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괜히 봤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반나절 같이 돌아다닌 것치고는 매우 담백한 말투였다.
틀린 건가.
설득하지 못한 건가.
한순간 머릿속이 그렇게 하얘졌다.
“하루 종일 같이 다니게 했는데…… 아직 결정을 못 내렸어.”
그렇지만, 이어진 방수정 PD의 말에 나는 겨우 안심할 수 있었다.
“놀랐습니다. 완전히 거절하시는 줄 알고.”
맥주가 앞에 있었다면 원샷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내 반응에 방수정 PD가 조용하게 웃더니 덧붙였다.
“결정하지 못했다뿐이지…… 또 어떻게 될지 몰라. 내일 간다고 했지?”
“예. 돌아가는 비행기 편은 예약해 뒀습니다.”
“그래……. 그전에는 답을 내릴게.”
방수정 PD의 말투에 힘이 실렸다. 정말이지 내일은…… 뭐든 결정이 날 것이라는 신호였다.
나는 테이블 위에 꺼내 둔 폰을 내려다보다가,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고서 그녀를 보았다.
“기다리겠습니다. 긍정적인 답을 주시기를요.”
“장담은 못 하겠는걸.”
“그래도 기다리겠습니다.”
방수정 PD의 입장도 이해는 해야 한다. 미국에서 한가로이 휴가를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난 후배가 그 여유를 해치고 있는 것이다.
한국으로 들어오지 않고 미국에 머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다만.
“오히려 저는 지금 승산이 있는 것 같거든요.”
“승산?”
“단칼에 거절당할 것도 염두에 뒀는데, 내일까지 생각해 보신다는 거잖습니까.”
방수정 PD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린다는 듯.
나는 일부러 대담한 척 싱긋 웃어 보였다.
“이미 한 발 다가오신 거니까, 내일은 또 한 발 더 오실 수도 있지 않을까요?”
“…….”
한 소리 들을 것도 각오한 도발이었는데, 때마침 우리가 시킨 요리와 맥주가 날라져 왔다.
점원이 테이블에 내려놓느라 우리의 시선이 잠시 떨어지고, 덕분에 나는 한 소리 듣지 않을 수 있었다.
잠깐의 평화가 지나간 뒤,
“야, 강범람.”
“……그 별명은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어디서 들었겠니. 네 주제가 넘쳐흐른다는 이야기는 이미 여기 미국에까지 파다해.”
내가 그렇게 유명인이 되었나? 할리우드 진출이라도 해 볼까?
“오해십니다. 저는 그냥 할 일 열심히 했을 뿐인데…….”
“촉새라고도 하더라?”
“…….”
무슨 말을 못 하겠네. 이게 다 박주영 선배 때문이다.
나는 태평양 너머로 이를 갈아 주었다.
“네 촉이…… 내일의 내가 좋은 결정을 내릴 거라고 이야기해?”
“아뇨……. 희망사항입니다.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나는 한 발 뺐다. 더 들이댄다고 해서 통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아니까.
서인하 선배도 인정하는, 고집이 센 PD다. 너무 고집이 세서 독선적로도 보이고, 윗선과도 자주 부딪힌 인물.
그런 사람에게 이 정도 들이댔으면 충분하다.
“예쁘게 봐 주세요.”
“흥. 그건 내일 되어 봐야 알지.”
방수정 PD는 딴 사람 이야기하듯 코웃음을 치고는, 맥주를 들었다.
“일단 마시자. 미국에 오느라 수고했는데.”
“옙.”
그 언젠가의 강남에서처럼, 나와 방수정 PD가 잔을 부딪쳤다.
“그럼 내일 대답 들려주시는 걸로 알고…… 오늘은 오늘의 부탁을 좀 드려도 될까요.”
“무슨 부탁?”
“여행 프로 기획안, 한번 점검해 주실 수 없을까요?”
“……이 뻔뻔한 녀석이.”
방수정 PD가 헛웃음을 흘렸다.
* * *
맥주를 많이 마신 것은 아니다.
두 잔 정도 마셨을 뿐인데, 피로가 겹쳐서인지 뒤통수가 살짝 뻐근한 느낌이 들었다.
방수정 PD가 그것을 곧장 알아채고 나를 호텔로 보냈다.
멀지 않은 호텔까지 지도 어플을 따라 걸어와서, 체크인을 하고 방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다.
생각해 보니 비행기에서부터 지금까지, 두 발 뻗고 누워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맥주 기운까지 있어서 단숨에 온몸이 노곤해졌다.
“……으아! 안 되지!”
깜빡 눈이 감길 뻔한 위기를 물리치고 벌떡 일어났다.
잠이 들면 안 된다. 내게는 오늘의 일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재빨리 샤워를 하고 나서, 노트북을 열었다.
『VIP 촬영 상세 스케줄표 컨펌』
『참조: [채널T] 드라마국 촬영 협조 요청』
『블루액터스입니다: 패널 출연 제안』
.
.
.
당장 급한 출연 계약 같은 건 서인하 선배에게 부탁하고 왔다지만, 모든 일을 그렇게 처리할 순 없었다.
인터넷이 있다면 호텔방에 앉아서도 얼마든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현대인의 슬픈 초상 아니겠는가.
“에휴.”
메일함에 도착한 그 수많은 메일에 일일이 답변을 쓰고, 필요한 것은 회사에 공유하고, 다시 허소윤 CP에게 공유하고.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무시하고서 다 정리하고 나자 거의 1시간이 지나 있었다.
“아, 술 땡기네…….”
LA까지 와서 방수정 PD를 설득하고, 호텔에 들어와서는 일이나 하고 있고.
내 처지가 왜 이러냐 싶은 한탄스런 심정을 느끼면서 메신저 창을 열었더니,
[민희: 살아서 도착은 하셨어?]
[민희: ^-^]
아.
등골이 오싹했다.
공항 내리자마자 곧장 택시 탄다고 연락하는 걸 깜빡했네…….
시간을 보니 한국은 분명 모두가 잠들어 있을 시간이었다.
나는 경건함과 송구스러움을 담아서, 한 자 한 자 사과의 메시지를 보내 놨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어떤 배상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하며.
그러고 났더니 메신저에도 꽤 많은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우철민 PD의 업무 연락, 박주영 선배의 한탄, 그리고 서인하 선배의 걱정까지.
[내일 돌아가기 전까지 답변 주신다고 합니다. 꼭 좋은 답변 가지고 가겠습니다]
[(파이팅)]
그렇게 메시지를 보내고,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렇게 되어야 하는데.”
불안한 마음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다.
가실 리가 없는 것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일이니까.
내일 방수정 PD는 내 제안을 받아들여 줄까.
한국으로 돌아와, 아이윌에 들어와 줄까.
같이 방송을 만들어 줄까.
일할 때는 까먹고 있던 불안한 마음이 야금야금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안 되겠다.”
본인이 앞에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나는 침대 옆에 아무렇게나 던져 둔 가방에서, 방수정 PD에게 보여주었던 <미션 트립> 기획안을 꺼냈다.
저녁을 먹으면서 방수정 PD가 여기저기 수정 가필을 해 둔 부분들이 생생히 남아 있었다.
담당 PD란에는 여전히 방수정 PD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 기획안이…… 그대로 성사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침대에 누운 채 기획안을 노려보자,
[56%]
눈을 흐리게 떴다.
하루 종일 같이 돌아다니면서 좀 나아졌을까 했는데.
지금이 56%면 내 도발이 역으로 작용했다는 건가? 아니면 통했는데도 이것밖에 안 된다는 건가?
괜히 봤다.
“젠장.”
난 기획안을 집어 던져 버렸다.
* * *
그 시각.
한국의 가산디지털단지.
[내일 돌아가기 전까지 답변 주신다고 합니다. 꼭 좋은 답변 가지고 가겠습니다]
[(파이팅)]
서인하는 스탠드 하나만 켜 놓은 사무실 본인 자리에서, 그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지금 막 도착한 메시지였다.
한번 전화를 해 볼까 하는 충동이 잠시 들었지만, 아마 이제야 호텔에서 쉬고 있을 거라 여겨 보내진 않았다.
애초에 자고 있어야 할 본인이 답변을 보내면 강대한의 성격상 바로 전화가 오거나 할 것이다.
“쉴 땐 쉬어야지.”
못 쉬게 한 장본인이라, 서인하는 더더욱 미안했다.
폰에서 눈을 떼고 잠깐 미간을 주물렀다.
집에는 오늘 철야를 한다고 이야기했는데, 사실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부하 혼자 미국으로 보내 놓고 쉽게 잠을 잘 수 없을 같아서였다.
피곤함이 없기야 하겠냐마는, 차라리 이러는 게 속은 편했다.
“역시 내가 갔어야 하나.”
죄책감의 이유는 여러 가지이겠으나,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방수정과 더 오래 지낸 것은 강대한이 아니라 자신이다.
직속 선배로서, 방수정에게 PD로서의 일을 가르친 것도 자신이다.
설득한다면 오히려 자신이 갔어야 하지만…….
미국에 가서 설득하고 오겠다는 강대한의 태도에 어느새 감화되어 있었다.
“신기한 녀석이야.”
그래서 회사를 같이 꾸리겠다고 마음먹은 것이고, 금완승 감독도, 왕이범 이사도 모두 찬성했던 것이다.
본인이 움직임으로써 주변 사람들 모두를 움직인다.
강대한에게는 그런 힘이 있었다.
탕비실에서 몇 잔째인지 모를 커피를 타 와서 도로 자리에 앉은 서인하는, 한쪽에 둔 스마트폰을 한 번 더 내려다보았다.
“……그래, 조금이라도 도와야지.”
현재 시간을 보고, 미국 LA 시간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메신저를 열어, 한 자 한 자 써 내려갔다.
* * *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해가 떠 있어서,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서둘러 시간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겨우 안심할 수 있었다.
“체크아웃 아직 한참 남았네…….”
다행히도 9시가 겨우 지난 시간이었다.
아직 2시간은 더 있을 수 있으니 잘까 했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
“이럴 때가 아니지.”
폰을 확인해서 또 밤새 날아온 메일과 메시지를 처리하고, 민희에게 한 번 더 사과와 함께 인사를 하고.
그러고 나서 서인하 선배와의 대화방을 확인했는데, 답변이 돌아온 것은 없었다.
“확인하셨는데. 이상하네.”
바쁘신가.
내 일을 맡기고 왔으니 바쁠 만은 하다. 본래 일도 있는데.
[일어났습니다. 공항 가기 전에 방PD님 뵙고 나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렇게 간단히 보고를 보낸 다음, 씻고서 호텔을 나섰다.
방수정 PD와는 이미 약속을 정해 둔 상태였다.
비행기 시간이 오후 4시라서 1시까지는 공항으로 가야 하고, 그래서 점심에 만나 밥이라도 먹자는 약속이었다.
호텔을 나서기 전에 한 번 더 확률을 봐 볼까 하는 유혹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이겨내고 그냥 나왔다.
아니지, 이겨낸 것과는 거리가 멀다.
“불안하네.”
어제의 확률이 잊히지 않아서 불안했을 뿐이다.
하룻밤 사이에 뭐가 바뀌었을까.
아예 바닥으로 떨어졌을까.
아니면 다시 올라갔을까.
AGD 앱을 열어서 로그를 볼까, 쌓여 있는 포인트를 다 털어서라도 아이템을 사용해 볼까.
그런 꾸준한 유혹을 머릿속으로 곱씹으면서, 어제 방수정 PD를 만났던 카페로 왔다.
이곳은 런치 메뉴도 괜찮다고 했던 방수정 PD가 오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
“……어?”
라고 생각했던 것은 나의 착오였다.
나도 11시가 되기 전에 호텔을 나섰던 것 같은데, 택시를 타고 도착한 카페에는 이미 방수정 PD가 앉아 있었다.
차에서 내리는 나를 보고, 방수정 PD가 먼저 손을 흔들었다.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늦었긴. 내가 일찍 나온 건데. 잠 좀 잤어?”
“그…… 예.”
한숨도 못 잤다고 할까 잠깐 고민했지만, 그러기엔 내 몰골이 참으로 멀쩡했다.
그에 반해, 방수정 PD는 오히려 어제보다 초췌해 보였다.
마치 밤새 한숨도 못 잔 사람처럼.
맞은편에 앉으면서도 차마 얼굴이 왜 그러시냐고도 묻지 못하는 사이에, 방수정 PD가 런치 메뉴를 알아서 주문했다.
커피와 곁들여서 먹는 브런치 스타일의 메뉴들은, 확실히 본토라서 그런지 맛이 있었다.
다만, 그걸 씹어 삼키는 내가 제대로 그 맛을 음미하지 못할 뿐.
“…….”
“…….”
접시를 거의 비울 때까지 둘 사이에 대화는 없었다.
누구 하나가 물꼬를 터 주길 바라는 것처럼.
방수정 PD도 어제와는 사뭇 다른 표정과 태도였기에, 나는 그녀가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역시나. AGD 앱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하룻밤 새 ‘56%’가 극적으로 변할 리는 없지.
방수정 PD의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결정하셨습니까.”
나는 심호흡을 하고서, 그렇게 물었다.
포크를 내려놓고 방수정 PD를 본다.
방수정 PD 또한 나를 힐끔 보는 듯하더니, 천천히 포크를 자리에 내려놓았다.
“어느 쪽이든, 결정하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래? ……거절하더라도?”
“예.”
“그렇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목을 자르려면 빨리 잘라 주십쇼.
내 대답을 곱씹는 듯 방수정 PD가 어두운 얼굴로 입을 뗐다.
“수락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