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한 통의 메시지
“……그러십니까. 아쉽게 되…….”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가, 뭔가 잘못 들은 걸 깨달았다.
“예?”
“수락한다고 했는데?”
다시 들어도 뭔가 잘못 들은 것 같다. AGD 앱이 나를 속인 건가? 밤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내 멍청한 표정을 보고, 방수정 PD는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소리 내어 웃는 모습이, 어쩐지 어제보다 훨씬 밝아 보였다.
“수락한 게 너무 예상외였어?”
“어…… 예. 부정은 못 하겠습니다. 사실 분명 거절하실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여차하면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늘어지려고 했는데…….”
그렇게 해도 과연 수락을 해 줄지 자신이 생기지 않는 확률이었으니까.
방수정 PD는 크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는 듯하더니 이야기했다.
“사실 어제 헤어질 때까지만 해도, 거절하려는 마음이 더 컸어. 오늘까지 생각해 본다고는 했지만…… 하룻밤 지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 같진 않았거든.”
AGD 앱으로 확률을 확인했을 시간까지, 그녀의 마음의 추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 왜 달라지신 건가요……?”
“메시지를 받았어. 선배한테서.”
방수정 PD가 말하는 선배가 누군지는 뻔했다.
“사장님한테…… 말입니까?”
“한국은 새벽 시간이었을 텐데,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더라고.”
내 메시지에는 전혀 답이 없었는데, 그사이 서인하 선배는 나름대로 방수정 PD를 설득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내가 자처하고 온 미국이지만, 빈손으로 돌아갈 것도 염두에 두었었는데.
태평양 넘어 저 먼 곳에서도 같은 마음으로 나를 기다려 주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NBS에 들어간 이후로…… 선배를 만난 이후로, 그렇게 간절하게 부탁하는 선배는 처음이었어.”
내 설득보다 서인하 선배의 메시지가 더욱 완벽하게 통했다는 말.
거기에 자존심이 상하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어떤 내용이길래 ‘56%’라는 비극적이기까지 한 확률을 뚫고 그녀의 마음을 움직였는지가 궁금했다.
“물론 선배 프라이버시도 있고 하니 메시지는 보여줄 수 없지만.”
“그럼요. 궁금한 건 사실이지만…… 그건 두 분만의 대화니까요.”
“그래. 이해해 준다니 고마워.”
어차피 중요한 건 메시지의 내용이 아니다.
그 메시지로 방수정 PD가 마음을 정했다는 것.
그것이 우리 회사와 방수정 PD에게도 결코 나쁜 방향은 아니라는 것.
그것이 중요했다.
“감사합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여 인사했다. 진심을 담아서.
“너무 그렇게 예의 차리면 내가 부끄러운데. 한참 마음 쓰게 만들어 놓고 너무 가볍게 태도를 바꿨으니까.”
“저희에게 좋은 쪽으로 태도를 바꾸신 거니, 전혀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쌍수 들고 환영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아, 그래도…… 당장 들어가는 건 힘들어. 여기서도 정리해야 할 일들이 좀 있어.”
“그럼요. 일단은 일정이…….”
나는 양해를 구하고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기획안을 꺼내 대략적인 스케줄을 다시 확인한 다음, 방수정 PD의 귀국 일정을 같이 논의해 잡았다.
“그사이 일은 저희가 방송사랑 협약해서 진행해 두겠습니다. 들어오시면 바로 합류하실 수 있도록.”
“벌써부터 부려먹을 생각이네? 이러니 선배가 너를 2인자로 둔 거겠지.”
“2인자라뇨. 방 PD님이 오시면 어차피 덧없는 자리입니다.”
“응? 무슨 소리야. 난 2인자 될 생각 없는데?”
논의한 일정을 노트북으로 정리하다가 나는 방수정 PD를 쳐다보았다. 또 뭔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GP 맡아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보고 국장 역할을 하라고? 싫어. 내가 그런 거 싫어서 NBS를 나간 건데, 아이윌에서까지 맡고 싶진 않아.”
난 표정을 굳혔다가 서둘러 수습했다. 그런 내막이 또 있던 건가?
“그대로 NBS에 있었다면…… 아마 서 선배 계획을 따라서 팀장이든 총괄이든 맡았을 거야. 선배도 그런 말을 했었고. 그런데 난…… 메인 PD로서 내 프로그램에 집중해 열심히 만들고 싶거든.”
그녀가 소탈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자리 욕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내가 스스로 생각하기로, 난 팀장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야. 내 방송 팀, 내가 메인으로 만드는 방송 하나. 그 정도가 딱 좋아.”
그래서, 아이윌에서도 그 정도만 생각한다고 하는 것이다.
뭔가 나나 서인하 선배 생각과는 달랐다.
방수정 PD가 와서 최소 국장 역할, 제너럴 프로듀서(General Producer)를 맡아 주면 회사가 더욱 탄탄해지리라고 여겼다.
그녀가 지휘하고 내가 아래에서 행동대장이 되는 라인을 생각했는데.
“그런 역할은 강대한, 네가 하면 되지.”
“예? 제가요?”
이제 겨우 PD 5년차인 내가? 15년이 넘는 방수정 PD를 제치고 GP를?
나는 고개를 사납게 젓고, 손사래를 필사적으로 치면서 맹렬히 거부했다.
“시, 싫습니다. 제가 어떻게 방 PD님을 두고……. 차라리 사장님한테 넘기면 안 될까요.”
“사장님은 대표로서 어차피 그렇게 하셔야 해. 그리고 나보다는 네가 훨씬 잘 어울려. 네가 NBS에서 대체 몇 개의 기획을 동시에 돌렸는지, 나도 다 들어서 알고 있거든?”
“아, 아뇨. 그건 기획회의에 참여해서 의견을 낸 거고…… 지원 수준이었던 거지…… 제가 메인으로 한 건 결국 하나뿐이었습니다.”
“보통은 너 정도 연차에 그것도 못 해. 그것들을 또 다 성공시켰으니, 넌 이미 충분히 준비가 된 거야.”
뭐라고 더 반항하기도 힘들게 방수정 PD는 딱 잘라 말했다.
그 뒤로 몇 번 더 물고 늘어졌지만 방수정 PD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안 돼, 못 들어줘, 돌아가.
결국 난 침몰하여 노트북을 닫았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래. 나처럼, 긍정적으로 잘 생각해 봐.”
빙긋 웃는 방수정 PD의 얼굴이 어쩐지 매우 생생했다.
프로그램 찍을 때의 그 생생함과는 또 다른, 어쩐지 매우 소녀 같은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보니 아무렴 될 대로 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합류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기쁜 날이다. 괜히 부정적인 미래를 그릴 필요가 없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방 PD님.”
내가 반사적으로 그렇게 인사를 하고,
“그래. 나도 잘 부탁해. 강대한 PD.”
방수정 PD도 웃어 주었다.
* * *
강대한과의 브런치는 생각보다 더 길어졌다.
그동안 찍은 프로그램 이야기, 현준영 사건의 뒷이야기, 모 영화 감독의 꼰대스러움 등등.
방수정의 유학 생활 이야기까지 곁들이다 보니,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한국에서 뵙겠습니다!”
강대한은 지나가는 택시를 겨우 잡아 타고 공항으로 달려갔다.
아슬아슬한 시간이긴 했지만, 뭐 알아서 하겠지 하고 방수정은 속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결정을 하고 나서야 깨달은 것이 있었다.
그동안 느낀 심심함, 무료함.
그것들이 결국, 방송을 만들지 않아서 생긴 것이라는 사실을.
강대한에게 이야기했던, GP 역할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은 진심이었다.
강대한이 <당잠사> 팀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그녀의 결정을 반하면서도 성과를 만들어냈을 때.
방수정은 자신을 새로이 돌아보게 되었다.
독선적이라는 평을 받는다는 것은 그녀 스스로도 모르진 않았다.
다만, 그래서 그것이 무엇이 잘못이냐는 생각이 들 만큼, 그동안 실패하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다.
자신의 판단이 틀렸고, 새파랗게 어린 후배의 선택이 옳았음을 알게 되었을 때, 방수정은 자신이 어쩌면 팀장이라는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퇴사를 하고 유학길에 올라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더 늘어나자, 그 사실이 명확하게 다가왔다.
그렇지만 동시에,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은 여전히 좋아함도 깨달았다.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지만, 그러려면 한국에 돌아가는 것이 좋고, 만약 한국에 돌아가면 팀장급의 인사는 분명히 이루어질 것이고, 또 그것은 싫다는 감정의 악순환.
그 루프를 결정적으로 깨닫게 해 준 것이 바로 어젯밤의 서인하의 메시지였다.
생전 처음 받아 보는 길이의 장문의 메시지에서는 진심이 듬뿍 느껴졌다.
예전처럼 같이 일하고 싶다는 선배의 마음, 방수정을 걱정하는 마음 등등이 절실히 적혀 있었다.
그중 방수정의 마음을 가장 뒤흔든 부분은 이것이었다.
[……내가 예전에 너를 많이 부담스럽게 했다는 거 알고 있다. 니 권한과는 상관없는 일도 시키고, 또 많이 물어도 보고. 그땐 내 나름대로 너를 챙겨주려는 거였는데, 네가 힘들어했다는 걸 미국으로 가고 나서야 수현이에게 들었어.
고생시키고 부담 주고 그래서 미안하다. 뒤늦지만 이 인사는 꼭 하고 싶었어…….]
어쩌면 도피성일지도 모를 유학을, 결국에는 가장 응원해 준 것은 서인하였다.
그의 밑에서 때론 싸우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반목하기도 했지만, 결국 배운 것도 많고 같이 일해서 즐거운 사이였음을 새삼 깨달았다.
그때 서인하가 주었던 부담, 지금도 그 부담이 싫긴 하지만, 이제는 그것 때문에 도망치지는 않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그렇기에 강대한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본인이 GP 같은 역할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강대한에게만 던져 놓고 손 놓을 생각 또한 없었다.
부담을 지워 준 것은 자신도 서인하처럼 똑같기에, 자신처럼 도망칠 마음이 들지 않도록 서포트는 확실히 할 생각이었다.
눈앞에서 당황해하던 강대한을 떠올리고서, 방수정은 피식 웃었다.
때마침 테라스석으로 나온 카페 점원이 좋은 일이 있냐고 물어왔다.
방수정은 커피잔을 들어 올리며 간단히 대답했다.
“I’m going back to Korea.”
* * *
“……정말 잘됐다. 잘됐어!”
공항에서 수속을 끝내고 나서야 겨우 통화할 시간이 났다.
탑승 대기 시간 동안 전화를 한 서인하 선배는 전파 너머에서도 기분이 느껴질 만큼 하이톤이었다.
한참을 소리 지르듯 좋아하는 그의 인사를 받고서 말했다.
“사실 제가 한 건 없는 것 같습니다. 선배님이 보내신 메시지가 결정적이었던 것 같아요.”
“내 메시지?”
“예. 내용은 못 들었지만, 아무튼 그 메시지를 받고서 마음을 굳혔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참…… 다행이네.”
나도 그런데 아마 서인하 선배 또한 감회가 새로울 것이다.
태평양으로도 막을 수 없는, 오래된 선후배 간의 끈 같은 것이 느껴졌다.
나도 저런 선후배가 생길까.
어쩌면 박주영 선배나, 혹은 우철민 PD나, 아니면 지금은 만나지 못한 사람과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
지금은 그저 둘의 관계가 부러울 뿐이었다.
“비행기 타려면 아직 시간 있으니, 타기 전까지 기획안 손봐서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래. 무리하지 말라고 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네. 네가 보내 주면 바로 가지고 갈게.”
“옙.”
전화를 끊고, 노트북을 꺼내 들고 <미션 트립> 기획안을 수정했다.
방수정 PD가 짚어 준 부분들을 수정하고, 거기다 좀 전 브런치에서 방수정 PD가 요구한 것까지 추가로 작성하는 작업을 하자 20분이 금방 지났다.
“……오케이. 전송.”
메일로 보내고 난 뒤에야 겨우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메시지들을 확인하고서 답장을 보내고, 업무 메일도 답변을 하고, 또 민희에게도 보고를 한 뒤 노트북을 닫으려 하다가, 잠깐 멈추고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56% 이후로, 확률을 확인하지 않았다.
방수정 PD도 합류하고, 기획안까지 수정했으니…….
[89%]
그래, 이래야지!
대번에 90% 근처까지 뛰어오른 확률은 나를 매우 미소 짓게 만들었다.
하룻밤 사이에 33%라니.
정말 새삼 세상일이라는 것이, 이 AGD 앱의 확률이라는 것의 신기함을 재확인하게 된 기분이었다.
내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그것만으로 전부 잘되는 것도 아니다.
나로선 그저 묵묵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정도면 통과 안 될 리는 없겠지.”
<미션 트립> 기획안이 성사될 확률, 89%.
이 정도라면 서인하 선배의 방송사 미팅에서도 결코 흐지부지될 일은 없으리라.
나는 아주 후련한 마음으로 노트북을 챙기고 일어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