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시사회
“그럼.”
비서에게 고갯짓으로 인사를 하고, 곽성찬 본부장은 문을 닫고 나왔다.
전략기획실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리는데, 복도 반대편에서 한 사람이 우두커니 서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안녕하십니까, 이사님.”
왕이범 이사였다.
곽성찬은 큰 걸음으로 성큼 걸어가 가볍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아침부터 외근을 나갔던 왕이범이라서, 오늘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침에 들렀는데 안 계시더군요. 외근 다녀오신 일은 잘되셨습니까.”
왕이범은 곽성찬의 잘 넘긴 헤어스타일을 힐끔 봤다가, 그의 등 뒤로 시선을 던졌다.
“신 이사님 방에 다녀오는 모양이야.”
“아, 예. 지금 진행되고 있는 드라마 건 때문에요. 신 이사님 소개로 받은 외부 스튜디오 몇 건이 있어서, 논의 드리러 다녀왔습니다.”
막힘없는 보고에 왕이범은 무미건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도 보고할 게 있나?”
“지금 정리하고 있습니다. 표 실장이 정리하는 대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그러지.”
왕이범이 무심한 걸음으로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곽성찬은 부드러운 얼굴로 지켜보았다.
쿵.
문이 닫히자마자 곽성찬은 가볍게 걸음을 움직여 전략기획실로 돌아왔다.
본부장실로 들어가자 표인배 실장이 뒤따라 들어왔다.
“왕이범 이사님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알아. 좀 전에 인사했어.”
“보고서는 준비해 뒀습니다.”
표인배 실장이 미리 작성해 둔 보고서를 그의 자리에 올렸다.
곽성찬은 가볍게 내용을 훑었다.
지금 전략기획실 주도로 제작이 들어간 예능들, 그리고 향후 제작될 예능들, 거기에 더해서 결재가 필요한 사항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오케이. 잘했네. 역시 믿을 만해.”
표인배는 곽성찬이 OTT 사업체를 시작할 때부터 함께한 직원이었다.
곽성찬의 직속 부하이자 수족이나 다름없는 존재인데, 그만큼 손발이 맞는 존재였다.
그에게 신호현과 논의한 사항을 전달하고 몇 가지 지시를 내린 다음, 곽성찬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이범에게로 갈 생각이었는데, 표인배가 잠깐 그의 길을 막았다.
“소식이 하나 들어왔습니다.”
“어떤?”
“아이윌이 채널T와 접촉했다고 합니다.”
재킷을 챙겨 입던 곽성찬이 잠깐 멈칫해서 그를 돌아보았다.
“채널T 누구?”
“허소윤 CP라더군요. 방송 제작 건으로 만난 것이고, 대략 내부에서도 진행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황 국장 선도 통과했다는 건가.”
재킷의 매무새를 다듬으면서 곽성찬이 피식 웃었다.
“그동안 가져온 기획들을 채널T 쪽으로 들고 간 건가? 설마 <더 라이벌> 같은 배우 오디션을 그쪽에서 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좀 묘한 이야긴데…….”
“뭔데.”
표인배도 애매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무비 메이커> 같은 리얼리티 예능이라고 합니다.”
곽성찬의 표정도 묘해졌다.
<무비 메이커>가 뭔지는 곽성찬도 알고 있었다. <더 라이벌>과의 관계를 자세히는 알지 못해도, 비슷한 시기에 방영해서 라이벌시 되었고, 그러다 사고로 제작이 중단되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 <무비 메이커>와 비슷한 방향이라면…….
“아무리 허소윤 CP가 주도했다고 해도 채널T에서 같은 기획을 받아들였을 리는 없을 것 같고…….”
“소스를 알아볼까요?”
표인배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담한 발언을 했다.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아마 곽성찬 정도일 것이다.
“그래 보지. 쥐고 있으면 언제든 써먹을 수 있을 테니.”
“알아보겠습니다.”
표인배가 고개를 숙여 보이고 본부장실을 나갔다.
혼자 남은 곽성찬이 왕이범에게 올릴 보고서를 손에 들면서, 훗 하고 웃었다.
“재미있게 나오는군, 강대한 PD.”
전략기획실에서 그동안의 기획 제안을 전부 리테이크했으니 어떤 방법을 내리라곤 예상했다.
하지만 채널T와 접촉을 하고 기획을 통과시킨 흐름이 예상보다 더 빠르긴 했다.
“뭐…… 그래, 그렇게 나오셔야 재미있지.”
곽성찬, 그는 한번 놓친 물고기가 드넓은 바다에서 헤엄쳐 다니는 것을 그냥 편히 두는 어부가 아니었다.
* * *
영화 제작 리얼리티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협업을 해야 하는 상대가 있었다.
영화 <라이벌> 시사회 현장.
금완승 감독은 약속했던 대로 우리를 시사회에 초대해 주었다.
서인하 선배와 나는 퇴사 이래 처음으로 근사한 정장을 빼입고 시사회 현장에 참여했다.
<라이벌>은 재미있었다.
중간에 CG 작업에 좀 더 신중을 기한다고 개봉이 한 달 미뤄졌는데, 그만큼 영화 전반에 깔린 CG는 정말이지 수준급이었다.
할리우드 영화라고 해도 충분히 통할 정도여서, 나는 스태프롤이 올라가는 중에 적힌 CG 스튜디오의 이름을 외워 두었다.
밖으로 나와 카페에서 조금 시간을 때우고 있자, 금방 금완승 감독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가 기다리고 있는 식당으로 가자, 어느새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아 주었다.
“금 감독님, 축하드립니다. 영화 정말 재밌게 잘 봤습니다.”
중간 중간 촬영 현장을 견학하기도 했던 영화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옆집 아재 같은 사람이지만, 영화 만드는 것 하나만은 정말이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감독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 어떤 장면이 재밌었어?”
거기다, 자기 영화에 대한 칭찬도 참으로 좋아하는 감독이었다.
나는 웃음을 지으면서 서인하 선배와 같이 영화의 재밌었던 점을 늘어놓았다.
“주인공 둘이 딱 마주한 장면에서, 과거 장면이 교차 편집으로 들어간 그 장면이 정말 좋더라고요.”
“류준혁 배우가 초능력을 각성해서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리는 장면은 진짜 음악도, 신도 좋았습니다.”
“음음. 그렇지? 내가 그 장면 정말 빡세게 힘을 줬거든.”
“그, 꼬마가 마지막에 쳐다본 창문이 바르르 떨리던 거, 그거 2편 떡밥인가요?”
“그건 노코멘트 하지. 어차피 흥행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 아니겠나.”
우리의 칭찬과 질문에 그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대번에 술과 요리를 주문했다.
중식 식당이었는데, 우리가 흔히 먹는 중국집 스타일이 아닌 레스토랑 분위기였다.
나오는 요리들이 하나같이 고급이었고, 고량주까지 시킨 금완승 감독은 차를 가지고 왔다는 우리의 말도 무시하고 잔을 따랐다.
“시사회 평들 좋은 것 같습니다. 알바가 좀 있기야 하겠지만, 이번에도 천만 넘기시겠어요.”
“너무 바람 넣지 마. 벌써부터 2편 만들고 싶어지니까. 일단 마시자고. 응?”
그의 잔에 건배를 하고, 독한 고량주를 꿀꺽 삼키는 사이.
“어, 대한이 너도 결국 왔어?”
“강 PD님 안녕하세요!”
인터뷰를 마치고 온 준혁이 형님과 박지운이 자리에 합류했다.
그 후로 스태프들과 직원들이 옆자리들을 채우고, 우린 결국 그토록 거부했던 시사회 뒤풀이 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아서 방송 이야기만 짧게 하고 빠지려고 했는데. 기분 좋아지고 술이 들어간 금완승 감독을 누구도 말릴 수가 없었다.
“포기해. 어차피 예상했던 거잖아.”
“에휴, 그렇겠죠? 이야기는 해야 할 텐데.”
결국 서인하 선배와 그렇게 포기를 하고, 금완승 감독이 적당히 흥분을 가라앉기만을 기다렸다.
뒤풀이이고, 시사회 평도 좋아서 분위기는 그만큼 더 화기애애했다.
그동안 우이독경에서 만든 영화들은 한 번도 흥행에 실패한 적이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적자를 기록한 적이 없고, 최근 작품들은 700만 이상에 천만 영화까지도 있다.
이번 <라이벌>도 분명 그런 대박작 계열에 끼리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 대한아. 네가 한번 예상해 봐.”
“예? 뭘요?”
시사회 평을 훑어보고 있던 준혁이 형님이 문득 그렇게 말해 왔다. 내가 되묻자, 그가 굳이 영화 예매 앱을 열고 포스터를 보여 주면서 다시 물었다.
“<라이벌> 관객수 스코어 말이야. 얼마나 들 것 같아? 천만 영화 될 것 같아?”
준혁이 형님도 이번 영화에 자신이 있어 보였다.
대본 초기 때부터 눈독을 들린 작품이니만큼 준비와 연기에도 정성을 다했고, <더 라이벌>이라는 예능의 힘도 얻어서 흥행은 이미 따놨다는 분석도 있었다.
그만큼, 준혁이 형님의 또 다른 대표작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걸 저한테 물으셔도……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효명이한테 들었어. 효명이 타이틀곡도, 다른 엑시트 곡들도 너한테 들려주고 골랐다던데. 다 대박 났잖아.”
“그게 정말이십니까, 강 PD님?”
옆에서 박지운이 매우 초롱초롱한 눈으로 쳐다본다. 부담스러워 손사래를 쳤다.
“그냥 우연입니다, 우연. 효명이 걔가 괜히 오버한 거예요.”
“아무튼 말이야. 한번 예상해 봐. 얼마나 들 것 같아?”
“그래, 나도 궁금하네, 강 PD. 얼마나 들 것 같아?”
술이 올라 벌건 얼굴로 금완승 감독도 끼어들었다. 이 테이블에 모인 전원이 흥미진진하게 나를 쳐다봐서, 나는 민망함과 즐거움을 동시에 느꼈다.
내 참. 술자리의 여흥 정도니까…… 그래, 뭐, 못 어울릴 것도 없지.
[85%]
[‘영화 제작 리얼리티 기획안이 채널T의 정식 컨펌을 받아낼 확률’의 사용을 종료하였습니다.]
[100% 확률을 달성하지 못하였습니다.]
[포인트가 적립되지 않습니다.]
연속으로 뜨는 메시지를 보고, 아주 조금 아까웠다.
정식 컨펌을 받을 때까지 확률을 확인하며 기획안을 구체화시키고 있었는데.
그래도 뭐, 오늘 자리가 지난 뒤에 다시 재개하면 되니까. 굳이 100%에 연연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준혁이 형님의 폰을 받아 포스터를 노려보았다.
사실 <라이벌>이 천만까지 갈 영화인지는 모르겠다. 영화 완성도도 있고, 시기도 좋다고 하지만, 국내 SF 영화는 여태껏 제대로 성공한 적이 없으니까.
그래도 감독발과 배우발이 있으니, 천만이 될 가능성이 있는지나 봐 볼까?
[100%]
응?
아주 단호하게 눈앞에 나타나는 확률 숫자에 나는 도리어 당황했다.
[100%]
다시 눈을 비비고 봐도, 숫자는 그대로였다.
[100%의 확률을 달성하였습니다.]
[포인트 지급이 되지 않습니다.]
애초에 100%라면, 포인트 지급은 되지 않는다.
그렇다는 것은, 그래, 이 확률이 거짓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나는 말문이 막혀서 폰만 노려보았다.
“야, 대한아. 왜 그래?”
“강 PD. 술 많이 마셨어?”
나를 부추긴 준혁이 형님과 금완승 감독이 도리어 놀라 내 어깨를 흔들어서 정신을 차렸다.
“감독님. 형님.”
“응, 그래.”
“<라이벌> 천만 될 것 같습니다. 아뇨, 무조건 천만 영화예요.”
나는 단언했다. 그 무엇보다 단호하게.
내가 폰을 돌려주자 준혁이 형님이 도리어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해 보였다.
“어…… 아, 아니…… 그걸 또 그렇게 민망하게 단언해 주지 않아도 돼. 응원의 의미라고만 받아 둘게.”
“천만이 안 되면 제 손에 장을 지지겠습니다.”
“아니, 그렇게까지 안 해 줘도 된다니까.”
“성을 갈까요?”
“민망하게 왜 이래, 이 녀석이?”
“강 PD, 술 많이 마셨구만. 고량주에는 약한 걸 내가 몰랐네.”
도리어 금완승 감독이 반성하는 투로 시무룩해져서 나는 푸하핫 하고 웃어 버렸다.
부추긴 사람들이 왜 이리 약하게 굴어. 나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제가 전에는 강촉새라고 불렸습니다. 제 촉 한번 믿어 보세요.”
“거 참……. 그래, 뭐. 까짓것 믿어 볼 수는 있지. 천만 걸고 건배나 할까, 그럼?”
금완승 감독이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소리쳐 모든 사람의 시선을 주목시켰다.
“자, 여기 주목! 여기 강 PD가 <라이벌>이 무조건 천만이 넘을 거라고 하시는데. 빈말이라도 기분은 좋으니까 다들 건배나 합시다!”
“와아! 감사합니다!”
“강 PD님, 천만 못 넘으면 한턱 쏴요!”
“옳소!”
그런 분위기에 취해 나도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콜!”
어차피 지는 싸움이 아니다. 내가 물러설 필요가 없지!
나의 반응에 장내가 시끌시끌거리고, 금완승 감독의 지시로 잔을 채운 사람들이 높이 소리쳤다.
“<라이벌> 천만 돌파를 위하여!”
“위하여!”
“건배!”
그런 분위기에서 뒤풀이는 매우 즐겁게 끝났다.
그렇다고, 그 분위기에 취해서 일을 까먹은 것은 아니었다.
술이야 꽤 마셨지만 금완승 감독도 말술이라 정신은 괜찮았다.
서인하 선배와 나는 그 자리에서 채널T와 진행하기로 한 방송에 대해서 설명하고, 금완승 감독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나도 출연시켜 줘.”
“저도요, 강 PD님.”
준혁이 형님과 박지운이 송일현 매니저를 대동한 채 그렇게 오퍼를 던져와서 일단 구두로만 오케이를 내려놓고, 나는 즐겁게 그 사항들을 정리해 허소윤 CP에게 보냈다.
[저녁 늦게 메시지 실례합니다. 금완승 감독님 오케이하셨습니다]
[허소윤CP: 일이 빠르네요 잘됐군요]
[추가로... 류준혁 배우 박지운 배우가 출연시켜 달라는데 이것도 기획안에 적을게요]
[허소윤CP: (벼락)(천둥)(화들짝)]
[허소윤CP: 같이 있어요?!]
[<라이벌> 시사회 뒤풀이에 왔습니다]
[허소윤CP: 나 표 좀...]
허소윤 CP와는 요 며칠 집중적으로 메시지를 나눴더니 이제 어느 정도 농담도 오가는 사이가 되었다.
정민우 팀장과는 또 다른 의미로 일이 수월한 스타일이라서, 이분 밑에서 일을 배웠어도 괜찮았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었다.
[한번 부탁해보겠습니다ㅎㅎ]
[허소윤CP: 부탁할게요ㅎㅎ 기획안도요]
[넵]
그렇게 메시지를 보낸 뒤, 필을 받은 금완승 감독에게 멱살이 잡혀 2차까지 따라가야 했다.
그래도 별로 걱정은 들지 않았다.
갑자기 떠오른 아이템이지만 점점 더 자신이 붙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허소윤 CP와 메시지를 나눈 뒤, 컨펌을 받을 확률을 다시 확인했어야 했는데…… 나는 그것을 간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