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동상이몽
물론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다.
출연진은 짜야 하고, 지금도 엘도라도와 그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듀플릭스의 스타일을 벤치마킹한 것인지, 엘도라도도 원래 같은 스타일인 건지 모르겠는데, 라이언 킴은 계약을 체결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출연진은 뭐, 저희한테 최종 리스트만 알려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최종안 나오는 대로 컨펌을 받고 진행을…….”
“아뇨, 아뇨. 말 그대로 알려주시면 된다는 이야기예요.”
나는 눈을 끔뻑이다가 다시 물었다.
“컨펌이 아니라…… 통보만 하면 된다는 걸까요?”
“예, 그겁니다.”
그는 싱긋 웃음을 짓고서는, 회의실 밖을 가리켰다.
이야기를 나누는 곳은 엘도라도 사무실.
밖은 매우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나 다국적 사회였구나 생각하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물론 저희 소속 PD도 있습니다만, 대부분은 저 같은 매니저들이에요. 콘텐츠를 계약해서 수급은 해 오지만, 그 제작에 대해서 모두가 프로페셔널하다고 할 순 없어요. 그래서, 제작에 관해서는 전부 제작사에 일임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건…….”
“위험 부담도 물론 있기야 하지만, 제작사 측의 권한을 최대한 보장해 주지 않으면 좋은 콘텐츠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게 저희 생각…… 아니, OTT 업계 쪽의 공통된 생각이에요.”
그래서 듀플릭스든 다른 경쟁사들도 모두 그러한 방침을 취한다는 것이다.
나는 많은 생각이 들었다. 자율성을 나름 인정해 준 허소윤 CP도 이렇게까지 자율적이진 않았던 터라 어색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라이언 킴의 거듭된 말에 결국 그것을 받아들이고, 구체적인 출연진이 만들어지면 알리기로 협의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강 PD가 최적의 출연진을 꾸며 줄 것이라고 믿고 있으니 하는 말이에요. 잘 부탁합니다.”
마지막 그 웃음이 참 부담스럽긴 했지만, 한편으론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도 했다.
그렇게 출연진을 짜기 위해 AGD 앱을 풀로 활용하는 중에도, 사실 엑시트는 올릴 생각도 하지 못했다.
<V.I.P>라면 또 모를까, <이스케이프>는 현재 계획으로선 촬영 기간만 열흘이 걸린다.
그 시간을 엑시트가 해외 투어 중에 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출연진에 포함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었다.
그렇지만 내 희망은 희망이고, 현실은 깊게 생각해야 했다.
그래서, 효명이의 제안은 기뻤지만 나는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고마워, 그렇게 말해 줘서.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너한테 이 스케줄은 무리야.”
“왜요?”
김치찌개를 퍼 먹으면서 순박하게 묻는 월드 스타의 눈빛에 마음이 약해졌지만, 일단은 식사를 하고 이야기하자고 말을 끊었다.
“커피라도 사서 들여보낼 테니, 둘이서 이야기해.”
대표 되시는 분이 정리된 배달 용기들을 양손에 들고 회의실을 나가고, 나는 다른 여직원이 사 들고 온 커피를 나눠 들고 다시 효명이를 보았다.
“<이스케이프>는 지금 예정 기간만 열흘이야. 본 촬영만 그 정도라는 거고, 세트를 짓고 동선 설계, 리허설 등등을 생각하면 한 달 내내 붙어 있어야 해. 그 기간을…… 네가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은데.”
정은 정이고, 나는 PD 입장에서 냉정하게 평가했다.
세트 건설은 이미 계획에 들어가 있다.
빠르면 2주 안에 세트 건설에 들어갈 예정인데, 세트가 아무리 빨리 지어진다 한들 엑시트가 다시 출국한 다음에나 완성될 것이다.
“음…….”
내 말에 효명이도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시간이 애매하네요.”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 안 할 수가 없어. 그러게 적당히 좀 뜨지. 누가 일 년 내내 해외 투어 다닐 정도로 탑아이돌이 되랬냐.”
“에이, 이게 누구 때문인데요. 다 형 때문이지.”
“내가 뭘.”
“우리 엑시트가 풀리기 시작한 건 내가 <당잠사>에 출연했을 때부터예요. <드림 어게인>발도 있고. 그 계기가 없었다면 지금 이 인기도 없다는 건, 나만이 아니라 우리 회사 사람 전부 다 하는 이야기인데요.”
그래, 이런 게 나비효과라고 하는 거겠지.
그때 난 AGD 앱을 처음 만나서, 처음으로 확률 보기를 사용하고, 그렇게 효명이를 캐스팅했다.
5년차 중고신인급이었던 엑시트가 그 일을 계기로 월드 스타로 거듭날지, 그때 누가 짐작했을까.
둘이서 커피를 마시며, 잠깐 옛날 기억들을 되짚었다.
잠깐이었지만 추억 여행에 가슴이 훈훈해졌다.
“그건 그거고.”
그렇지만 이야기를 끝낼 필요는 있었다.
“맘만 고맙게 받을게. 먼저 말해 줘서 고맙다.”
“뭘요, 형한테 뭔가 큰 기회가 온 것 같아서, 나도 돕고 싶어서 한 말이었는데, 아쉽네요.”
“아쉽다면…… 음, 조금 욕심 부려서 <V.I.P>에는 어떠냐.”
“그, 스태프 체험 예능인가 하는 거요?”
“봤어?”
“전부 다는 못 봤지만, 준혁이 형님 편이랑 박지운? 그 배우 편은 봤어요. 아, 모델 편도 봤구나.”
나는 폰으로 시즌2 기획안을 찾아서 보여주었다.
박주영 선배가 맡기로 한 이후로 또 아이템이 업데이트된 버전이었다.
“이건 길어도 사흘이면 촬영이 끝나니까, 훨씬 부담은 덜하지. 바로 촬영 들어갈 계획도 있고.”
효명이는 기획안을 슥슥 넘겨 보다가 가볍게 고개를 들었다.
“이건 나도 그렇고 다른 멤버들도 다 괜찮을 것 같은데요. 말해 둘 테니까 그거 일현이 형한테 좀 보내놔 주세요.”
“엉? 진짜?”
“그러려고 나한테 보여준 거 아니에요?”
이거 참. 안 되면 말고, 라는 마음으로 이야기한 거였는데, 아주 간단하게 대화가 끝나 버렸다.
내가 살짝 어안이 벙벙해져 있자, 효명이가 다시 킥킥 소리 내어 웃었다.
“이제 우리도 스케줄을 스스로 고를 수 있는 정도는 되어서요. 그동안 한국 방송을 너무 못 나와서, 괜찮은 기회 있으면 국내에 있을 때 나가자 하고 멤버들이랑 이야기한 적 있어요. 그게 형이 만드는 프로그램이면 더 좋죠.”
멤버들도 다 형 보고 싶어 하고, 라고 붙여 주는 말에 괜스레 감동이 느껴졌다.
나는 서둘러 할 일 목록에 올려두고서 인사했다.
“고맙다, 진짜. 큰 도움이 될 거야.”
“그렇다면 저도 좋죠.”
우리는 플라스틱 컵을 들어 건배하듯 부딪쳤다.
꽤 오랜만에 본,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동생이었지만, 아직도 마음이 이렇게 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 한쪽이 뜨끈해졌다.
정말…… 같이 <이스케이프>를 만들 수 있다면 좋을 텐데.
* * *
만남은 꽤 짧았다.
사실 시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보냈으니 짧은 것은 아니나, 몇 달 못 본 여파로 심적인 시간이 바람처럼 지나간 탓이다.
사무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저녁 시간 즈음이 되어서는 외근에서 돌아온 이민희도 합류하여 회사 근처 보안 좋은 술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맘 같아서는 술 한잔 더 하고 싶었지만, 내일 멤버들 귀국을 앞둔 일정 때문에 그들은 적당한 시간에 파하기로 했다.
“들어가요, 형.”
“너 가는 거 보고.”
건물 주차장에서 그렇게 티격태격하고 있으니, 그들 옆에서 이민희가 퉁명스레 한마디 했다.
“이러니까 너희들 이상한 소문 나는 거야. 외삼촌과 조카의 두근두근한 재회인 것은 나도 이해는 하는데, 슬슬 질투 나니까 빨리 좀 들어가시죠.”
이러다 팬들 보면 어쩌려고, 라고 냉철하게 지적하는 이민희의 말에 최효명과 강대한은 금방 식어 버렸다.
맞는 말이라서 받아칠 수도 없었다.
때마침 송일현이 운전하는 밴이 도착했다.
“오랜만에 뵙네요, 송 팀장님.”
“아이고, 강 PD님. 잘 지내셨습니까.”
강대한은 송일현을 보는 것도 몇 달 만이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효명이가 하루 종일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저도 오랜만에 봐서 좋았는데요. 뭐.”
“그럼 다행이고요. 아, 보내주신 기획안은 검토 끝나자마자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예. 잘 부탁드립니다.”
악수를 나누는 사이, 밴 뒷좌석에 자리한 최효명이 창문을 열고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럼 가 볼게요.”
“그래. 잘 가고, 시간 날 때 연락해. 진짜 김치찌개 맛집에서 사 줄 테니까.”
“꼭 시간 내야겠네요. 그땐 준혁이 형님이나 다른 분도 다 같이 보고요.”
마지막까지 그렇게 인사를 한 다음, 두 사람의 배웅을 받으면서 밴이 출발했다.
주차장을 빠져나가면서 슬쩍 뒤를 확인하자, 입구에서 강대한과 이민희는 여전히 손을 흔들며 서 있었다.
이젠 국내 방송계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존재가 되었는데도, 예전과 다를 바가 없는 강대한을 보고 최효명은 묘하게 가슴 한쪽이 묵직해졌다.
가슴을 쓰다듬고 있자니, 송일현이 룸미러로 확인하고 말을 걸어왔다.
“왜, 술 많이 마셨어? 잠깐 세워서 숙취해소제라도 사 올까?”
“아니, 술은 별로 안 마셨어. 그냥 좀, 오랜만에 얼굴 봤더니 옛 생각도 들고 그래서 그래.”
“하긴, 진짜 오랜만에 본 거니까 그러기도 하겠다. 냉장고에 물 있으니까 그거라도 마셔.”
밴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기에, 미니냉장고도 구비되어 있었다.
송일현이 준비해 준 물을 꺼내 한 모금 마신 뒤, 최효명이 물었다.
“기획안은 어때? 내가 보기엔 애들도 좋아할 것 같던데. 사장님은 뭐라셔?”
“사장님은 보지도 않으셨어. 강 PD님 기획이라니까, 보지도 않고 진행하라고 하셨지.”
<더 라이벌> 이후로, 플래티넘의 사장은 강대한을 무한 신뢰하고 있었다.
류준혁이 이끌고 있는 배우 아카데미도 이미 꽤 성과를 얻고 있고, 새로 영입한 박지운도 좋은 성적을 얻고 있는데, 그 모든 계기가 강대한이니 그럴 만도 했다.
“사장님답네. 한번 꽂히면 딴 거 안 보시는 거.”
“그래, 그렇지. 이번 해외 투어도 결국 그래서 성사된 거니까.”
“그럼 일단 <V.I.P>는 진행하는 걸로 생각하면 되겠네.”
엑시트 전원이 출연할지, 아니면 일부만 출연할지는 좀 더 따져봐야겠지만, 출연 자체에 대해서는 송일현도 그렇고 모두가 긍정적이었다.
“그런데.”
그러다가, 송일현이 다시 입을 떼서 최효명이 시선을 돌렸다.
“NBS에서 연락이 왔어. <당잠사> 건으로.”
“아, 권 PD님? 그러게, 그분한테도 연락 한번 드려야 하는데.”
“아니, 그분 말고. 전략기획실에서 왔어. <당잠사>를 웹판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너랑 얼굴 한번 보고 싶다고.”
최효명의 유려한 눈썹이 살짝 찡그려졌다.
“전략기획실이라면…… 그 본부장이라는 사람?”
“미팅 요청은 표인배 실장이라는 사람이야.”
“아무튼. <당잠사> 마지막 시즌이다 어쩐다 하더니, 웹용으로 바꾼다고? 미튜브에서라도 할 건가?”
“거기 캐스트플러스인가 하는 사이트 만들잖아. 그 독점작으로 하려는 거지. 거기에 <당잠사> 기존 출연자를 붙여서.”
최효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잠사>라면 최효명에게도 의미가 큰 방송이니 연락한 것이리라.
“스케줄은 우리가 정하라는데, 어때. 만나라도 볼래?”
“음…… 내가 꼭 봐야 할까?”
“싫으면 내가 대신 보고. 굳이 네가 볼 필요 있나. 엑시트의 리더, 최효명인데.”
웃음기 섞인 말투에 최효명이 운전석을 째려보았다.
“뭐야, 비꼬는 거야?”
“비꼬긴. 강 PD님도 아닌데, 저쪽 사정 다 맞춰 줄 필요 없다는 거지. 엑시트도, 너도 이제 그럴 짬은 아니거든.”
그것은 자신감이었다.
엑시트가 한창 무명이었을 때부터 옆에서 서포트해 온 매니저인 송일현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감.
자신의 스타가 이제 어느 정도 레벨이 되었다는 자신감에서 오는 태도였다.
자만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은, 오늘같이 이전부터 연이 있는 강대한 같은 사람에게는 한결같기 때문이다.
“아냐. 그래도 만나는 봐야겠지. 건방지다는 소리 듣기도 싫고.”
“그래. 그럼 여유 있는 시간으로 잡을게.”
빈틈없이 대답하는 송일현의 뒤통수를 잠깐 보다가, 최효명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형. 우리 출국이 언제였지?”
“한 달 정도 뒤지. 날짜는 바뀔 수 있고.”
“그럼, 그다음 귀국은?”
“음…… 연말 가요제 스케줄에 따라서 달라질 것 같은데. 그사이에 앨범 작업이 있지만 그건 LA 스튜디오 빌릴 거니까…… 아무리 빨라도 연말은 되어야 귀국하겠지? 왜?”
최효명은 바깥 풍경을 잠깐 바라보았다.
어두운 서울의 야경이 그의 눈동자에 비추어졌다.
그가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송일현이 익숙한 듯 입을 다물었다.
은은한 음악이 흐르는 차 안의 분위기가 몇 분간 지나갔다.
그리고.
“내 휴가 일정, 아주 중요한 거 빼고는 전부 취소해 줘.”
최효명의 입에서 나온 말에, 송일현이 신호로 차가 멈춘 사이 고개를 돌렸다.
“여행 가고 싶다고, 여행 스케줄도 짜 놨잖아. 그것도?”
“그것도.”
“뭐 하려고?”
“앨범 작업 미리 해 두려고.”
최효명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빛나고 있었다.
“그럼…… 한 달 정도 귀국해도 될 시간이 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