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성공할 확률 100%-169화 (169/200)

169화 놀고 있는 PD

“……좋아요, 방송 리스트는 충분히 구성됐네요.”

오랫동안 기획안을 훑어보던 허소윤 CP가 후련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보고 있던 것은 <V.I.P>의 최종 기획안.

패널 예정과 전체 구성, 촬영 일정이 담겨 있어, 이대로 위로 올려서 결재만 받으면 되도록 꾸며져 있는 버전이었다.

“내부 평가는 어떻습니까?”

최종안까지 오자, 나는 마지막으로 확인하기 위해 물었다.

“불안해요?”

그녀의 되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기보다, 피드백이 어떤가 하고요. 허 CP님이야 이렇게 일대일로 이야기는 나누지만 다른 분들은 보질 못해서요. 일단 진행은 되겠지만 좀 더 다양한 피드백도 받아 보고 싶었습니다.”

기획안이란 게 원래 만들어질 때는 다 좋게 보이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다.

AGD 앱의 확률이 절대적인 도움을 주기야 하지만, 사람이 직접 보고 주는 피드백이 그리울 때는 분명 있었다.

허소윤 CP는 살풋 웃었다.

“욕심이 많군요.”

“예?”

“이 정도까지 기획안 깔끔하게 뽑아 놓고, 아직도 더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95%]

최종안이 통과될 확률은 이제 안심해도 될 수준.

그렇지만 5%의 부족 확률이 어떤지 알고 싶기도 해서 물은 질문이었으니까.

“더 완벽한 기획안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러려면 다른 사람의 의견도 필요하니까요.”

“옳은 말이에요. 하지만 타임 오버예요. 오늘은 결재 받아내고 예산 신청해야 하니까, 이제 욕심은 버리도록 하세요.”

그녀의 단호한 말에 나는 입을 쩝 다시고는 웃어 보였다.

“잠깐만 기다려요.”

그녀가 나를 회의실에 두고, 밖으로 나갔다.

황영준 국장이라는 책임자를 만나러 간 것임을 알기에, 나는 얌전히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면서 기다렸다.

[웹드 촬영 일정 확인ㅇㅇ 진행해주세요]

[우철민PD: ㅇㅋ]

[우철민PD: 미팅 중 아니었어?]

[결재 받으러 가셨어요. 기다리는 중입니다]

PC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는 중에 문득 시야 한쪽의 확률이 변화하는 것이 감지됐다.

[100%]

아, 결재 받았다.

[결재 나왔나 봅니다]

[웹드 진행은 사장님께 직접 보고해주세요]

[우철민PD: ㅇㅇ]

최종안 위에 떠 있던 확률이 스르륵 사라지면서, 포인트가 적립되었다는 메시지까지 확인했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AGD 앱을 열었다.

[현재 적립 포인트/사용 가능 포인트]

[15,725/4,029P]

사용 가능 포인트가 엄청나게 모였다.

몇 년 동안 AGD 앱을 사용하면서 포인트가 이렇게까지 적립된 것은 처음이었다.

4,000포인트가 넘은 것은 처음 아닌가?

“……진짜 쓸 일이 없었네.”

아이템을 써야 포인트 사용이 될 텐데, <더 라이벌> 즈음부터 아이템 사용을 거의 하지 않았다.

아이템이 없어도 어떻게든 내 힘으로 헤쳐 나왔다는 증거가 되리라.

거꾸로,

“아이템 안 쓰면 지난번처럼 업데이트로 아예 다 사라지는 거 아닌가…….”

‘Lv2’가 붙는 아이템이 업데이트를 하면서 사라졌었다.

다음 업데이트가 또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어쩌면 그나마 있던 아이템들도 사라질지 모른다.

괜히 불안해졌다.

“억지로라도 사용은 해야 하려나.”

내 사용 패턴에 맞게 업데이트가 이루어지는 AGD 앱이니, 좀 더 적극적으로 아이템을 사용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냥 5,000포인트를 넘겨 봐……?”

동시에 그런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이렇게 모인 거, 아예 5,000 이상을 노려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는.

AGD 앱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기다렸죠?”

벌컥, 하고 문이 열려서 화들짝 놀랐다.

“뭐야, 왜 그렇게 놀라요? 폰 보면서 무슨 엉뚱한 짓을 하고 있었길래?”

“아, 아닙니다. 회사에서 연락이 와서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그 웹드?”

“예, 그거요.”

딱히 기밀도 아니고, 이제 파트너가 된 입장이라 허소윤 CP에게도 웹드라마 제작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었다.

“웹드 가끔 보는데. 재밌는 거 만들어지면 좋겠네요.”

“저희 첫 작이라, 그만큼 신경 쓰고 있습니다.”

인사치레겠지만, 나는 단단하게 대답을 돌려주었다.

웃으면서 자리에 앉은 허소윤 CP가 간단히 말했다.

“컨펌 받았어요. 내일까지 예산 편성 나올 거고, 거기에 맞춰서 제작 진행해 주면 될 것 같네요. 아, 광고 몇 개 더 들어왔는데 공유해 줄게요.”

최종안에 이미 올라 있는 광고 말고도 추가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제작비가 더욱 세이브될 테니 좋은 징조였다.

“고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생은 무슨. 같이 하는 거죠. 그래서 말인데.”

“예.”

“국장님이 가기 전에 한번 인사하고 싶다고 하시네요. 프로그램 만들게 됐는데 아직 얼굴도 못 봤다고.”

황영준 국장은 나도 허소윤 CP를 통해 이야기만 들었지, 한 번도 보질 못했다.

“저도 뵙고 가고 싶습니다.”

“미팅이 잡혀 있어서 아마 그전에 잠깐 부르실 텐데…… 아, 잠시만요.”

이야기하면서 회의실 밖을 보던 허소윤 CP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를 따라 시선을 이동하자, 창밖에 두 남자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창으로 허소윤 CP와 눈이 마주치자, 그중 50대 초반의 머리가 하얀 남자가 회의실 문을 열었다.

“손님이 일찍 오셔서 말이야. 그냥 여기서 인사하지.”

그는 손님으로 보이는 남자를 데리고 회의실로 성큼 들어왔다.

내가 일어나자, 그가 손을 내밀었다.

“채널T 예능국장 황영준입니다. 반가워요.”

“처음 뵙겠습니다. 아이윌, 강대한입니다.”

이 사람이 황영준 국장이구나. 나는 손을 맞잡으며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가 내 손을 흔들며 팔을 툭툭 쳤다.

서인하 선배와는 또 다른 스타일의 친근함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이쪽은…….”

황영준 국장이 같이 들어온 남자를 소개하려는데, 그가 먼저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라이언 킴입니다.”

나도 서둘러 명함을 꺼내 교환했다.

익숙지 않은 영어식 이름이 진짜인가 하고 명함을 확인했더니,

『El Dorado

Chief Manager

Ryan Kim』

그런 생소한 영자가 그려져 있었다.

명함 한쪽의 로고를 확인한 다음에, 라이언 킴이라는 남자의 얼굴을 다시 봐야 했다.

“엘도라도…… 설마, 그 엘도라도입니까?”

“예, 그 엘도라도입니다.”

엘도라도.

미국에서 시작된 OTT 기업이다.

선발 주자라 할 수 있는 듀플릭스에 이어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OTT 서비스를 진행 중이며, 내년부터 한국에 본격적으로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었다.

민준기 기자가 이야기를 해 주어서 관련 기사를 찾아봤었는데, 그 회사 사람을 채널T에서 만날 줄이야.

“라이언 씨는 한국 사업 담당입니다. 강 PD가 만드는 <V.I.P>도 아마 이쪽으로 유통이 될 것 같아서, 이 기회에 얼굴 익혀두면 좋을 것 같았어요.”

“저야…… 영광입니다.”

나는 괜히 어안이 벙벙해져 명함만 몇 번이고 매만졌다.

그사이 몇 마디 더 나눈 다음에 황영준 국장이 말했다.

“제작 잘 부탁합니다. 아이윌도 그렇고, 우리 채널T도 그렇고, 좋은 스타트를 끊으면 좋겠군요.”

“예, 믿음에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악수를 나누고, 라이언 킴과도 손을 맞잡았다.

“다음에는 좀 느긋하게 대화할 수 있으면 좋겠군요.”

“그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자리가 자리라서 기약은 못 하고, 그저 웃으며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너무 갑작스러웠죠? 미안해요. 우리 국장님이 좀 그런 면이 있으셔서.”

둘이 떠나고 허소윤 CP가 미안해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면서도, 채널T를 떠날 때까지 멍한 감정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 * *

“그래서 일단 명함은 주고받았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네요.”

회의실에 앉아서 서인하 선배에게 보고를 하는 중에도 잘 생각이 안 난다.

아이윌이라는 회사를 하고 있고, 예능 방송을 주축으로 콘텐츠를 제작하는 회사라고 소개를 한 것 같긴 한데, 제대로 말이 전달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따로 시간을 갖자고 한 걸 보면 괜찮았던 것 아닐까?”

“그렇겠죠?”

우철민 PD가 안심을 시켜주어서 그나마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렇게 남은 보고를 하고, <V.I.P> 최종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우철민 PD의 웹드라마 기획을 다듬은 다음에야 세 명의 회의가 끝났다.

“우 PD, 먼저 나가 봐.”

서인하 선배가 같이 일어나려는 나를 그렇게 붙잡았다.

우철민 PD가 먼저 회의실을 나가는 것을 본 다음, 그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응?”

“보고를 듣고 있으신 건지 잘 모르겠어서요. 오늘 미팅 가신 일이 잘 안 되셨나 하고요.”

내가 채널T 라인을 뚫고 있을 때, 서인하 선배도 다른 방송사들과 미팅을 했다.

원래 인맥은 넓으신 분이니 걱정은 안 했고, 그만큼 추가 미팅과 긍정적인 답변도 들었다.

오늘 미팅은 그 긍정적 답변을 보낸 방송사와 추가 미팅을 나눈 자리였다.

“일단 가제작 컨펌은 받았다고 알고 있는데, 혹시 틀어졌나요?”

“아니, 그건 아니야. 아직 계약 전이고 좀 더 컨펌을 받아야겠지만, 제작은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

그래, AGD 앱으로 확률을 보면서 방송사에 맞춰 고친 기획안이니까 틀어지진 않을 것이다.

확률에 따라서 시큰둥한 반응은 있을 수 있을지언정 단칼에 거절당한 경우는 현재까지 NBS를 빼고는 없으니까.

“그럼 무슨 일이십니까?”

서인하 선배의 표정은 다른 이유가 있음을 잘 알려주었다.

내가 이야기해 달라고 하자, 그는 한숨과 함께 오늘 미팅에서 있었던 일을 알려주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듣다가, 나도 그와 비슷한 표정이 되었다.

“……두 달 뒤 방영이라고요.”

“그래, 스케줄을 맞춰 달라는 거야.”

“그 스케줄 아니면 안 된답니까?”

“안 될 건 없다는데…… 말만이겠지.”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NBS를 나와서 어쨌든 회사를 세웠고, 서인하 선배나 스스로 말하긴 부끄럽지만 인지도가 쌓인 나 같은 PD도 있다.

이름값이야 그 정도로도 먹힐 만하지만, 사실 다른 방송사 입장에서는 아직 명확하게 증명된 바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일종의 시험으로 자기들 구멍 난 편성을 메워 달라는 요구를 하는 것이다.

“뭔가 편성 하나 펑크 났나 보군요.”

“뻔한 거지 뭐. 우리한테는 기회야. 다만…….”

“사람이 없네요.”

우리 회사에 현재 메인 역할로 진행이 가능한 PD는 서인하 선배, 나, 우철민 PD 정도다.

그중 나나 우철민 PD는 이미 제작에 들어가는 타이밍이라, 남는 건 서인하 선배.

다만…….

“선배님이 직접 맡긴 힘드실 것 같습니까?”

“하려면 하겠지. 하지만 그게 우리 회사에 좋진 않을 것 같아.”

서인하 선배는 사장으로서, 내부 경영과 대외 업무까지 도맡아 하고 있다.

솔직히 방송 하나 맡아서 책임 연출을 할 만한 환경이 아니었다.

결국 사람이 없는 것이다.

“일이 많아지는 건 좋지만…… 이런 문제가 생기는군요.”

“의욕에 차서 너무 기획안을 뿌렸나 보다.”

AGD 앱으로 각 방송사의 입맛에 맞게 뿌려놓은 건 좋은데, 이런 부작용이 있다.

둘이서 잠깐 침묵하는 시간이 지나갔다.

말이 침묵이지,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시끄러웠다.

“……주영 선배 데리고 올까요?”

“뭐? 회사 옮기고 싶대?”

“아뇨, 아뇨. 그런 말이 아니라…….”

우스갯소리 삼아 던져 봤는데, 서인하 선배가 너무 적극적으로 나서려 해서 대번에 꼬리를 내렸다.

농담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괜한 말을…… 응?

“선배님, 거기 방송사에 넘긴 기획이…… 여행 프로그램이었죠?”

“그랬지. 왜?”

어라, 잠깐. 가능성 있는 거 아닌가?

나는 서둘러 노트북을 열어 기획안을 꺼냈다.

여행 프로그램이 없는 방송사에 맞춰서 짜낸 여행 예능 아이템.

비어 있는 담당 PD란에 내가 떠올린 이름을 적어 넣고, 확률을 띄웠다.

과연. 어쩌면 수가 있겠는걸.

궁금해하는 시선의 서인하 선배를 다시 보았다.

“……저희, 놀고 있는 PD 한 명 알고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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