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팬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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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한과의 전화를 끊은 라이언 킴이 휘파람을 부르며 사무실로 돌아왔다.
“기분 좋은 일 있으세요?”
지나가던 여사원이 묻는 말에 라이언 킴이 씨익 미소를 띠었다.
“느낌이 좋아서 말이야. 아이윌하고 일한 다음부터 뭔가 술술 풀리는 것 같아.”
“그래요? 하긴, 그 기획안 평가 좋던데요.”
“그치. 앨리스도 봤어?”
“저도 봤죠. 그대로만 만들어지면 정말 재미난 방송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그녀, 앨리스는 운영팀에서 일하는 직원이다.
라이언 킴과 같이 밖으로 도는 매니저와는 다르지만, 운영팀으로서 현재 진행되는 업무들에 대한 체크는 충분히 되어 있었다.
“진행되면, 결재 좀 잘 부탁해.”
그리고 무엇보다, 운영팀으로서 내부에서 예산, 진행 등 결재가 필요한 업무를 처리해 주는 유능한 직원이기에 라이언 킴도 고개를 못 들었다.
“제가 결정하나요, 그걸. GP님이나 대표님이 하는 거죠.”
엘도라도의 대표 혹은 GP.
엘도라도에서는 두 사람의 권한이 막강하다.
GP인 매튜 본드는 콘텐츠 수급과 운영을 총괄하고 있고, 라이언 킴은 그 밑에서 일하고 있다.
지사장은 정치권, 방송계와의 로비 같은 외부 업무를 전담해서 맡아 주고 있는데, 그만큼 한마디 한마디 입김이 셌다.
“그래도 앨리스가 이야기만 잘해 주면 다들 좋아하잖아. 잘 부탁해.”
“호호호. 그래요 뭐. 나중에 커피 한잔 사세요.”
“수십 잔도 사지.”
앨리스와 농담을 하면서 자리로 돌아와 다시 휴대폰을 잡은 라이언 킴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예, 접니다. 허 CP님. 이번에 보내 주신 오픈 리스트 중에…….”
채널T와 추가 협상을 벌이고, 다시 리스트를 정리하는 동안 일을 술술 풀렸다.
그렇기에, 라이언 킴마저도 아이윌과의 독점 계약이 틀어질 것이라곤 결코 생각지 않았다.
* * *
『아이윌, ‘V.I.P’ 시즌2 제작 기획 중……』
『채널T―아이윌 ‘V.I.P’ 다시 손발을 맞춘다!』
허소윤 CP와의 상의를 끝낸, 민준기 기자에게 보낸 보도자료가 일제히 포털에 등록되었다.
대다수가 내용을 미리 논의한 기사였지만, 개중에는 마지막까지 실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한 지점이 있었다.
『……일각에 따르면, ‘V.I.P’의 제작을 강대한 PD가 맡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다.
NBS를 나와 채널T에서도 굵직한 예능을 만들어 낸 강대한 PD, 그가 없는 ‘V.I.P’는 상상도 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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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윌과 채널T는 이 부분에 있어서는 말을 아끼고 있다. “이제 기획 시작인 단계라, 아직 정해진 건 없습니다.” 채널T 모 관계자의 말이다…….』
이 소식을 알렸을 때, 민준기 기자는 전화 너머에서 매우 놀라워했다.
“<V.I.P>는 시즌마다 연출을 따로 가져가는 전략인가요?”
“비슷할 것 같습니다.”
듣다 보니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아, 모호하게 긍정했다.
같은 예능이라고 올곧이 같은 PD가 제작을 맡으라는 법은 없다.
사정상, 여건상 그것이 불가능한 경우는 얼마든지 있고, <당잠사>처럼 방수정 PD에서 현준영, 그리고 권민헌 선배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V.I.P>도 차라리 그런 방식으로 나가는 것도, 오히려 연출이 일률화되는 느낌도 없고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민준기 기자를 이해시키고, 보도자료를 정리했다.
“기사들 다 떴네.”
내 뒤를 지나가면서 서인하 선배가 힐끔 보았다.
“좀 전부터 등록되기 시작했습니다. 메인 연출이 바뀐다는 언급도 살짝 넣었고요. 나중에 실제로 바뀌었을 때의 충격은 많이 완화될 것 같습니다.”
기사 밑의 것들도 의견이 분분하긴 하지만, 아주 나쁜 반응은 아니었다.
대다수가 추이를 지켜보자는 쪽이라서, 나중에 실제로 기사를 띄울 때 한 번 더 여론을 체크하면 될 듯했다.
“그래, 수고했어. 이제 슬슬 면접 준비해야지.”
“예. 회의실 정리하고 있습니다.”
직원들이 회의실의 불필요한 것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오늘은 PD 공고를 낸 이후의 최종 면접이다.
방수정 PD도 있으면 좋겠지만 촬영을 나갔고, 나와 서인하 선배가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와 함께 면접 때 물을 이야기를 정리하던 중에, 사무실 밖에서 연락을 받은 지원팀 직원이 나가서 지원자들을 대기실로 이동시켰다.
최종 면접자는 총 5명.
이력서를 보고, PD들의 실무자 면접까지 보고 올라온 인원들이다.
“가시죠.”
“그래.”
서인하 선배와 회의실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서 바깥으로 신호를 보냈다.
직원이 대기실에서 한 명씩 면접자들을 불러왔다.
“이름이랑 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어떤 포맷을 좋아하시죠?”
“경력이 몇 년 있으신데, 중간에 2년 정도 쉬신 건가요?”
“PD가 되시면 만들어 보고 싶은 예능이 있으십니까.”
으레 하는 질문들이 지나가고서, 그다음은 서인하 선배가 좀 더 심도 있는 질문을 던졌다.
나보다는 서인하 선배의 경력이 훨씬 길고, 수많은 PD를 밑에 두고 일해 본 경험이 있어서, 질문이 확실히 좀 더 예리했다.
“예, 말씀하신 그 방송들. 각각 장단점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이야기는 좀 전에 하신 말이랑 좀 반대인 것 같은데요.”
“같은 포맷인데 한쪽은 10%가 넘고, 한쪽은 3%가 안 나와서 조기 종영을 했죠. 왜 그런 것 같습니까?”
한참 일을 배울 때, 방수정 PD 밑에 들어가서 처음 일할 때 그녀가 그런 식으로 가르치곤 했다.
요즘 잘되는 방송들을 체크하고, 그것을 비교해서 장단점을 분석하고, 시청률이 떨어지는 건 왜 떨어지는 것 같냐고 묻고.
일도 배워야 하고, 방수정 PD의 그런 가르침도 따라야 하고, 덕분에 한참 밤잠도 설치면서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있었다.
그걸 누구한테 배웠나 했더니, 다 서인하 선배였구나.
면접을 하는 모습을 보니, 역시 한 방송사의 국장은 괜히 다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마지막 여성 지원자가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해 보였다.
다른 네 명과 다른 깊숙한 인사에 우리도 같이 고개를 숙이는데, 일어난 그녀가 문을 열고 나가기 전에 다시 뒤돌아 말했다.
“정말 예의 없는 말일 수도 있는데, 이 자리를 떠나면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몰라서 용기를 내서 말씀드립니다.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면접자 중에서는 최초의 요구라서, 나는 서인하 선배를 한번 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시죠. 무슨 부탁이시죠?”
“사인 좀 해 주세요.”
그녀가 뒤늦게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면접 보면서는 긴장해서 입술 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 같더니, 끝나고 나니까 싹 태도를 바꾸는 것이 놀라웠다.
“저요? 제 사인이요?”
“예. 강대한 PD님 팬이에요. <드림 어게인> 때부터 정말 프로그램 즐겁게 봐 왔고,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PD를 꿈꾸는 지망생이, 나를 보고 팬이라고 하다니.
얼떨떨한 기분에 뭐라고 곧바로 대꾸를 하지 못했다.
“좀 전에 좋아하는 프로그램 이야기했을 때 그 말 하지 그랬습니까.”
서인하 선배가 대신 그렇게 묻자, 그녀가 머쓱하게 웃었다.
“그럼 너무 팬인 거 티 날까 봐서요……. 놀라실 것 같아서 그러진 않았는데, 사인은 그래도 받아 가고 싶어서요.”
“정말 팬심이네요.”
내가 여전히 당황한 채 서인하 선배를 한 번 더 보자, 그가 피식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맘대로 하라는 의미였다.
“……네, 사인, 알겠습니다.”
“와아! 감사합니다!”
그녀가 가방을 즉시 열어, 거기서 A4 용지와 네임펜을 꺼냈다. 아무래도 집에서부터 준비해 온 것 같은데. 이 정도면 확신범인가.
나는 헛웃음을 참으면서 종이에 사인을 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PD로서 팬이라는 사람에게 사인을 해 본 적이 있던가……? 처음 아닌가……?
PD로서 계약서에 사인만 해 봤지, 이런 사인은 처음이라 괴상한 형태가 되었다.
“감사합니다! 액자에 넣어 평생 간직할게요!”
하지만 그 사인을 받고서, 그녀는 해맑은 웃음을 남겨 놓고 회의실을 떠났다.
마지막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하는 인사는 잊지 않고.
“별 신기한 경험을 다 해 보네요.”
“그러게 말이야. 당돌한 아가씨야. 면접 와서 사인을 받아 가다니.”
서인하 선배가 피식 웃었다.
“기분이 어떠냐. 지망생들의 우상이 되는 기분.”
“우상은요…… 그냥 부끄럽습니다. 제가 연예인도 아니고.”
“스타 PD시잖아. 밑의 애들에게 들어 보니, 너 때문에 우리 회사 지원한 애들이 절반이 넘는대. 그것 자체가 대단한 거 아니냐.”
그렇게 말해도, 그다지 피부에는 와 닿지 않는다.
아무리 이름값이 올라도, 프로그램을 제대로 만들지 못하면 금방 잊히는 직업이니까.
이름값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꾸준히 히트작을 만들고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내가 현재 그러고 있는지는 사실 아직도 불안하다.
“괜히 부담 주려는 거 아니니까, 그런 표정 하지 말고.”
“아닙니다. 적응할 일이겠죠. 그것보다, 면접은 어떠십니까.”
내가 표정을 바꿔 화제를 전환하자, 서인하 선배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두 명 정도 있긴 한데…… 넌 어때.”
“마지막 사람이요.”
“사인 받아간? 뭐야, 공사는 구분해야지.”
“그런 거 아닙니다.”
나는 정색해 주고 말했다.
“당돌하긴 해도 예의는 지킬 줄 알고, 또 우리 앞에서 지나치게 흥분하지도 않았고요. 정말 제 팬이라면 흥분할 만도 한데, 면접 때는 정말 면접에만 집중했잖습니까.”
“그건 그렇지.”
“프로그램에 대한 분석도 괜찮고…… 그래서, 오늘 본 사람 중에 제일 나아 보였습니다.”
사실, 그건 핑계고.
면접 보는 내내 AGD 앱을 활성화해 두었다.
다섯 명의 면접자를 모두 AGD 앱으로 판단을 했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능력 있는 PD로서 성장할 확률이 얼마나 변화하는지를 가늠했다.
마지막 여성 면접자는 사실,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는 별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일어나서 나에게 사인을 요청했을 때, 직접적인 팬심을 드러내기 시작했을 때부터 확률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런 팬심을 연료로 방송을 만드는 것이 훨씬 잘 맞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런 PD가 아이돌이나 덕질 관련 프로그램을 만든다면, 그 능력이 꽃필 수 있으리라.
“요즘은 팬심을 좀 아는 사람이 프로그램도 잘 만들잖습니까. 덕질도 해 본 사람이 잘한다고 하니까요.”
“결국 너의 사심 아니냐?”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서인하 선배가 장난스레 낄낄댔다가, 이내 다시 생각하는 얼굴이 되었다.
이윽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나도 마지막 친구는 맘에 들었어. 트렌드 분석도 제법 정확하고. 그래, 그럼 마지막 면접자를 한번 인턴으로 해 보자.”
면접이 통과되었다고 해서 정직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인턴 기간을 거쳐서, 최종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 기간 동안 그녀가 나와 AGD 앱이 판단한 능력을 발휘해 주기를, 나도 매우 크게 바랐다.
“그럼 연락하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경력직들은 혹시 어떻게 되었을까요?”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려는 서인하 선배를 붙잡듯이 물었다.
그가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내더니 도로 자리에 앉았다.
“몇 명 접촉해 봤는데, 혹하는 사람은 있는데 아직 정확히 낚인 사람은 없어.”
“다들 소극적인 건가요, 아니면 선배님 마음에 안 드시는 건가요.”
“둘 다. 맘에 들면 소극적이고, 아니면 맘에 안 들고.”
방수정 PD도 비슷하다고 덧붙이면서도 서인하 선배는 웃어 보였다.
“그래도 뭐, 걱정 마. 곧 결정 나서 바로 데려올 수도 있을 것 같으니까. <V.I.P> 시즌2 맡길 만한 사람이야.”
“맘 정해 두신 분이 있으신가 보네요.”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또 다시 머릿속에 한 사람이 스쳤다.
나로선 누구보다 믿을 만하고, 또 같이 일하면 든든할 사람.
그렇지만 역시나 생각만 하고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그런 내 기분을 읽듯이 진득이 나를 바라본 서인하 선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너도 맘에 들 거다. 결정 나면 알려주마.”
“예. 알겠습니다.”
이 부분은 전적으로 서인하 선배와 방수정 PD에게 맡겼다. 나는 그들을 믿고 있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