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LA의 커피
“회사 좋네.”
준혁이 형님이 회의실에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그 옆에는 박지운.
윤대명 매니저를 대동하고, 두 사람이 우리 회사를 찾아와 주었다.
“제가 가도 되는데요.”
“요새 우리가 같이 회사에 있는 경우가 잘 없어. 그러니까 그냥 오늘 같은 날이 딱이야.”
<V.I.P>의 주요 출연자인 두 사람은 스튜디오 패널로도 계약을 진행했다.
윤대명 매니저가 회사 대표로서 계약서를 검토하고 두 배우에게 내밀었다.
상세한 계약 조항에 관해서 이미 충분히 대화를 나누었기에, 계약은 그렇게 어렵지 않게 진행되었다.
“촬영은 다음 주부터 진행될 거고요, 스케줄표는 바로 공유 드리겠습니다.”
“전에 보여 준 거랑 달라진 건 없지?”
“디테일하게 시간이 좀 바뀌긴 했는데, 다른 건 괜찮아요.”
나는 노트북을 열어서 미리 준비해 둔 스케줄표를 윤대명 매니저에게 보냈다.
계약서와 함께 그것을 확인한 윤대명 매니저가 회사에 전화를 하러 간 사이.
슬쩍 준혁이 형님의 눈치를 살폈다.
“금 감독님이 벼르고 계시던데요.”
“후우…… 그 양반이 얼마나 부려먹을지 벌써부터 걱정이야.”
준혁이 형님은 현재 우이독경에서 제작 중인 영화 스태프를 체험하기로 되어 있다.
연출팀인데, 금완승 감독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이외에도 시킬 만한 건 다 시킬 모양이었다.
“깐깐한 분이시라도…… 일하는 건 안 힘든 분 아니신가요?”
우리 이야기를 듣던 박지운이 끼어들어서, 나와 준혁이 형님은 힘없이 웃어 주었다.
“일이 힘든 거와는 다른 문제지. 없는 일도 만들어 올 거라서 그게 문제지…….”
준혁이 형님의 자조적인 중얼거림에 박지운도 하하하, 하는 건조한 웃음만 지었다.
“지운아, 너도 안심할 건 없어. 네가 가는 그 드라마 감독, 스태프 험하게 굴리기로 유명한 사람이야.”
“방송인데…… 그렇게 험하게 구를까요?”
“편집은 알아서 할 테니 원래 하던 대로 해 달라는 게 우리 요구거든.”
내 말에 박지운이 그 잘생긴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침울해졌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내가 씨익 웃는 사이 윤대명 매니저가 돌아왔다.
플래티넘 측에서도 콜 사인이 와서, 우린 무난하게 계약을 마무리 지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두 사람에게 새삼 손을 내밀었다.
“뭐야, 악수?”
“네. 잘 부탁드린다고요.”
“새삼스레 왜 이래.”
“저희 아이윌에 있어서 중요한 시작이니까요. 아무쪼록 두 분을 믿습니다.”
준혁이 형님이 피식 웃더니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이어서 박지운과도 악수를 하고, 두 사람을 로비까지 마중했다.
사무실로 돌아오자 아직 치우지 않은 회의실에 여직원들이 몇 명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이게…… 지운이가 먹은 컵…….”
“류준혁 님이 쓰신 펜이 이건가……?”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열린 문으로 들려서,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참으며 노크를 했다.
“사인회라도 하고 가 달라고 할걸 그랬나요?”
“꺅!”
“죄, 죄송합니다!”
여직원들이 서둘러 컵을 들고 회의실을 빠져나가는 모습에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노트북과 계약서를 챙겨서 내 자리로 돌아오자, 건너편에 앉아 있는 여자 PD가 말했다.
“오늘 두 분이 온다고, 다들 엄청 기대했거든요. 귀엽게 봐 주세요.”
“두 사람 온 김에 정말 사인이라도 해 주고 가라고 할걸 그랬네요.”
“많이 친하세요?”
<더 라이벌>이나 그전 방송들로 내가 두 사람과 어떤 관계를 이루었는지, 우리 회사에 아직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렇다고 내가 스스로 그런 이야기를 할 정도로 뻔뻔하지는 못해서 그냥 웃어넘기려는데,
“류 배우하고는 형 동생 사이지. 박지운한테는 은인에 가까운 존재고. 그렇지?”
훅 치고 들어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미팅을 다녀온 서인하 선배였다.
투자자 만나러 간다고 나갔는데, 마침 돌아올 시간이긴 했다.
“헐. 형 동생은 그렇다 치더라도, 은인이요?”
“<더 라이벌>로 박지운의 인기를 만들어 준 장본인이잖아. 우 PD가 있었다면 증언해 줬을 텐데, 아깝지?”
웹드라마 관련으로 외주사와 미팅하러 자리를 비운 우철민 PD의 자리를 보는 서인하 선배에게 나는 짐짓 인상을 써 주었다.
“민망하게 왜 이러십니까. 그냥, 방송이 잘돼서 다들 좋은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 정도예요.”
“그것만으로, 사인 좀 하고 가라고 할 수 있는 PD가 얼마나 될까요……. 약속하신 거예요, 다음에 꼭 사인 받아 주시는 걸로. 소문낼 거예요.”
“그러세요.”
나는 부드럽게 이야기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손짓을 하자 서인하 선배가 대번에 알아듣고 회의실로 같이 이동했다.
“계약은 잘했어?”
“두 사람은 무리 없이 했는데, 몇 명이 아직 답변이 없습니다.”
“오늘까지 기다려 보고, 안 오면 그냥 2차로 가자.”
“알겠습니다.”
AGD 앱이 알려준 최상의 패널 구성은 힘들지 몰라도, 꼭 욕심을 부릴 출연진은 아니었다.
2차 라인업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면서, 회의실에 앉자마자 물었다.
“통화해 보셨습니까?”
서인하 선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통화 상대는 다름 아닌 방수정 PD.
우리가 알고 있는, 제일가는 여행 예능의 대가이자, 현재 미국에서 방송 공부를 목적으로 체류 중인 PD였다.
여행 예능이라면 그 누구보다 잘 어울릴 사람이고, AGD 앱은 기획안에 가장 잘 맞는 PD 선정이라고 장담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선택은 방수정 PD의 몫이고, 그 컨택은 서인하 선배가 하기로 했다.
“며칠 전혀 연락이 안 됐잖아. 무슨 산맥으로 놀러 갔었대. 거긴 전파가 전혀 안 터져서 오늘 새벽에야 통화를 했어.”
“공부하러 가신 거 아니었습니까?”
“핑계지. 공부는 이미 작년에 끝났고. 지금은 그냥 휴가 중이야.”
부럽다……. 누군 회사에 틀어박혀 지내고 있는데.
고개를 저어서 잡념을 털어내는 사이, 서인하 선배의 어조가 다소 무거워졌다.
“일단 얘기는 했는데, 본인의 반응은 좀 미적지근했어. 국내에 아직 들어오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야.”
“방송계가 질렸다거나 그런 걸까요?”
“그만뒀을 때 이사진의 파워게임이 있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그래도 지금쯤이면 털어냈을 거라고 여겼는데, 아니었나 보다.”
방송계에서 누구보다 친할 서인하 선배가 이렇게 부정적인 것을 보니, 확실히 어렵긴 어려운 모양이다.
나는 노트북에 여행 예능 기획안을 띄워 놓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선배님. 이 기획에 어울릴 다른 PD가 혹시 떠오르십니까?”
“글쎄…… 수정이가 있다 보니 딱 누구든 떠오르진 않네. 민헌이도 잘하겠지만, 그 녀석도 회사 옮길 생각은 없어 보이니까.”
“그렇다면…….”
나는 일대 결심을 하고, 말했다.
* * *
“Hello.”
단골 카페의 점원이 방수정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방수정도 미소를 지어 주고, 언제나처럼 커피를 주문했다.
“Outside?”
머신에서 커피를 내리면서 점원이 눈짓했다. 덩달아 고개를 돌리자, 바깥 테라스석 자리가 비어 있었다.
방수정이 항상 자리하는 곳이었기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곳에 앉았다.
잠시 후, 깨끗하게 내린 커피가 옮겨져 왔다.
아주 잠깐 잡담이 오간 뒤 점원은 다른 손님의 방문으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아주 잠깐 눈으로 좇다가, 방수정도 고개를 돌리고 잔을 잡았다.
“……후우. 맛있네.”
LA에 자리를 잡은 것도 어느새 1년여. 미국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지내다가, 이곳 LA가 역시 맘에 들어서 정착하다시피 했다.
그녀의 아파트에서도 가까운 이 카페는 이제 LA 생활의 한 축이 되어 있었다.
아침마다 이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하루가 시작되지 않을 만큼.
후릅.
다시 한 번 커피를 입에 머금는 방수정에게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옷은 적당히 입고 있어서 그리 춥지는 않았다.
불어오는 바람이 그저 시원하게 느껴질 만큼.
그 바람 속에서 한껏 여유를 느끼면서, 방수정은 아주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심심하네.”
그러다 결국,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LA 생활에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영어 공부도 하고, 방송 공부도 하고. 그러기에 LA는 딱 적절한 환경이었다.
할리우드도 멀지 않고, 여차하면 코리아타운으로 가서 한인들도 만날 수 있다.
친해진 한인도 여럿 있고, 그들과 여러 커리큘럼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런 생활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니지만…….
“심심하단 말이지…….”
엄밀히 말해, 원래 계획했던 공부는 이미 끝났다.
공부에 끝이 어딨겠냐마는, 스스로 판단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습득했다.
미국의 방송 시스템은 한국과도 달라서, 관련 아카데미와 커리큘럼 등을 이수하면서 참으로 많이 배울 수 있었다.
할리우드다 보니 관련 환경이 매우 잘 조성되어 있어서, 처음에는 매일같이 새로운 배움에 흥분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그것을 받아들인 다음에는…… 역시나 무료함이 찾아왔다.
그럼에도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는 것은, 여전한 부족함을 가슴 한쪽에서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만히 거리를 바라보다가, 방수정이 주머니에서 폰을 꺼냈다.
[유수현: (사진)]
[유수현: 이번 팀 단체사진ㅇㅇ]
[유수현: 미국엔 이런 거 읎제?]
“언제 적 개그를…….”
피식, 하고 방수정은 실소를 흘렸다.
유수현은 회사에서 만나 친구가 되어, 지금은 그 누구보다 친해진 존재다.
처음 NBS를 그만둔다고 할 때도,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고 할 때도 가장 말린 사람이기도 하다.
대판 싸우기도 했는데, 그 과정이 지난 다음인 지금도 여전히 그녀를 가장 응원해 주고 있었다.
[다들 표정이 안 좋은걸. 너무 갈군 거 아냐?]
[유수현: 얘는 또 누가 갈궜다고 그래]
[유수현: 나 아니고 전략실이거든(눈찌릿)]
NBS에 새로 온 본부장이 만들었다는 전략기획실.
현재 거기서 내려오는 온갖 기획들이 진행되고 있는데, 덕분에 많은 PD가 고단한 일정에 몸살을 앓고 있다고 한다.
유수현은 작가실의 최고참 중 하나다 보니 그 여파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며칠 전에도 야밤에 전화가 와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것을 받아 줬었다.
[힘내]
[유수현: 이년 건조한 것 봐 이제 니 일 아니라 이거지?]
[유수현: 그만 놀고 너도 빨리 복귀해]
[유수현: 나랑 같이 고생하자고(으르렁)]
방수정은 피식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고민하고 있다고.”
어제였나, 그저께였나?
여행을 다녀오는 사이 서인하에게서 연락이 와 있었다.
전파가 터지지 않아서 LA 시내로 들어와서야 확인한 뒤 전화를 걸었다.
그 통화에서, 서인하는 놀라운 제안을 했다.
“우리 회사에서 여행 프로 하나 맡아 주지 않겠냐.”
입사 제안이었다.
직속 선배인 서인하가 아이윌이라는 콘텐츠 제작회사를 만들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본인에게도 듣고, 유수현에게도 들었다.
그 회사에 당장 방송 제작을 진행해 줄 PD가 필요한데, 최대한 조건을 맞춰 주겠다고, 와서 맡아 주기만 하라는 이야기.
방수정도 혹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공부도 이미 끝났고, 맘만 먹으면 이 생활을 정리하고 돌아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죄송해요. 너무 갑작스런 이야기라. 생각 좀 해 보고 연락드릴게요.”
그렇게 소극적인 거절을 해야 했다.
고민은 지금도 하고는 있었다.
다만, 자신의 마음이 그렇게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한국이 그립고, 방송을 다시 만들고 싶은 마음은 있다. 그러기 위한 유학이었고.
그렇지만 동시에…… 그래, 무언가가 귀국을 막고 있었다.
한국에 다녀올 때마다 차곡차곡 쌓인 그 마음이, 그녀의 결정을 막고 있었다.
분명 이렇게 카페에 앉아 있으면 심심한데, 그렇다고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널 결단은 내려지지 않는다.
뭘까, 이 마음은.
스스로도 잘 알 수 없었다.
“참…… 사춘기도 아니고.”
본인에게 던지는 비판 어린 평을 중얼거린 뒤에 방수정이 다시 커피잔을 잡았다.
이미 반쯤 식어 미지근해진 커피를 입에 담는데,
“……?”
도로 건너편에서 동양인 하나가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코리아타운에서 만난 한인인가 싶어서 미간을 좁히며 유심히 봤다가, 방수정은 그만 잔을 든 채 굳어버렸다.
그가 차가 없는 틈을 타 도로를 다다다 건너와 그녀 앞에 섰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방 PD님.”
방수정이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강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