴 하지만, 그걸 전달하지 못하면 다 끝이니까요. 시청자들은 예능을 보는 거니까, 금 감독님의 대본처럼 놀랍도록 치밀하게 구성하진 않았습니다.”
거기 더해, 오늘 설명은 어디까지나 간략화한 거니까요, 라고 덧붙이자 금완승 감독이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그래, 내가 봐도 그게 나아 보여. 시청자들이 영화나 드라마 보려는 게 아니니까. 그래도 만들려는 건 드라마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10화짜리 페이크 드라마, 라는 생각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관찰 예능이지만, 어쨌든 출연진에게 최소한의 진행 대본도 넘어갈 거고요. 물론 대사 처리나 그들의 대응은 전부 리얼이겠지만요.”
최악의 상황으로는, 풀라고 둔 수수께끼를 하룻밤 동안 못 풀 수도 있고, 아예 힘으로 뚫고 나올 수도 있다.
제작진으로서 그런 상황을 모두 상정하고서 지금도 플랜을 짜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적절한 타이밍에 또 금완승 감독이 질문을 던져 주었다. 미리 상의한 것도 없는데 참 고마운 사람이다.
나는 스크린 화면을 바꿔서, 연구소 설계도를 띄웠다.
“이 연구소 건물은 아직 짓고 있는 중입니다. 짓는다고 해서 뭐 본격 빌딩같이 짓는 건 아니고요, 세트 역할을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건데, 뼈대가 만들어지면 감독님들께 카메라 앵글 쪽으로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물론 추가해, 빌딩 에피소드 등의 촬영 협조도.
정식 일 의뢰이고, 미리 설명도 했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뼈대 나오면 미리 가서 답사 좀 하면 되겠지.”
“카메라 몇 대 챙겨가야겠네.”
“ENG가 필요한가? 거치로 전부 처리될 것 같기도 한데.”
모두 연차 찬 감독들이 모여 있다 보니 설계도면만으로도 단숨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나는 그 의견들을 하나씩 기록하면서, 마지막까지 프레젠테이션을 마쳤다.
“그럼, 리허설 날에 연락드리겠습니다.”
감독들에게 인사를 하고 보내자 어깨에 올라 있던 짐이 조금 덜어지는 기분이었다.
“힘든 길을 가는구만.”
마지막까지 남은 금완승 감독이 히죽 웃었다.
“내가 NBS 나가서 회사 차리라고, 그럼 노는 물이 더 넓어질 거라고 부추기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 바란 건 아닌데 말이여. 덕분에 우리 회사도 스케줄 조정해야 하잖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이구, 뻔뻔한 것 좀 봐. 감사 인사만 하면 단가?”
핀잔을 줘도 장난스레 웃어 보이는 금완승 감독의 얼굴은 밝았다.
이 기획을 전했을 때, 금완승 감독은 아주 즐거워했다. 감독으로서 새로운 도전이 고팠다고, 신작 들어가기 전에 새로운 것을 하고 싶었는데 잘됐다고 말이다.
“신작은 <라이벌2>인가요?”
“그건 아직 시나리오 짜는 중이야. 신작은…… 조금 다른 걸 해 보려고.”
“다른 거요?”
“1% 상류층의 집에 숨어든 1% 하류층 주인공의 이야기인데……. 아마 그동안 내가 했던 액션물하고는 좀 궤가 다를 것 같아. 대본 나오면 한번 보여주지.”
단순히 읽어 보라는 의미가 아님을 나는 알고 있다.
“감독님이 좀 다른 걸 하신다고 하니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이젠 해외에서도 상 타실 때 됐죠.”
“상은 무슨. 다들 다음 것도 천만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해 대서 부담돼 죽겠어. 소박하게 할 거야, 소박하게.”
올해 연말 영화상도 이미 예약되어 있다는 평을 받는 사람이 소박하게는.
그렇지만 난 굳이 그 부분을 태클 걸지 않고 웃어만 주었다.
“감독님!”
회의실 문이 열리면서 민희가 들어왔다.
“여어, 이 작가. 오랜만이야? 아이윌 들어간 이후로는 연락도 뜸하더니?”
“하하하, 죄송해요! 누구 씨가 들어오자마자 부려먹어서 말이에요.”
정답게 이야기하며 다가오는 민희와 금완승 감독의 눈길이 나에게로 향했다.
이 두 사람이 모이면 언제나 내 구박을 하는데.
이미 도망칠 타이밍은 놓쳐서, 나는 한동안 힘없이 당하기만 했다.
한참 나를 두고 즐겁게 씹으신 뒤, 금완승 감독이 스크린 쪽을 가리켰다.
“<이스케이프> 메인 작가, 이 작가가 맡았다며.”
“예. 덕분에 요새 드라마다, 영화다 가리지 않고 자료 찾아서 보고 있어요.”
“혹시 자료 필요하면 이야기해. 내가 우리 이 작가라면 회사 자료실을 내줄 테니까.”
“어머, 감사해요! 당장 다음 주에 가도 될까요?”
민희가 신이 나서 곧장 약속을 잡고, 금완승 감독도 잠깐 당황했다가 신나게 응했다.
어느새 스승과 제자가 되어 버린 두 사람을 보면서 나는 흐뭇하게 스크린을 돌아보았다.
<이스케이프>는 이제 시작이지만, 벌써 50% 이상 성공한 기분이 들었다.
* * *
아이템 ‘너의 목소리가 들려’를 사용한 이후로 나의 적립 포인트는 여전히 바닥이었다.
그사이 자잘하게 100%를 달성한 경우도 있지만, 그렇다고 아직도 100P를 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다지 부정적이지 않았다.
언제는 아이템 열심히 쓰고 살았다고.
얼마 전 계약 건처럼 절실히 필요한 경우도 분명 있긴 하지만, 확률을 볼 수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사기적인 능력이다.
지금처럼.
[82%]
“정말 빠르시네요. 벌써 80% 이상 진행된 겁니까?”
설계도를 보고, 지어지고 있는 세트를 확인하고서 내뱉는 내 말에, 시공회사 팀장이 혀를 내둘렀다.
“눈썰미가 대단하시네요. 말 그대로 현재 80% 정도 되었습니다. 아마 예정보다 더 일찍 끝날 거예요.”
희끗희끗 흰머리가 보이는 팀장은 금완승 감독이 소개해 준 사람이었다.
대도구나 세트 제작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그만큼 속도가 아주 빨랐다.
얼마 전 촬영 감독들이 현장에 찾아와서 카메라 포인트를 전체적으로 잡아 놓고 갔는데, 팀장은 그것들도 빠짐없이 반영해서 미술팀에 전달한 상태였다.
내부 보충을 하고, 미술팀이 들어가서 아이템 등 인테리어를 꾸미고 나면 세트 준비는 완료가 된다.
“마지막까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요. 저희도 이런 일 오랜만이라 밤낮없이 하고 있습니다.”
“잠은 주무시면서 하세요.”
열심히 해 주는 건 고맙지만, 그러다 탈 나면 곤란하니 나는 쉬엄쉬엄하라고 일러 주고 현장을 나왔다.
오늘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다.
그대로 판교로 넘어가서 촬영지 섭외에 응해 준 빌딩 관리소를 만나서 일정을 조율하고, 바로 그 옆의 공사장 관리소를 만나서 세트 구성에 대한 스케줄을 조정했다.
아침에 나가서 세 군데를 돌고 나니 금방 해가 지려고 하고 있었다.
지잉―
차에서 잠깐 메일 들어온 것을 처리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예, 선배.”
박주영 선배였다.
그는 이번 주부터 아이윌에 본격적으로 합류하여 일을 시작했다.
<V.I.P> 시즌2를 곧장 진행하고 있는데, 그러면서 나의 <이스케이프> 제작도 돕고 있었다.
“판교냐? 스케줄 협의하러 나갔다던데.”
“예. 좀 전에 미팅은 다 끝냈습니다.”
“빠르네. 나도 협의 끝냈다. 그런데 한강 창고는 새로 알아봐야 할 것 같아. 거기 불법 시설 적발이 되었대.”
“아, 어쩐지.”
촬영지 선정할 때 확률적으로 찜찜한 구석이 있었는데 왜 그런지는 확인하지 못했었다.
미리 박주영 선배에게 가 달라고 부탁해서 다행이었다.
“알고 있었냐?”
“감이 안 좋았거든요. 제가 찾아 둔 다른 창고들 있습니다. 그거 메일 보내 드릴 테니까…… 혹시 아직 근처에 있으세요?”
“아직 출발 안 했어.”
“그럼 창고 몇 군데 더 들러서 견적 좀 봐 주세요.”
그렇게 지시를 하고서 통화를 끊으니 참 기분이 묘했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자연스레 선배에게 지시를 내리는 입장이 된 거지.
이제는 선배도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 주고 있는 감각이, 참으로 묘했다.
괜히 간지럽지도 않은 볼을 긁고서, 메일 작업을 끝내고 차에 시동을 걸려는데 다시 전화가 왔다.
『라이언 킴』
차에 시동을 걸어 빠져나가면서 전화를 받았다.
“예, 강대한입니다.”
“접니다, 라이언. 로케이션 구성안 받았어요. 진행이 빠르시군요, 역시.”
“별말씀을요. 다들 열심히 도와준 덕분입니다.”
성실하게 인사를 받아 준 다음에, 촬영지 중에 변경이 있을 것 같다고도 알렸다.
“창고 빼고, 나머지 다섯 곳은 확정이라고 봐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저희 쪽에서 혹시 도울 일 있을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편의를 이렇게 봐주시는데 손 벌릴 수는 없죠. 다만…….”
“출연진 말이죠? 예, 알고 있어요. 속 편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벼운 어조로 이야기하지만, 그 뒤편의 어조를 나는 읽을 수 있었다.
『세계 2위 OTT 플랫폼 ‘엘도라도’ 한국 오픈일 초읽기!』
『겨울, ‘엘도라도’가 상륙한다!』
이미 기사가 포털에 뜬 상태.
완전한 오픈 준비를 마치고 본격적인 마케팅에 들어가 있고, 지나가는 버스 옆면에도 ‘엘도라도’라는 글자가 붙어 있다.
겨울에 오픈인데, 이왕이면 최대한 가까이 독점작을 오픈하고 싶으리라.
그렇지만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고, 라이언 킴은 가장 중요한 출연진에 대한 확정을 재촉하지 않는 것이다.
참 좋은 사람이고, 좋은 업체다.
계약에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해도, 그만큼 나도 보답하고 싶어지는 곳이었다.
“조만간 완전한 출연진 구성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나는 기다리고 있었다.
현재 확정된 출연진과 교섭 중인 출연진을 저울질하면서 확률을 보고, 방송 화제성을 따지고 최적인 출연진을 계산했다.
시기에 따라, 환경에 따라 확률은 바뀐다.
내 멋대로 확률 보기를 멈추지 않고, 최적의 확률이 기록되는 때를 나는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안 남았어.”
콜 신호는, 정말 눈앞에 있었다.
며칠 후.
『케이블 통합 OTT 플랫폼 ‘캐스트플러스’, 독점작 공개!』
『캐스트플러스 독점작 ‘당잠사:The tripmaker(가제)’ 포함 정보 분석!』
『‘당잠사’ 캐스트플러스판, 출연진 전원 교체! 새 술은 새 부대에』
기다리던 신호가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