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또 다른 길
“믿어도 됩니다.”
그런 친절한 인사와 미소를 받아 봤자, 아무것도 좋아지는 것은 없었다.
어찌어찌 인사를 하고, 서인하 선배와 어깨를 늘어뜨리고 나와서, 정민우 팀장을 만나서 카페로 온 과정이 그다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내 손에 차가운 아메리카노가 잡혀 있었다.
“제가 시켰습니까?”
“네가 차가운 걸로 달라고 했잖아. 사 줘도 불만이야?”
정민우 팀장이 핀잔주는 것을, 나는 곧 눈이라도 내릴 것 같은 흐린 바깥을 한번 살펴보며 흘려들었다.
쪽.
힘껏 아메리카노를 빨자 편두통이 몰려왔다.
아파서 테이블 위에서 가볍게 뒹굴고 난 뒤에야 뭔가가 개운해졌다.
“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내 질문에 서인하 선배와 정민우 팀장이 눈을 마주치더니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기획을 뺏었다……고 하기엔 좀 그렇지. 애초에 NBS에서 진행할 권리는 있으니까. 다만…… 아무것도 알리지 않았다는 건 나도 처음 들었어.”
“정 팀장도 아무것도 못 들었던 거야?”
“들었으면 제가 먼저 국장…… 선배님한테 말씀드렸겠죠. 저도 황당합니다.”
전략기획실에서 프로그램 기획을 맡고, 예능국으로 내려보내 제작 실무를 돌린다.
표인배 실장이 들어오고, 전략기획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이후, 새 기획들 다수가 그렇게 진행되고 있다고 정민우 팀장은 설명했다.
“그런데 그게…… 시즌2나 후속 시즌도 똑같이 적용될 줄이야……. 왕 이사님도 모르고 계신다는 말이잖아요?”
가장 놀라운 건 그것이었다.
NBS 내부에서, 서인하 선배를 가장 지원 사격해 줄 사람이 바로 왕이범 이사일 텐데.
그 왕이범 이사가 해외로 출장을 간 사이 우리랑 미팅을 해서 이런 폭탄을 터뜨린 것이다.
“아까 하는 말 들어 보니, 전략기획실이 이사 결재 없이도 움직일 수 있는 것 같던데. 맞아?”
“그건 맞아요. 전권을 준 상태라서, 곽성찬 본부장의 결재면 진행됩니다. 사후 보고만 올려도 될 거예요.”
그렇게 몇 개의 기획이 현재 예능국으로 떨어졌다고, 정민우 팀장은 손가락으로 세어 보였다.
그런 자세한 설명을 들어도 납득은 가지 않았다.
두 달 정도 사이에 대체 NBS 안을 어떻게 구워삶은 거지. 능력은 있겠거니 했지만, 이건 다른 의미의 능력이었다.
“<더 라이벌> 시즌2 기획이 오늘 정해지는 바람에 미팅 오기 전에 알리지 못했다고 했었죠. 그건 맞을까요?”
“그걸 믿는다면…… 너무 순진한 거겠지?”
일부러 불러들여서 알렸다라.
[53%]
그 낮은 확률. 다시 확인해 보기도 싫어서 보지 않고 있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떨어졌을 것이 분명하다.
전후 사정을 파악하니, 절반의 확률이라도 있는 것이 신기했다.
그 절반의 확률은 어쩌면 왕이범 이사가 도움을 줄 가능성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이렇게 통보된 이상, 더 이상 우리에게 길은 없어 보였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제가 도와드릴 일이 없네요.”
정민우 팀장이 되레 착잡한 얼굴을 했다. 나는 서인하 선배와 눈을 마주쳤고, 그는 금세 표정을 바꿔 정민우 팀장의 어깨를 두들겼다.
“왜 이래, 이거. 이렇게 이야기 들려주고 말해 주는 것으로도 충분해. 처음부터 너한테 뭐 바라고 온 게 아니야.”
“그렇지만…… 후우, 아닙니다. 제가 뭐 더 해 드릴 수 있는 게…….”
그렇게 이야기하려던 정민우 팀장의 주머니에서 폰이 진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폰을 꺼내 패널을 확인하다가 흠칫 놀랐다.
“표인배 실장입니다. 저, 올라가 봐야 할 것 같은데요.”
“그래, 올라가 봐. 바쁜 사람 너무 잡았네.”
“아닙니다. 뭐 혹시 바뀌는 게 있으면 바로 연락드릴게요.”
나한테도 인사를 남기고 정민우 팀장은 재빨리 회사로 돌아갔다.
그리고 몇 분 지나지 않아서 서인하 선배에게로 전화가 걸려왔다.
“그래? 5팀에 오더 내려왔다고?”
내 눈치를 본 서인하 선배가 즉각 스피커 통화로 돌렸다.
“예. 올라가니까 <더 라이벌> 맡으라고 하더라고요.”
“대한이가 5팀에서 진행한 거니까, 아마 그래서 다시 맡긴 거겠지.”
“그렇겠죠. 하지만 건방지잖습니까. 그래서 대차게 거절해 줬습니다.”
헐.
“기획을 뺏어간 건 아니라고 해도, 예의가 아니잖아요. 나간 사람 기획을 양해도 없이 그렇게 진행해 버린 게. 그래서 나는 못한다고, 맡기려면 다른 팀에…….”
“아뇨, 정 팀장님. 그러지 말아 주세요.”
그의 말을 끊었다.
“대한이냐? 왜?”
“다른 팀이 할 바엔, 차라리 그냥 5팀에서 해 주십시오. 정 팀장님이 책임져 주시는 게, 오히려 저는 안심이 됩니다.”
어차피 나와는 이제 관계없이 진행되어야 하는 시즌2다.
그렇다면 가장 안심이 되는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나도 납득할 수 있었다.
“<더 라이벌> 시즌2, 잘 부탁드립니다.”
“……어휴, 이 새끼. 진짜.”
“못 본 사이에 입이 많이 험해지셨네요.”
“내가 너 보고 욕하고 싶었던 게 한두 번인 줄 알아?”
정민우 팀장이 수화기 너머에서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구시렁대고서는, 성대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다시 올라가서 보고할게. 그럼 됐지?”
“잘 부탁드립니다, 형님.”
“형님? 이게 어딜 건방지게.”
이제 제 팀장님 아니시잖습니까, 라고 덧붙이자 정민우 팀장은 뭐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치고는 뚝 끊었다.
옆에서 서인하 선배가 웃음을 참는 표정으로 말했다.
“부끄러워서 그래. 자기한테 형님이라고 부르는 후배가 잘 없거든.”
“후배들 잘 챙겨 주시는 좋은 분이신데 희한하네요.”
“그것과 그건 또 다르니까. 어쨌든 신세 지겠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다음에 보면 술이라도 사야겠습니다.”
좋은 선배와 사람들이 이렇게 있는데, 첫 단추를 제대로 꿰지 못했다.
NBS까지 왔는데 원하는 바는 제대로 이뤄내지 못한 것이다.
“어떡할까. <더 라이벌> 시즌2는 아무래도…….”
이렇게까지 일이 진행되었지만, 서인하 선배는 여전히 내 입장을 배려해 주려고 하고 있었다.
그 마음을 알기에, 나는 커피를 꿀꺽 원샷하고 이야기했다.
“기획이 <더 라이벌>만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저렇게 나온다면, 아예 새것을 가져다주는 것도 방법이겠죠.”
“그래, 그렇지. 한번 같이 만져 보자.”
“예.”
한 차례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멍하니 있으면 안 되지. 나도, 서인하 선배도, 그럴 마음은 일절 없었다.
* * *
금완승 감독에게도 이 건을 알리고, 회사로 돌아가서 오늘의 결론을 전달했다.
우철민 PD를 비롯한 직원들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모두가 회복은 빨라서, 다들 나와 같은 마음이 되어주었다.
“좋은 아이디어 있으면 말씀 주세요.”
회의실에 모여서 앉아 있기보다, 그때그때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을 모두가 공유했다.
다들 PD로서의 이력이 있고 능력이 있다 보니, 좋은 아이디어들이 나왔다.
하나하나 AGD 앱으로 확인하면서 다듬고, 다시 그것을 NBS로 들고 가는 과정이 되풀이되었다.
“이건 어떨 것 같아?”
가져갈 때마다 서인하 선배는 나에게 그렇게 물었고,
“글쎄요.”
나는 쓰게 웃었다.
그 과정이 몇 번을 지나고 나자, 나는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아이윌의 기획은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매번 곽성찬 본부장을 만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표인배 실장을 더 자주 만났는데, 그는 성의껏 응대하는 듯하면서도 단 한 번도 기획에 오케이를 내려주지 않았다.
이유는 매번 여러 가지였다. 이미 내부에서 비슷한 게 진행 중이다, 신선함이 없는 것 같다, 너무 실험적인 아이템이다 등등.
하다못해 <언더커버 싱어> 새 시즌의 기획을 가져갔을 땐,
“아, 당분간 경연 프로그램은 지양하려고 합니다. 오디션보다는 낫다 해도 여전히 여론이 좋진 않아서요.”
그 말에는 나도 발끈해서 비꼬고 말았다.
“<더 라이벌>도 오디션 프로그램 아닙니까? 그건 진행되고 있을 텐데요.”
“방송 중의 경연 형식은 없애려고 하고 있습니다. 오프더레코드이니 주의해 주시고요.”
그는 아주 태연하게 맞받아쳐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그런 과정이 몇 번 반복되는 사이, 해외 출장길에서 드디어 왕이범 이사가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내부를 파악했는지 서인하 선배에게 전화가 왔는데, 씁쓸함만이 감도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내부 이사진과 사장 결재까지 떨어진 일이라 어떻게 하실 수가 없다네.”
“왕 이사님도 상심이 크겠습니다.”
“그러게. 미안하다고 계속 그러시는데, 내가 참 더 미안하더라고.”
결국 서인하 선배는 그날 왕이범 이사를 만나러 가, 다음 날 늦게 출근했다.
상황이 그렇게 되니 여러모로 머리를 굴려야 했다.
NBS에서 기획이 통과되지 않는다고 한들, 아이윌이 굴러가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미 여러 외주 의뢰가 들어온 제작들이 진행되고 있어서, 제 밥벌이는 충분히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이다.
방송을 만들기 위해 이 회사로 온 것인데, 막혀 있다고 만들지 못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것 아닌가.
나는 해장국 먹자는 요량으로, 숙취에 힘들어하는 서인하 선배를 끌고 나왔다.
가산디지털단지 근처에는 맛집은 몰라도 직장인들이 적당히 먹을 만한 음식점은 많았다.
최근 자주 가는 해장국집에서 해장국을 주문하고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NBS는 포기하죠, 저희.”
“…….”
물을 마시던 서인하 선배가 나를 힐끔 보더니, 원샷을 하고선 탁 소리가 나게 컵을 내려놓았다.
“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아냐.”
“NBS를 고집하시는 건, 왕 이사님 때문이잖습니까. 하지만 그분도 저희한테 도움을 못 주시고, 기획은 계속 리테이크 당하고 있는데, 더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서인하 선배는 왕이범 이사나 NBS 자체에 좀 더 신경 쓰고 있을 것이다.
그만큼 오래 일한 직장이니 그럴 만하다고 이해는 하지만, 지금은 사장으로서의 결단이 필요한 때다.
그러지 못할 사람도 아니고.
“어차피 NBS에만 방송 넘기려고 제작사 세우신 거 아니잖아요. 다른 방송국도 많고, 선배님 인맥이면 미팅 자리 한번 못 만들 것도 없으시잖습니까.”
나보다 서인하 선배의 업계 경력이 더 길고, 인맥도 더 넓다.
회사를 연 지 이제 3개월을 막 들어가는데, 아직 내 손에서 아무것도 제대로 못 만들고 있다니 속이 탔다.
이 상황을 타파하기에는 어떻게든 움직여야 했다.
“……후우, 그래. 나도 그 생각은 안 한 건 아니니.”
때마침 해장국이 나왔다.
일단 속을 달랠 겸 먹은 다음, 어느 정도 비었을 때 서인하 선배가 말했다.
“오늘부터 한번 알아볼게. 미팅 잡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예. 그럼 전 기획안들을 방송사 특성에 맞게 고쳐 보겠습니다.”
“그거 다 고치려면 엄청 힘들 텐데.”
“그래도 해야죠.”
없는 길이 힘들지, 있는 길을 걷는 것이 뭐가 힘들까. 슬리퍼든, 나막신이든, 하다못해 맨발이라도.
머릿속에서 세차게 생각이 돌아가던 중에 문득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허소윤 CP는 혹시 어떨까요.”
“채널T? 허 CP라면…… 그래, 프로그램 제작 권한도 어느 정도 있으니 괜찮겠지.”
대답하면서도 서인하 선배가 목이 타듯 물을 마셨다.
“그런데, 허 CP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했잖아. 너를 만나 줄까?”
서인하 선배가 약속을 잡더라도 어차피 나도 같이 나간다. 나한테 한차례 거절당한 사람이 긍정적으로 봐주겠냐는 물음이었다.
거기에 대해서는 묘한 자신감이 있었다.
“비록 거절했지만, 좋게 헤어졌습니다. 괜찮은 인상을 남겼다고 봅니다.”
“그래?”
서인하 선배는 고민하는 듯했지만, 말하다 보니 내 안에서 한 박자 빠르게 방향이 결정되었다.
“제가 연락해 보겠습니다. 되든 안 되든, 연락을 무시하진 않겠죠.”
“……뭐, 그래. 그럼 그쪽은 너한테 맡길게.”
둘이서 그렇게 간단한 회의 겸 점심을 해치운 다음, 곧장 허소윤 CP에게 전화를 했다.
띠리리―
무미건조한 전자음이 한참이 지난 다음에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었다.
안 받는 건가.
혹시 몰라 한 번 더 전화를 하고, 다시 이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서 메시지를 남겼다.
[안녕하세요.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NBS에서 일했던 강대한입니다. 시간 괜찮으실 때 연락 한번 부탁드리겠습니다]
답은 의외로 빨리 돌아왔다.
[허소윤CP: 회의중이에요 끝나고 전화하죠]