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할리우드대로
“제가 만나러 가 보겠습니다.”
서인하 선배에게 그렇게 선언을 하자, 그가 문자 그대로 당혹해했다.
“어딜? 미국을?”
“예. 직접 얼굴 보고, 설득하고 오겠습니다.”
“어, 아니, 야, 잠깐만…….”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사실 즐겁긴 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기에 일단 서인하 선배부터 설득했다.
전화로 하는 건 한계가 있을 거다, 우리 회사에 중요한 사람이 되지 않겠냐, 그렇다면 직접 보고 이야기하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렇게 열심히 이야기를 하자, 서인하 선배도 점점 수긍한 듯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럼 다녀오도록 해.”
“예. 저 없는 사이에 일은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메인으로 진행하고 있는 <V.I.P>도 있고 하니, 관련 인계만 하고 공항으로 출발했다.
다행히 비행기 표가 있어서 가장 가까운 시간을 잡아타고, 머릿속으로 어떻게 설득할지만 궁리했다.
그래서, 사실 그다지 긴장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점점 미국 땅에 가까워질수록 새삼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나 하는 실감이 들었다.
미국에 가는 것도 처음이다. 여행은커녕 촬영으로도 안 와 봤다.
그런 곳을, 무작정 방수정 PD 만나겠다고 날아가고 있다니.
이미 뒤늦은 비행기 안에서 후회를 살짝 했다.
그렇게 LA 공항에 도착하자, 서인하 선배에게서 방수정 PD가 있을 만한 곳의 주소가 도착해 있었다.
서인하 선배도 유수현 작가에게서 얻어낸 정보였다.
그 주소를 가지고 택시에 올라타, 근처 길가에 내렸다.
미드나 영화에서 본, 조금 낡은 건물들이 2차선 도로를 둘러싸고 있는 거리였다.
방수정 PD의 아파트와 아카데미 등의 주소를 손에 쥐고, 전화를 하려고 했다.
그때, 길 반대편 카페에 앉아 있는 방수정 PD를 발견했다.
전화를 받지 않으면 찾아갈 각오를 하고 있던 나는 기뻐서 손을 흔들었는데, 그녀는 나를 확인한 뒤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나는 그녀가 떠날세라 서둘러 길을 건너가 앞에 섰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방 PD님.”
“……강대한?”
“예, 접니다. 휴우, 좀 덥네요. 저도 커피 한 잔 가지고 오겠습니다.”
방수정 PD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 커피를 주문했다.
날씨가 싸늘하지만, 급하게 온 탓에 목이 말라서 아이스로 시켜서 가지고 나왔다.
“앉아도 될까요?”
“그, 그래.”
방수정 PD는 여전히 당황해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 차라리 이런 반응이 낫다. 내가 설득을 하려면.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서 짐도 바닥에 놓고 나자, 겨우 그녀가 정신을 차렸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언제 왔어?”
“방금요. 공항에 내려서, 택시 타고 바로 왔습니다.”
방수정 PD의 얼굴에 뜬 당혹스러움이 더욱 진해졌다.
“왜?”
“왜냐니……. 아시지 않습니까.”
나는 커피로 목을 축인 뒤 말했다.
“저희 회사, 아이윌로 와 주십시오.”
“…….”
“이 여행 예능을 PD님께서 만들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방수정 PD 앞에, 한국에서부터 챙겨온 기획안을 내려놓았다.
『여행 예능 ‘미션 트립’(가제) 기획안』
내가 작성한 여행 아이템 기획안이었다.
기존 방수정 PD가 만들었던 여행 예능과 틀이 비슷하면서도, 이번에는 서로 다른 조합으로 각자의 여행 코스를 경합하는 스타일을 덧입혔다.
그 점이 방송사에 어필되어 진행이 가능하게 되었는데, 이 기획안을 방수정 PD는 아직 보지도 못했다.
내가 내미는 기획안을 내려다보고서야 방수정 PD의 눈빛이 침착해졌다.
그녀가 잔을 잡은 채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생각 좀 해 보고 연락한다고 했는데, 그새 못 참고 너를 보낸 거구나. 서인하 선배가.”
“아뇨. 미국에 가겠다고 한 건 접니다.”
뭔가를 오해하는 것 같아 즉각 부정했다. 방수정 PD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네가? 미국에 오겠다고 했다고?”
“예. 선…… 사장님은 말리셨지만, 제가 직접 뵙고 오겠다고 설득했습니다.”
“왜?”
“그럴 만한 분이시니까요.”
방수정 PD가 무슨 소리냐는 듯 궁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한 번 더 커피를 마셨다. 쉴 새 없이 택시를 타고 여기에 도착해서, 내 스스로도 아직 머릿속에 피가 올라 있었다.
그 기분이 이제 좀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
“방 PD님은 모르시겠지만…… 전 사실 방 PD님을 원망하던 시절이 있습니다.”
“나를?”
“예. <당잠사> 팀에서…… 제가 아직 한 사람 몫도 제대로 못 할 때, 효명이를 캐스팅하게 되었을 때, PD님이 저를 싫어한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과거 일을 꺼내자 방수정 PD의 얼굴도 다소 어두워졌다.
“그때…… 그래, 그랬었지.”
“정말 싫어하셨던 건가요?”
“싫어한 건 아니고. 뭐랄까…… 1년도 안 된 새파란 게 감히? 라는 감정에 가까웠어. 그땐 내 실수도 있고 해서, 스스로 어떻게든 만회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심했던 때거든.”
방수정 PD의 입에서 그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결국 내가 틀리고, 강대한 네가 맞았다는 게 증명되었고. 나 스스로도 뭔가 새로운 것을 깨닫게 된 경험이었으니까, 지금은 너한테 고마워하고 있어.”
그 말이 진심인 것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
<당잠사> 팀을 떠나 휴가를 냈다가, 결국 퇴사를 하고 NBS를 떠날 때 방수정 PD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당잠사> 시즌3 때 일, 수현이에게 들었어. 넌 앞으로도 잘할 거야, 강대한.”
그때 느껴진 진심이, 지금도 느껴지고 있다.
하늘 같은 선배 PD에게 그런 진심 어린 말을 듣는다는 건 흔히 없는 경험이다.
처음으로 나를 인정해 준 사람이기도 했고.
자신의 실수를 깔끔하게 인정하고 고쳐 나가는 사람을, 사회에 나와서는 잘 보지 못하기도 했고.
그래서 방수정 PD는 내 인생에서 참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저도 그렇습니다. 방 PD님에게…… 참으로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너 구박만 했는데, 뭘.”
“아뇨……. 방 PD님은 저한테…… 스승 같은 분이십니다.”
내 말이 뜻밖이었는지 방수정 PD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았다.
나는 낯뜨거운 기분을 느끼면서도, 한번 꺼낸 말을 막을 수 없었다.
“저번에 한국 잠깐 들어오셨을 때, 회식 때 저한테 말씀하셨죠.”
“아무튼, 강대한. 너는 내 예상보다 훨씬 잘 컸어. 앞으로도 더 잘 클 거야. 그러니까…… 더러운 것 보더라도, 지금처럼만 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흔들리지 말고 해. 그럼 더 잘될 거야.”
“그 말씀을…… 지금도 저는 꼭 지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더 라이벌> 만들면서 외주사들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도 알게 되었고, 언론사들이 어떻게 나쁘게 움직이는지도 봤습니다. 그렇지만…… 그때마다 방 PD님이 말씀해 주신 것처럼, 흔들리지 않고 제가 믿는 일을 하려고 했습니다.”
말을 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도 격해지는 것을 느꼈다.
같이 일하는 서인하 선배, 나를 챙겨 주었던 정민우 팀장, 예능 이외의 재능도 알아주었던 금완승 감독 등등.
그 모든 선배, 윗사람들을 통틀어서도 방수정 PD는 나에게 특별한 존재다.
그것을…… 그래, 나는 그것을 전하고 싶어서 굳이 이 먼 길을 온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 방 PD님과 다시 일하고 싶습니다.”
“……나랑?”
“예. ……예전처럼 또 속 썩일 수도 있고 말도 안 들을 수도 있지만…… 방 PD님과 또 이전처럼 같은 회사에서 일하면서, 배우고 싶습니다.”
아주 솔직한 내 마음이었다.
솔직히,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AGD 앱을 활용하기도 했다.
기획안을 내밀고 어떤 식으로 설득을 해야 먹힐지 확률도 보았다.
그렇지만 정작 이렇게 눈앞에 방수정 PD를 두자……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결코 그녀의 머리 위를 보지 않고, 나는 그녀의 눈빛만을 보았다.
“그동안 가끔 연락드리면서도, 사실 몇 번이나 언제 돌아오실지 여쭙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저희 회사에서 같이 일할 환경이 되어 있고, 사장님도 저도, 같이 일해 주신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습니다.”
방수정 PD는 커피잔만 매만졌다.
아까부터 전혀 마시지 않아서 반쯤 차 있는 커피는 그대로 그냥 식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것을 마실 생각도 하지 않고, 그녀는 낮게 깔린 시선을 올리지 않았다.
나는 나머지 커피를 꿀꺽 마신 다음에, 다시 커피를 시켜 오겠다고 일어섰다.
이번에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켜서 가지고 오자, 그걸 보고 방수정 PD가 풋 하고 웃었다.
“추웠어? 아이스 마실 때부터 그럴 줄 알았어.”
“하하하…… 앉아 있으니 쌀쌀하네요, 좀.”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시기.
그렇지만 그 날씨보다, 사실 쉴 새 없이 말을 뱉어낸 열기가 빠져나가서이리라.
나는 따뜻한 커피로 속을 달랜 다음 다시 조용히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차피 속에 있는 이야기는 다 했다.
남은 건 방수정 PD의 대답뿐.
“…….”
“…….”
그렇게 입을 다물고 나니, 뭐라고 다시 말을 꺼내기 애매한 정적이 지나갔다.
도로에서 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간간이 들리고, 행인들의 말소리가 흘러가고.
“잠은? 좀 잤어?”
그러다가 방수정 PD가 문득 물었다.
“어…… 비행기에서 좀 잤습니다.”
“그래? 지금 당장 피곤한 건 아니지?”
“예. 괜찮습니다.”
“그럼 나랑 어디 좀 가자.”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방수정 PD가 먼저 일어났다. 나도 재빨리 커피를 비우고 뒤를 따랐다.
* * *
카페 앞에서 택시를 잡아탄 방수정 PD가 이끄는 대로 도착한 곳은, ‘명예의 거리’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관광명소로만 주로 아는 곳이라, 나는 설마 관광이라도 시켜 주려나 하고 생각했다.
“이쪽이야.”
하지만 유명한 할리우드대로를 지나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간 방수정 PD가 멈춰 선 곳은, 지은 지 꽤 되어 보이는 5층짜리 건물 앞이었다.
미드에서 자주 보던 건물 양식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벽면에 붙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A-Class Academy』
“여긴…….”
“내가 배운 곳. 할리우드나 미국 방송 시스템을 배울 수 있는 곳이야. 여기 1년을 다녔어.”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여기구나. 방수정 PD가 공부한 곳이.
“여기 말고 뉴욕, 마이애미 등에도 지부가 있어서, 거기를 다 돌아다녔지.”
“그러셨군요……. 미국 방송 시스템은 많이 다릅니까?”
“많이 달라. 한국보다 훨씬 체계화되어 있고, 분업화되어 있어. 방송 노조 규율도 더 빡빡하고.”
“들었습니다. 저희한테는 아직 먼 미래겠지만, 여기는 노동시간 준수가 철칙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 그럼에도 상업 시장으로서 성립되는 곳이 여기, 미국이지.”
거기를 시작으로, 방수정 PD는 본인이 공부하며 다닌 곳들을 소개해 주었다.
할리우드대로를 중심으로 많은 아카데미가 곳곳에 모여 있었다.
예능 쪽부터 매니지먼트, 그리고 OTT 사업을 주축으로 하는 사무소들까지.
할리우드에는 정말 많은 방송 업체가 있었고, 상암을 몇 배로 부풀린 듯한 스케일들이었다.
“여기서 1년 넘게 지내면서 정말 많은 걸 배웠어. 대한이 너도 나중에 기회 있으면 여기 와서 배워 봐. 분명 좋은 경험이 될 거야.”
“그러려면 회사를 때려치워야 할 텐데…… 사장님께서 허락해 주실까요.”
“때려치울 필요 있나? 서 선배 졸라서, 유학 지원해 달라고 해. 회사의 대들보 같은 PD인데 설마 그 정도도 못 해 주겠어.”
NBS는 그걸 안 해 줘서 그만둔 거였을까? 그런 의문이 잠깐 들었지만, 머릿속으로만 떠올리고 지웠다.
한참 그렇게 관광하듯 돌아다니자 어느새 해가 져 왔다.
체력은 어느 정도 자신 있지만, 그럼에도 역시 발이 아프고 등이 굽어 왔다.
“힘들지? LA가 좀 넓어. 우리 같은 사람한테는 볼 것도 많고.”
“그렇네요. 그냥 여유롭게 관광을 왔으면 더 좋았을 뻔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며 노천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았다.
밤인데도 그다지 춥지 않아서, 그냥 저녁 겸 반주를 하기로 했다.
미국식 스테이크를 시키고, 여기서만 판다는 수제 맥주도 시키고 나자, 방수정 PD의 표정이 다시금 가라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요리가 나오기 전에, 나는 다시 물어야 했다.
“생각은 정리되셨습니까.”
“티 났어?”
“조금요.”
갑자기 이곳저곳을 끌고 다닌 게, 멀리 온 후배를 관광시켜 주겠다는 생각에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동안 익숙한 곳을 돌아다니면서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려는 생각임을 나는 모르지 않았고, 그래서 얌전히 따라다녔다.
하지만 이제 저녁이 되어가고, 대답을 듣고 싶었다.
“결정…… 하셨습니까.”
방수정 PD가 다리를 꼬고 앉은 채 다시금 거리 저편을 봤다가, 조용한 눈길로 나를 보았다.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