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또, 바빠지겠습니다
영화사 바람처럼의 신동욱 실장이 <무비 메이커>를 가져왔을 때. 그의 설명은 이랬다.
“영화판이란 게 사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화려하지 않습니다. 어느 제작업계가 안 그렇겠냐만은, 영화판만큼 큰돈이 움직이면서 열악한 곳도 또 없죠.”
영화사의 실장이면서도 신동욱은 그런 면에서는 아주 과감하게 발언했다. 그 말투가 허소윤 CP의 흥미를 돋게 했다.
“하지만 그 영화판에 사람들이 환상을 가지는 것은 현실이고, 그 현실을 적당히 건드려 주면서 리얼리티를 꾸며 주면 프로그램으로서 괜찮게 성립되지 않겠습니까?”
그 당시, 채널T는 강대한이 분석한 이유대로 관찰 예능, 리얼리티 예능을 찾고 있었다.
내부 기획도 물론 몇 개를 뽑아 파일럿 진행이 되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신동욱의 제안은 꽤 혹하는 것이었다.
허소윤은 첫 미팅에서 긍정적 대답을 하고, 다음 미팅 전에 상부 결재를 받아냈다.
바람처럼이 영화사여서 TV 예능을 제작해 본 경험이 없다는 점이 우려되었는데, 그녀가 우려한 것보다 너무 무난하게 결재가 진행되었다.
“그 기획에 괜찮은 투자자가 생길 것 같아. 진행해 봐.”
CP이면서도 그 투자자가 누구인지는 상부도 말을 아꼈다. 그녀는 의아해하면서도, 우선은 괜찮은 기획을 잡았다는 생각에 제작을 진행했다.
바람처럼은 예상보다 제작을 더 빨리 진행했다. 배우 기용도 그렇고, 영화 제작과 외주사 협력도 그러했다.
그 이유가 NBS의 <더 라이벌> 때문임은 다소 늦게 알았다.
그런 방송이 제작되고 있다는 것은 알았는데, 바람처럼과 관련되어 있는 줄은 뒤늦게 안 것이다.
“티저부터 빨리 띄워. 화제를 놓치면 안 돼.”
그녀의 상사도 그렇게 지시했고, 때마침 티저 제작도 이미 나와 있었다.
허소윤은 그대로 티저를 내보냈고, <무비 메이커>는 원하는 만큼 화제가 되었다.
“아직 부족해. 좀 더 조아 봐.”
“영화 제작도 맞물려 있어서 그렇게 조을 순 없습니다.”
“우리가 돈 들인 게 얼만데. 시청률 최소 4% 이상은 만들어야 할 거 아냐?”
상사가 보기에는 부족한 시청률이었다.
허소윤은 한숨이 나왔지만, 신동욱과 미팅하여 좀 더 제작을 서둘러 보려 했다.
그즈음, 일이 터졌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배우의 마약 스캔들이었다.
그 탓에 <무비 메이커>는 중지되었고, 채널T도 투자에 대한 피해를 입어야 했다.
“바람처럼에 전부 넘겨.”
“네? 하지만 바람처럼도 이 일을 예상하지 못했을 텐데요.”
“우리가 신경 쓸 바는 아니지. 일단 넘겨. 거기서 알아서 할 거야.”
뭔가 이미 이야기가 풀려 있는 듯 상사는 그렇게만 요구했다. 허소윤은 결국 지시대로 바람처럼 측에 배상 요구를 했고, 바람처럼은 안주환 소속사 블루액터스에 전부 피해액을 토스했다.
지금은 관련 사항들이 어느 정도 처리된 상태였고, 채널T가 입은 금전적 손해는 사실 그렇게 크지 않았다.
다만.
‘……결국 원하는 프로그램을 발굴하진 못했지.’
리얼리티 예능에 대해, 상부는 더욱 소극적으로 변했다.
다른 기획들보다 리얼리티, 관찰 예능은 더욱 통과되기 어려웠고, 아무리 허소윤이 CP로서 권한이 있다 해도 한계가 있었다.
그런 중에.
“배우가 직접 영화 제작 스태프로서 일하는 과정을 관찰하는, 리얼리티 관찰 예능…… 어떠십니까?”
강대한의 제안은 그녀가 눈을 번쩍 뜨게 만들었다.
그가 가져온 기획안들도 솔직히 나쁘진 않았다. 어느 것도 당장 만들어도 손색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영화 관련 리얼리티라면…….’
<무비 메이커>의 진행은, 아무리 채널T 측에 책임이 없더라도, 허소윤의 실책으로 남아 있다.
지금도 기사가 뜰 때마다 상사가 농담조로 갈구는 것이 느껴지는데.
영화 관련 예능을 가져간다면 분명 또 펄쩍 뛸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래서 더 해볼 만할 거야.’
실책은 만회하면 된다. 수습하지 못한 것도 아니고, 이젠 괜찮은 방송만 잡아내면 된다.
그녀에게 있어서, 강대한의 애드리브에 가까운 발상은 오히려 천운의 기회와 같았다.
강대한과 미팅 후, 퇴근 시간이 다 될 때까지 고민을 하던 허소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국장님, 계시죠?”
국장실에 노크를 하고 묻자, 곧바로 대답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녀의 상사이자 채널T 예능국장인 황영준이 있었다.
그는 나가려는지 아우터를 손에 들고 있었다.
“중요한 일이면 내일 해. 지금 나가 봐야 해.”
“아, 미팅이셨죠. 짧게 할게요.”
그녀가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황영준이 한숨과 함께 소파에 앉았다.
“왜? 무슨 일인데.”
“오늘 강대한 PD와 미팅을 했습니다.”
“서인하랑 나갔다는 그 친구? 안 그래도 얘기는 들었어. NBS에서 기획을 많이 커트당했다고 하더군.”
그 이야기는 허소윤도 듣지 못했다. 강대한도 아마 약점이라고 생각해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군요. 저희에게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요.”
“괜찮은 기획을 가져온 건가?”
“영화 제작 리얼리티, 한 번 더 해 보려고요.”
“뭐?”
황영준의 눈매가 무서워졌다. 몇 년을 모시고 있는 국장이라, 저 표정이 결코 좋은 신호가 아님을 허소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허소윤도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버럭하시기 전에 들어보세요. <무비 메이커>와 같은 아이템은 아니에요.”
“……그래, 일단 들어 보자. 강대한 그 친구, 방송 잘 만든다고 소문은 다 나 있으니까.”
NBS의 강대한과 접촉해 보라는 지시를 내린 것은 애초에 황영준이었다.
강대한이 막내 PD 시절부터 관여한 모든 프로그램이 대박 성공을 했다는 것은 이미 업계에 유명한 이야기.
욕심내던 그 인재가 가져온 기획이니 분명 혹할 것이라고 허소윤은 판단했고, 그것이 들어맞았다.
그녀는 강대한과 나눈 기획에 대해서 보고했다.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로 경청하던 황영준이 물었다.
“제목이 뭐라고?”
“아직 제목은 없어요. 제작 들어가면 지어 봐야죠.”
“그래? 그럼…….”
소파 팔걸이를 피아노 치듯 손가락으로 통통거리던 황영준이 등을 세웠다.
“‘무비’나 ‘메이커’ 들어가는 제목은 절대 안 돼.”
“그럼…….”
“확정은 못 해. 기획서도 없잖아? 구체적인 안 가지고, 다음 주 기획회의 올려.”
“예, 알겠습니다!”
그녀가 분연히 일어나 사무실을 나가려 했다. 그런 그녀를 황영준이 붙잡았다.
“소윤아.”
“예, 국장님.”
“이번에는 실패하면 안 된다. 알지?”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돌아선 허소윤이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비 메이커>가 날아간 방송국에 와서 당돌하게 영화 관련 리얼리티를 제안하는 친구예요. 충분한 계획이 있을 거라고 봐요. 믿어 보시죠, 그 계획을.”
* * *
“야, 그걸 그렇게 지르고 오면 어떡해? 계획도 없잖아.”
사무실로 돌아와, 서인하 선배가 미팅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보고를 했다가 한 소리 들었다.
“그러게요. 제가 그때 미쳤나 봅니다.”
허소윤 CP와 미팅을 할 때 뭔가 홀린 게 틀림없다.
뭐에 홀린 건지는 명백하다. AGD 앱이다.
확률을 보는 게 아닌데. 머리 위의 확률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면서 허소윤 CP의 반응을 얻어낸 거지만…… 그랬더니 큰 과제가 생겨 버렸다.
“하지만 괜찮은 것 같아요. 채널T에서도, 허소윤 CP도 분명히 반응이 괜찮았습니다.”
“괜찮았던 거 맞아? 그러길 바라는 거 아냐?”
“아닙니다. 72%의 확률로 허 CP님은 혹했습니다.”
“그 구체적인 숫자는 뭐냐.”
나는 설명하지 못해서 그저 웃고 말았다.
미팅 이후에는 갱신되고 있지 않은 확률. 허소윤 CP가 눈앞에 있지 않아서, 앱 로그에만 존재하는 확률이었다.
마지막까지 72%를 유지한 채 헤어졌는데, 그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예측하기 어렵긴 하다.
“후우…… 그래서, 계획도 없는 기획은 어떻게 하려고.”
“오늘부터 짜 봐야죠. 되든 안 되든, 초안 나오는 대로 보내 보고 한 번 더 푸시하겠습니다.”
서인하 선배는 머리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주무르다가 우철민 PD를 보았다.
“우 PD는 별일 없지? 얘처럼 사고 안 쳤지?”
“하, 하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사고 칠 만큼 간이 크질 못해서…… 허허허.”
서글서글하게 웃는 얼굴에 서인하 선배는 그나마 표정을 풀었다. 나는 그 틈에 이야기를 돌렸다.
“가신 일은 잘되셨습니까.”
“음. 일단 몇 군데 긍정적인 대답은 들었어. 기획안 보낸 다음에 검토하고 다시 미팅하기로 했는데.”
“네, 그런데요.”
“아무래도 벌써 2분기까지 예정이 차 있다 보니까, 집어넣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아.”
예상한 일이긴 했다. 전반기 개편도 얼마 남지 않았고, 그렇다면 올해 편성 계획들이 어느 정도 올라왔을 때다.
다들 기획회의에 바쁠 시기.
그래서 서인하 선배의 미팅이 나쁜 결과만은 아닌 것이다.
“우선 그럼 제가 기획안을 고쳐 보겠습니다. 다행히 살아남는 기획안들이 많아서, 넣을 수 있는 기획안도 참 많네요!”
“……그래, 아주 긍정적이구나. 빨리 들어가서 잠이나 자라.”
“옙.”
그러고 보니 오늘도 기획안들 고치느라 새벽까지 있었지. 오늘은 정말 퇴근을 해야겠다.
간단한 팀장 회의가 끝난 다음에, 우철민 PD와 제작 중인 외주 영상들을 한 번 더 체크하고서 짐을 쌌다.
때마침 서인하 선배도 같이 일어나서,
“지금 들어가냐. 밥이라도 먹고 들어갈래?”
“어, 그럴…….”
까요, 하고 대답하기도 전에, 손에 들고 있던 폰이 진동을 해서 내려다보았다.
“……허 CP님입니다.”
“받아 봐.”
내 말에 사무실에 있던 직원들 전원이 나를 쳐다봤다.
“예, 여보세요. 강대한입니다.”
“안녕하세요, 허소윤이에요. 몇 시간 만에 연락드리네요. 통화 가능해요?”
“그럼요. 말씀하십시오.”
초면인 사이끼리 합석하게 된 테이블처럼 조용해진 사무실에, 내 전화에서 새어 나온 허소윤 CP의 목소리가 흘렀다.
“오늘 이야기 나눈 기획, 일단 국장님 선에서는 오케이 받았어요.”
“정말요?!”
눈앞에 허소윤 CP가 있었다면, 머리 위의 확률이 80% 이상으로 뛰었을 듯한 어투였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뇨, 아뇨. 서두르지 말고요. 기획회의에 우선 올려야 하니까, 기획안이 필요해요. 언제까지 가능할 것 같아요?”
“내일이라도 바로…….”
라고 이야기하다가 옆에서 서인하 선배가 눈을 부라리고 있어서 급히 말을 바꿨다.
“……드리고 싶지만, 저희도 만반의 준비를 해서 드리겠습니다. 회의가 언제인가요?”
날짜를 듣고, 그럼 이틀 전에 완성해서 드리겠다고 논의한 다음 전화를 끊었다.
“…….”
잠깐 서인하 선배와, 우철민 PD와 눈빛으로 대화를 나눈 다음 끊어 말했다.
“또, 바빠지겠습니다.”
* * *
그날은 퇴근했지만, 다음 날부터는 사무실에 붙어 살았다.
시작은 급히 내뱉은 이야기지만, 그것에 살을 붙이고 직원들의 아이디어를 덧붙이자 그럴싸한 기획안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84%]
채널T 예능국의 기획회의를 통과할 확률은 AGD 앱은 ‘84%’라고 판단했다.
기획회의를 통과하는 데 필요한 확률이 반드시 100%일 필요는 없지만, 90%가 넘지 않으니 일단 어느 정도 불안감은 있었다.
그래도 더 다듬을 시간은 없었기에, 그 버전을 허소윤 CP에게 메일로 보냈다.
다음 날, 허소윤 CP에게서 답신이 날아왔다.
[허소윤CP: 우리 윗분들 취향이려면 숫자가 좀 더 정확해야 할 것 같아요 몇 부분 표시했으니 수정해 주세요]
왕이범 이사에게 기획안을 올릴 때처럼 구체적인 데이터가 좀 더 필요해 보였다.
나는 엑셀과 PPT를 들여다보면서 기획안을 수정했다. 그러자,
[89%]
기획안의 통과 확률이 90% 근처까지 상승했고,
[허소윤CP: ㅇㅇ 수고했어요 이렇게 올릴게요]
허소윤 CP가 오케이를 주는 시점에 맞춰,
[90%]
목표로 하던 90%의 확률까지 상승했다.
[잘 만들어보겠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채널T 기획회의에는 내가 참석할 수 없다. 허소윤 CP가 우리 아이윌의 대리인이 되어서 설득해 줘야 한다.
그래도 90% 확률이면 크게 어긋나진 않겠지.
그런 희망을 가지고, 하지만 결국 불안해서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다음 날이 되었을 때.
[허소윤CP: 통과 (엄지척)]
물러터진 고구마에 목이 멜 때의 사이다 같은 메시지가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